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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창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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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인의 말·4

제1부
발바닥의 생·14
부대찌개·16
언덕·18
핑계·20
부러진 상사화·22
투병 중·24
귀향·25
벽시계·26
칼바람·27
제주도 막걸리·29
가풍·30
배달의 기수·32
밥집에서·33
생일·35
돌팔매·37
아내·38
늦은 꽃·39
삐딱구두·41
안부 전화·42

제2부
농사·44
죽음에서 배운 삶·46
파란만장·48
식물원·50
장남·52
삼각관계·54
지훈이·56
꽃 소식·57
꼬부랑 할머니·59
방물장수·60
낫 장수 처녀의 풍물 장단·61
정자나무·63
억새꽃 부부·65

제3부
풀 깎기·68
책장·69
암탉·70
마스크·72
동쪽의 집·73
낙엽·75
세대·76
발버둥·77
동백·78
몸의 기억·80
삼불(三佛)·82
오카리나·83
시·84
거울 보기·85
도시로 간다·86
고요한 마을·87
시작(詩作)·88
주소록을 정리하며·89
개천절·90
다알리아·91
철·92

해설
무구한 존재들이 펼치는 여백의 미학(오홍진)·93

저자 소개 1

경기 용인에서 나고, 충남 홍성에서 성장했다. 2010년 『작가마루』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현재 문화재활용사업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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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8*205*20mm
ISBN13
9788966551446

책 속으로

가운데가 움푹하다
하늘을 닮았다

서쪽 끝에서 시작된 걸음마는
고단한 보행을 지나
지금은 천기를 읽을 나이

으르렁대는 천둥 뚫고
각질 더덕한 걸음으로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중이다

시끌벅적 물장구치는 아이들
돌부리에 차이며 졸졸대는 시냇물
물 등에 얹힌 시간의 주름들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언제나
맨발이었다
몸을 지탱하며 앞만 보던 엄지발가락이
한풀 꺾여 하늘 향해 있다

--- 「발바닥의 생」 중에서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태엽을 감던
아버지 떠나신 후로
멈춰버린 시계

감아도 더디 가는 녹슨 태엽처럼
아버지 모습도 흐릿하다

이제는 녹슨 시간을 지나
남은 시간을 살아내야 할 때
시계를 바꿔 달았다
밤에도 잘 보이는 전자시계다

시계 뒤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벽시계 떼어낸 자리
하얗게 멈춰 있다

네모반듯 관짝 같다

--- 「벽시계」 중에서


장수원 치매 노인들과 전통 놀이 한다

영도 할아버지는 복자 할머니 뒤만 따라다닌다
할아버지는 간식을 받으면 주머니에 숨겼다가
몰래 복자 할머니 손에 쥐여준다
연애편지나 휘파람 따윈 잊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는 몸이 기억한다

장수원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몰던 내 손에
할머니가 내리시며 무엇인가를 쥐여준다
간식 시간에 나눠준 사탕이다

이후로 영도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복지사에게 물었더니,
할머니가 내게 사탕 주시는 걸 보셨단다
그 사탕이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주신 거였단다
그날 이후로 영도 할아버지는
말씀도 줄고 할머니를 피해 다닌다고 한다

복자 할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복자 씨, 내 사랑은 사탕 하나로는 택도 없어요
요즘 밥 먹자는 할머니가 있어요
사탕보다 밥이 좋은 절 용서하세요

--- 「삼각관계」 중에서


가족처럼 잘 지내보자
열심히 일하면 분점도 내줄게
어부의 손은 장밋빛이다

동해에서 서해에서
꿈꾸는 생선들이 모여드는 어시장
수족관은 푸른 꿈으로 넘실대는
마지막 바다다

몇 푼의 지폐와 꿈이 거래되고
검은 예복 입고 도시로 간다
파도 소리 대신 끓는 물소리 들으며
도마에 올라 돌아보는 바다
자장가 한 소절 아련히 뒤척인다

