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시인의 말
제1부 블루 플래닛 - 11 자주색 가방 - 12 웃음 받아쓰기 - 14 버진로드 - 16 황화식물 - 18 스프링 - 20 봉쇄 복음 - 22 아침이 슬픔을 꺼내 든 이유 - 25 아마랜드 - 26 반달의 화법 - 28 동백 나팔수 - 30 사바나 주의보 - 32 제2부 굴뚝 청소부 - 37 천사는 후회를 모른다 - 40 중얼거리는 생각 - 42 어쩌다 미어캣 - 44 누수 - 46 사랑이 다녀갔다 - 48 나 홀로 공작소 - 50 두근두근 수업 - 52 허들링 - 54 당분간 박쥐 - 56 모과 생각 - 58 벌거벗은 요리사 - 60 제3부 천사의 몫 - 65 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 66 긴팔원숭이의 보고서 - 68 밤의 서점 - 70 김ㅈ - 72 얼굴 없는 수도사 - 73 모모 시계 - 76 파랑 리플리 씨 - 78 자라공 - 80 혼자 노는 양 - 83 오 년 만의 외출 - 86 가까스로 마당 - 88 제4부 원정 - 91 셀러 - 92 야말 - 94 게 의지 - 96 고양이 크레파스로 살아남기 - 98 백엽상 - 99 하여간 염치 - 102 주머니 - 104 우울 손님 - 106 주사위의 노래 - 108 레트로 열차 - 110 천사를 위한 위스키 - 112 당신이 지나간 자리 - 114 해설 임지훈 여기, 가까이에서 빛나는 파랑(靑色)의 마음 - 115 |
|
블루 플래닛
수천 오리 떼가 바다를 점령합니다 행성호가 난파와 애인 놀이 하다 낳은 성마름의 자리입니다 한자리에 모였다 흩어지는 모습은 마른 꽃잎이 물에 잠겼다 피어나 장난 같아 보입니다 바다는 뿔뿔이 혼자를 만듭니다 장난감이 아니었다면 노랑 오리는 가라앉아 날개와 다리가 부식되고 산호가 되었을 것입니다 노랗거나 파란 물고기들이 종족의 냄새를 찾아 주위를 배회했을 것입니다 스노클링하는 사람들이 빵을 던져 주어 외로움은 산호 속에서 아름답다는 말로 빛날 것입니다 바다 꿈속을 그대로 둔 채 빠져나온 노랑 오리는 여기를 둔 채 저곳으로 떠납니다 눈을 뜨고 떠나도 아일랜드 연안의 사랑받을 예감에 닿지 않습니다 나는 내 이름에 닿지 않습니다 ―――――――――――――――――――― 아마랜드 이곳을 떠난 적 없이 이곳에 속한 적도 없이 회전목마를 탔다고 했다 선택받지 못한 순간에도 떠밀려 어울린 공간에도 불가능한 램프는 가로등처럼 켜져 있었다 익숙한 뒤통수 얼굴을 따라가 보면 백야 같은 감정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꿈꾸는 바보처럼 목마는 하루치 분위기를 먹고 산다고 했다 어설프고 들뜬 색깔은 나의 기후구라고 했다 물먹은 구름이 바람을 만나면 실시간 어떤 현실을 쏟아 낼지 입장을 대변할 펜촉은 있는지 버려진 밥통이었다가 음식을 기다리는 젓가락이었다가 이어진 행진곡으로 목마는 달린다고 했다 목마는 멀리서 보면 앞으로 전진하고 있을 것 화분 안의 개미는 화분 밖의 세상을 몰라도 진딧물 목장 차려 놓고 휘파람 부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 보는 일이라고 했다 봄이 정거장을 만났을 때 꽁꽁 얼어 있었다 가을이 정거장에 내렸을 때 만각의 더위를 씻고 있었다 좋아하는 말들이 달아났다 입을 열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의 길을 벗어난 해찰이 너에게 가까워지는 방식 목마는 아마도가 기항지라고 했다 연일 실측하고 연일 실축하는 ―――――――――――――――――――― 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모자랄 게 없어 눈 밖을 몰랐다 초원은 어디든 빈집이었지만 눈에 불을 켰다 끄고 마는 풋풋한 마을이었다 푸르름으로 인심을 얻고 잃었지만 서두르지 않는 보행법은 쓸쓸함이 놀다 갈 등걸을 마련하는 것 빈 옆구리로 쏟아져 내릴 추억을 앓고 있는 것 익숙한 밤낮이 잘 숙성되었지만 먹지 않을 풀은 건드리지 않는 약시의 코뿔소 아무도 이상 기온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초원에 이만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한다 폭설은 처음 보는 먼지라서 괘념치 않았지만 차가움의 촉감이 풀 가시처럼 박혔다 한다 몸에 살지 않는 차가움으로 미쳐 날뛰었지만 이웃들 점호하듯 폭설이 짓밟고 갔다 한다 웅크린 이웃이 짧은 다리로 헤쳐 나가려 했지만 야크처럼 털이 없어 추위를 내치지 못했다 한다 추위는 정지된 세상으로 초원을 정복하려 했지만 사방 비명의 나팔 소리로 눈발은 머뭇거렸다 한다 비명은 몸에서 분리된 뿔로 천명을 다하려 했지만 진군하는 폭설에 백기를 들었다 한다 백기 든 태양도 초원도 지평선도 얼음이 되어 코뿔소는 미라가 되었다 한다 도망자로 살아 봤다면 먼 근친들이 훗날을 걷고 있음을 알았다면 경계에 사는 자만이 새로운 땅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 본문 중에서 |
|
유일한 당신이 나를 본 순간 나는 생략되었다
