정조의 ‘글쓰기 정치’
정조는 18세기 개혁군주였다는 통념이 일반적인데, 그가 문학(文學)에 뛰어난 군주였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문학을 통해서 정치적 담론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해갔다. 정조는 외척과 권신을 배척했기 때문에 즉위 직후 권력의 물질적 기반이 공고하지 못했다. 대신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여러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당시 사대부 관료들의 동의와 지지를 구하려고 하였다.
--- 1권 『정조의 문치』, 「머리말, 정조의 문학과 문치」 중에서
시에 정치적 함의를 담다
정조는 문학의 장르적 관습을 지켜 시문을 창작하면서도 여기에 정치적인 함의를 담아내었다. 본인이 시를 이러한 방법으로 창작했기에, 그는 신하들이 창작한 시의 정치적 의미를 묻곤 하였다. 심환지와 이만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1798년 3월 17일에 보낸 어찰에서 심환지가 지은 한시에 있는 “반나마 비었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물었다. 누군가가 벽파에서 이탈한 것은 아닌지 그 정치적 함의를 물었다. 이만수에게는 자신이 어제시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정치적 의도를 이만수의 갱재시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의사를 전했다. 이와 같은 정조의 문학은 형체 없는 권력을 문학을 통해 형상화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 1권 『정조의 문치』, 「2부, 문학을 통한 담론 생성과 통치 정당성 제고」 중에서
정조의 ‘이순신론’
정조는 왜 그(이순신)를 문무겸전의 상징적 인물로 지목하였던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의 비루하지 않았던 행적과 인품이다. 그는 벼슬을 탐내어 고위 관료에게 줄을 대거나 청탁하지 않았고, 상관의 명령이라도 부당하고 불의한 것이면 사리를 따지며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무장들은 용력 (勇力) 이 세거나 무공만 높을 뿐 염치없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관행적으로 주는 선물인 부채 등을 중앙의 고관에게 상납하는 융통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 2권 『정조의 무치』, 「3부, 정조의 문·무 인식과 대책」 중에서
유교적 전통 안에서 문과 무의 겸전을 지향하다
정조의 문무겸전론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전통 안에 포섭되는 이념이었으며, 그의 군사 개혁도 근대적 군대를 지향하거나 국방력의 획기적 강화를 위해 추진되었다기보다 고제와 고례를 지향한 상징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도는 당대 맥락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정책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군사 분야를 포함한 그의 전방위적 개혁은 군사(君師)를 자임한 철인군주(哲人君主) 정조가 자신의 소명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이행한 결과물이었다.
--- 2권 『정조의 무치』, 「맺음말, 예와 통으로 문무일체의 이상을 추구한 국왕, 정조」 중에서
만민을 가르치면 책임 있는 실천으로 이끌 수 있다
정조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도덕적 능력은 하늘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준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을 가르쳐 자율적인 도덕주체로 거듭나게 하면, 그들 각자가 자발적으로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본심에 토대한 책임 있는 실천들을 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가 행정력을 써서 일일이 개입하고 간섭할 필요도 없고 형벌로 위협하고 감시하지 않아도 집집마다 편안하고 다툼 없이 안정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례, 향례, 학교례 등 정부 이외의 영역에서의 예제에 더 힘을 기울이고 실천해야 했다.
--- 3권 『정조의 예치』, 「머리말, 정조의 조선 예제 인식과 변통론」 중에서
정조가 관례와 혼례를 『향례합편』에 넣은 문제의식
조선에서도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가례서를 만들며 신유학적 가족 모델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상례와 제례는 과도할 정도로 행해졌지만, 정작 관례와 혼례는 예제대로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신유학적 문제의식에 따라 가정을 교육의 첫 장소로 삼고, 가정에서 배운 공공적인 마음을 사회로 확장해나가길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큰 문제로 여겨졌을 것이다. …… 신유학적 가례 제도의 본의를 되살려 ‘가’가 만민 교화의 첫 장소로 기능할 수 있도록 되돌려야 했다. 정조가 풍속 교화를 돕기 위해 『향례합편』을 편찬하면서 이미 과도하게 실행되고 있는 상례와 제례 대신 관례와 혼례를 넣도록 한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 있었다.