섣불리 도시를 꿈꾼 죄
요동치는 냄비 속으로 바다를 게워낸다

--- 「도시로 간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천천히 흐르는 냇물 같은 시

이현조 시인의 시에는 멀미나는 속도가 없다. 아주 천천히 흐르는 냇물처럼, 여기저기 해찰하면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현상은 이정록 시인이 추천사에서 말한 것처럼 “오래전에 도착한 문장을 발굴”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시인 자신을 중심점으로 해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주위의 삶과 숨결을 그대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사소한 에피소드라도 시인이 그린 원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슬픔마저도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는 시인의 ‘눈’이 맑은 하늘과 같아서 벌어지는 일일 게다.

오르기 위해선 가벼워야 한다
이승의 밥으로 연명해온 몸
며칠 새 피골이 상접이다

(…)

사선에서 그리운 건 얼굴뿐이다

가족과 친족을 넘어서지 못하는 일생
그걸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았다
혈서로 맺어진 얼굴
몸보다 더디 비워진다
_「투병 중」 부분

“새털 같은 꺼풀조차 들어 올리지 못하는 눈”을 가진 혈육의 아픔을 말하는 이 작품에서 읽을 수 있듯이 시인은 단지 슬픈 정서를 토해내지 않고, 도리어 슬픔의 무게를 덜어냄으로써 영혼의 평정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이 평정 상태가 정적인 것은 아니다. “가족과 친족”을 위한 단순한 삶이었을지언정 그 삶에도 엄연히 무게가 있음을 시인은 아주 ‘간신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혼의 평정 상태에 대한 시인의 추구가 멀미나는 속도를 덜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인의 이런 영혼의 상태는 주로 노인들과의 관계에 의해 가능한 것도 같다. 시집의 전체에 걸쳐 시인의 눈은 가볍지 않은 역사를 살아온 이들에게 머물러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존재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기도 한다.

여흥 민씨라고만 했다
아버지가 면서기를 지내다 빨갱이에게 처형당했다고 했다
다른 집안 내력은 일절 말하지 않았다
말할 게 없었다
여흥 민씨는 무조건 벼슬을 준다는 황후의 제안도 거절하고
할아버지는 항일운동을 했지만
면서기가 된 아버지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_「장남」 부분


낮은 불길처럼

이 오래된 ‘유정’은 확실히 독자를 현재가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그 다른 세계에는 “낫 장수 처녀 홀로 남아 장구를 치는”(「낫 장수 처녀의 풍물 장단」) 풍경이 상징하는 우리가 지나온 삶이 있는데, 이현조 시인의 시에서는 그 지나온 시간이 현재가 된다. 이것은 분명 ‘현대’라고 부르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현대의 폭력적인 속도가 없는 평정한 세계라는 의미에서 독자에게 ‘현대’를 다시 묻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현대’는 저 다른 세계의 배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할매 하늘이 제법 무겁쥬
하늘이 무겁기루 자식만 허것어
하늘은 흐렸다 개기라두 허지
자식 놈은 맨날 먹구름이여
_「꼬부랑 할머니」 부분