어쩌면 시인이란 눈앞의 현실보다 기억해야만 하는 시간과 대상을 향해 스스로를 몸 기울여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불행에 노출시키고, 추위를 감내하고, 스스로의 존재가 무너질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언어를 향해 스스로의 경계를 자꾸만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차마, 지금을 바라보는 눈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가 ‘나’였던 그 시간을 위해서 거듭 사라진 ‘대상’을 ‘나’의 노래를 통해 이곳에 현전시킴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면 김지명 시인이 제시한 ‘파랑’의 바다는 외로움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외로움으로부터 누군가를 절실하게 현전시키는 존재의 바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외로움을 강하게 감각할수록 누군가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듯이. 우리의 그리움이 그 속에서 몸을 얻어 선연해지는 순간, 나의 과거가 되어 버린 누군가가 선명한 파랑의 색채로 나의 눈앞을 물들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바다에서, 시인의 언어는 지금도 뭉쳤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며, 어떤 냄새와 기척을 향해, 어떤 겨를을 향해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파랑의 바다는 외로움의 바다이면서, 그러한 외로움을 통해 ‘당신’을 호명하는 길고 긴 애도의 작업이 아닐까요. 나의 몸이 얼어붙어 무너지더라도 완수되어야만 하는 길고 긴 애도의 작업……. 비록 이것이 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만 수행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언어를 무너뜨려야만 가닿을 수 있는 언어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그의 언어는 계속해서 표면의 경계를, 수면을 찰방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찰방이는 의미의 표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손을 깊숙이 넣어 보는 것, 그리하여 그 물성을 손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임지훈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유일한 당신이 나를 본 순간 나는 생략되었다. 도착하지 않을 시작 가능한 나를 보았다." - 저자의 말 중에서 |
|
시집 속에 ‘굴뚝 청소부’가 산다. 어둡고 컴컴한 굴뚝에서 깊고 맑은 새소리가 들린다. 새의 몸에 의탁하여 노래를 발명하고 굴뚝의 속내를 드러낸 시인의 그림자가 시집 곳곳에서 동백의 꽃자리처럼 붉다. 세상에 쉽게 편입되지 못한 불우의 흔적을 지우며 시집 속 화자는 존재의 내밀한 구석구석을 미세모의 시선으로 성찰한다. 섣불리 시적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시가 스스로 발언하게 하는 능력을 여러 시편에서 보여 준다. 탄력과 긴장을 잃지 않고, 시의 인력과 척력을 활용하여 시의 완성도를 높인 결과이다. 특히 언어의 한계를 인지하고 언어를 넘어서고자 하는 부분은 김지명 시인의 특별함이 도드라지는 지점이다. “말의 길을 벗어난 해찰이/너에게 가까워지는 방식”(「아마랜드」)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세상에서 빌린 말을 던지며”(「반달의 화법」) 사라지는 별똥별을 따라가는 화자, 그를 만나면 독자는 “말의 문장이 잠적”한(「당신이 지나간 자리」) 영토에 슬며시 발을 얹게 된다. “싱싱한 노래가 태어날 때까지”(「허들링」) 시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에 응전하며 시의 험로를 걷는다. 끝없이 언어를 회의하면서 말을 빚는 역설의 길 위에 서서 시인은 명징한 시선으로 세계를 읽고, 여러 삶의 표정들을 섬세한 촉으로 짚어 낸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시적 주체는 죽어 있는 언어에 신생의 숨을 불어넣어 “새로운 땅을 갖”게 되고(「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타자를 향한 감각과 인식의 지평을 확장한다. 그리하여 김지명 시집에 발을 들여놓은 독자는 언어 너머에 낯선 공법으로 건축한 아름다운 시의 사원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자기 이름을 모르는 시의 황홀과 노래를 발명하는 ‘굴뚝 청소부’가 있다. - 홍일표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