--- 3권 『정조의 예치』, 「2부, 향례: 지방의 자발적 도덕화에 대한 기대와 『향례합편』」 중에서
태학 유생들과 함께 밥을 먹다
1783년 8월에도 춘당대에 나아가 태학 유생을 불러 강을 하고 나서 식당을 베풀었다. 정조는 “정자 (程子)는 승사(僧舍)에 모여 앉아 먹는 것을 보고도 삼대의 위의가 있다고 감탄했으니, 대학의 식당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북을 쳐서 나아가고 나이 순서로 앉는 것이 질서정연하여 볼 만하기에 내 기꺼이 유생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나물 반찬이 비록 초라하나 내주(內廚)의 진수성찬보다 나으니, 경들은 각각 배불리 먹도록 하라.”고 하여, 북을 쳐서 나아가고 나이순으로 앉는 태학의 예제에서 성대했던 옛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식당에서 기꺼이 유생들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식당례는 꼭 태학 유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 사회의 각종 차별 관행에서 벗어나 나이에 따라 존중하고 양보하는 새로운 문화를 익히는 것은, 모든 학교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 3권 『정조의 예치』, 「3부, 학례: 공교육 정상화의 노력과 태학 예제의 정비」 중에서
정조가 살옥 심리에 밤새워가며 정성을 쏟았던 이유
조선의 형정은 교화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판결문을 통해 덕화의 의지를 천명했을 뿐 아니라 관료들의 형정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으며, 나아가 백성들의 행동을 바루고자 했다. …… 정조는 살옥사건을 심리하면서 천하의 공론, 즉 물정에 부합하는 최선의 판결을 얻음으로써 당대의 인정세태에 호응하고자 했다. 물정에 부합하는 시중의 판결을 내리는 순간, 그 재판 결과는 민심에 공평한 법 감정으로 수용될 것이요 원통함은 저절로 사라질 터였다. 정조가 살옥 심리에 밤새워가며 정성을 쏟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 4권 『정조의 법치』, 「머리말, ‘권선징악’의 통치론」 중에서
차라리 관대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지나쳐서는 안 된다
형벌은 불가피하지만 될 수 있으면 처벌을 가볍게 하여 호생지덕을 펼쳐야 했다. 정조는 이른바 초옥(楚獄)의 고사를 경계로 삼았다. 초왕(楚王)의 감옥에 사람이 넘쳤다는 일화는 중국 한대 명제(明帝)의 동생 초왕이 모반한 뒤 이와 연관되어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던 일을 비판한 것이다. 왕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이를 기쁘게 생각한 나머지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형정은 차라리 관대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지나쳐서는 안 되고, 가볍게 처벌하는 잘못을 저지를지언정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누군가가 왕의 의지가 나약하다고 비판하자, 정조는 엄형을 일삼다가 나라가 망한 초옥의 고사를 지적한 것이다.
--- 4권 『정조의 법치』, 「2부, 『일득록』을 통해 본 정조의 법치」 중에서
광자와 의협을 칭송한 정조의 교화론
공정한 사회는 불의와 부도덕에 침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정조는 함묵과 교언영색을 비판하는 동시에 진정한 광자와 의협의 용기를 칭송했다. 부당함에 과감히 맞설 수 있는 광자들, 이들이야말로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다. …… 그리고 천금을 주고라도 광자의 용기를 칭찬해야 한다던 다산의 생각은, 명덕(明德)을 부여받은 그 누구라도 불의와 부도덕을 비판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정조의 교화론에 바탕했다. 정조의 통치 기획, 다시 말해 명예를 아는 사람들과 진정한 광자들에 의해 말세(末世)의 조선이 일신(日新)할 것이라는 기대는 소민들에 대한 교화, 인간다움의 도리를 강조한 형정 운영과 그 맥락이 잇닿아 있었다.
--- 4권 『정조의 법치』, 「3부, 정조의 명예론과 『심리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