바람의 시간을 오래 견뎌야 품이 생긴다
오래된 집이 처마를 펼쳐 참새를 품고
오래된 축대가 품을 넓혀 민들레를 품었다
_「세대」 부분

알고 보면 ‘현대’는 “바람의 시간”을 회피하려는 세계이다. 벽과 건물을 세워 바람을 막거나 다른 데로 흘려버리려 애쓰는 시간이다. 하지만 ‘현대’를 잉태하고 낳은 다른 세계는 ‘현대’를 아직도 업고 있으며 “처마를 펼쳐” 비바람을 막아준다. 아직도 “참새”나 “민들레” 같은 생명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의 시간”을 지금도 묵묵히 견디고 있는 이 시간을 ‘현대’는 망각하거나 지우려고 하지만, “혹시나 해서 발버둥 쳐보는”(「발버둥」) 존재들이 아직은 여전함을 이현조 시인은 말한다. 이 시집의 미덕은 있으면서 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게 온기를 건네는 따스한 불길 같은 시인의 서정에 있다. 그런데 눈여겨봐야 할 점은, 시인 자신이 자신을 “져야 할 때 피어난 상사화”(「늦은 꽃」)이라고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직은 질 수 없다는 나직한 독백이 비록 거세진 않지만 묵묵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늦은이 아니라) 낮은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 “짱이다”.(「삐딱구두」)


시인의 말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치원 다닐 때 매일 동생 하나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내 소원을 들어주셨다. 어느 날 막내에서 셋째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동생 하나쯤은 너끈히 만들어내시는 분이셨다.
위로 두 분 형님은 초등학교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수재였다. 하지만 난 그냥 적당한 놈이었다. 공부도 성품도 그냥저냥 튀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사춘기를 맞으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녀석이었다. 중학교 이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 가출을 했다. 폭설이 내리던 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정강이까지 푹푹 발이 빠지는 길을 10킬로미터가 넘게 걸었다. 더는 갈 수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버스 정류장 매표소에 들어가 무작정 빵을 집어 먹었다. 그럭저럭 허기를 면하고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 주인아저씨가 조용히 물었다.
“너, 돈 없지?”
“네.”
“집이 어디냐?”
“벽계리요.”
“어이구, 멀리도 왔네.”
그러곤 조용히 버스표 두 장을 건넸다.
“그만 집에 들어가는 게 어때?”
구십 도로 허리 굽혀 버스표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 그 누구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가출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냥 아침에 나가 놀다 들어온 아들이었다.
그리고 삼 학년 때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검정고시로 학력을 채우겠다고 우겼다. 그때 처음으로 내 안의 글을 끄집어냈다. 봄볕이 쏟아지는 담장 아래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고 쪼그려 앉아 시조를 흥얼거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글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학교에 나오라고 설득하면서 그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물으셨을 때, 마땅히 답변할 것이 없어 글을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 시인이 되어볼래?”
그날 이후 내 꿈은 시인이 되었다. 부모님은 내게 무엇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국어 과목을 가르치던 담임선생님의 한마디가 내 일생의 꿈이 되었다.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날아가버려라.
낱낱의 홀씨 되어 다 날아가버려라.
누군가 어딘가
닿아서
밟혀도 좋고 버려져도 좋다.
그렇게 비워진 난
봄이 오면
새 꽃을 피울 테다.

2021년 가을에
이현조

추천평

대부분의 시인들은 새로운 문장을 기다린다. 한 소식 얻는 일이 필생의 바람이다. 그러나 이현조 시인은 오래전에 도착한 문장을 발굴한다. 새로이 흙을 빚는 게 아니라, 주꾸미가 웅크리고 있는 바닷속 청자를 꺼내어 펄흙을 벗겨낸다. 수만 년 전부터 떨어져 내린 벚꽃 잎에서 집 나간 딸의 편지를 읽는다. 죽은 이의 흰 옷자락을 불러내어 허공에 춤사위를 풀어놓는다. 꽃잎 하나 지는 일이 곧 사람의 일이다. 그의 시는 떠난 자들을 다시 불러내는 제문이다. 최초의 시간과 공간을 빚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우리네 삶의 살강이나 마루 밑에서 동행해온 질그릇을 찾아내어 밥상을 차리는 일이다. 그의 시에는 눈을 비비고 다시 떴을 때, 깜짝 현기증이 이는 오래된 풍경과 눈꺼풀의 떨림이 있다. 잿물로 닦은 놋그릇, 거기에 비친 노을의 초경이 있다. 죽을 때까지 혼자 살겠다고 헛소리 쳤던, 수컷 곰의 첫날밤이 있다. - 이정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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