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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 4
1부 빈 배─육지의 노래 · 12 뒤집힌 꽃잎─바다의 노래 · 14 다큐멘터리─사마에게 · 16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 18 그때─4·16 · 20 바다의 목젖 · 22 무덤 · 24 폭죽 1 · 26 폭죽 2 · 27 퍼스트 맨 · 28 샴 · 30 저녁의 매무새 · 32 제주 · 34 깡통을 줍는 노인 · 36 서울전파사 · 38 순한 골목 · 40 빨래 · 42 별빛을 모두 엎어놓을 겁니다 · 44 은혜 갚은 세 · 46 2부 밤에 대하여 · 50 물집 · 52 압천 · 53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 · 54 포그링 · 56 밝은 귀 · 58 결로 · 60 불량 주차장 · 62 외계 · 64 비가 넘어지며 온다 · 66 사거리의 보호색 · 68 세밑 · 70 눈 내리는 새 · 73 남산 · 74 틈 · 76 원미공원 · 78 1998 · 80 낮술 · 82 관상용 수조 · 84 사직 · 86 3부 발톱의 뒷면 · 90 가풍 · 92 도락리 민박─청산도 · 94 달은 오랫동안 미끄럼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 96 홍시 · 98 보문동 · 100 흑백사진 · 102 악수 · 104 별빛 야행 · 106 만조 · 108 돌아보기 전 · 109 벌집 · 110 둥글게 둥글게 · 112 아이들의 시청률 · 114 원룸 · 116 나는 이제─10월 29일 이태원 · 118 해설 “쫓기는 사람들”을 향한 시적 교감(이성혁) · 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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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별이 불꽃을 낳는 소리
놀란 바다는 걸음을 뒤로 물린 채 밤이 이렇게 반짝여선 안 된다며 별들을 다그친다 능선 하나둘 지워지고 하얀 발들이 파도를 신었다 벗으며 건너오는 바다 모래 덮인 달빛 위에 나는 구두를 벗어 섬처럼 눕는다 새들은 어떻게 번지지 않고 저물까 파도 소리에 불을 붙이는, 이건 불빛을 털어내는 나만의 기술 하늘이 잘게 부서진다 해변이 검게 그을린다 ---「폭죽 1」중에서 그림자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왜가리 오리의 파문이 낳은 한 시인의 우거진 슬픔은 이제 이곳에 없다 막힌 곳 없이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 다리 밑에서 일본 청년들이 기타를 치고 멀리 누군가 놀다 버린 공이 떠내려오는 시대의 시치미 오리들이 날개 밑으로 얼굴을 숨기고 얕은 과거 속에 피 묻은 부리를 헹군다 백로가 날개를 펴자 출렁이는 강 전선에 묶인 남의 하늘을 털어내고 집으로 가고 싶은 것은 나인지 그인지 올려다본 내 눈동자에서 물비린내가 난다 ---「압천」중에서 눈이 내린다 떠나간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뭉치지 않는다 손을 들지 않아도 모든 길들은 이별하는 중 난 치워진 눈보다 오래 기다려야 한다 왜 이런 곳에 동백이 피었는지 모른다 겨울은 낳은 것마다 목마를 태우고 어린 새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누군가 그리운 사람은 창밖으로 몸을 내민다 팔짱을 풀고 하얀 간지럼을 타는 나무들 입김을 꺼내 분다 그러면 남은 얼굴들 여러 갈래로 흩날리고 쌓인 발자국 따라 별이 푹푹 뜬다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중에서 눈 내리는 새가 있어 그건 안으로만 쌓인 계절을 날지 꼭대기에서 발자국을 접어 날리는 영하(零下) 스케치북을 꺼내 눈에 그림자를 그려 넣었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제 그림자를 이고 가는 것 새의 꽁무니를 쫓아 수많은 창을 덧칠했지 쌓이는 것은 모두 염려였을까 하나였던 등에서 아이가 그림자를 이고 내려오네 새가 눈을 놓아두고 날아오르네 ---「눈 내리는 새」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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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향한 마음
여기까지 읽으면 박한 시인을 ‘자기’ 안에 갇힌 시인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소년의 기억’은 시인을 전혀 다르게도 규정한다. 역설적으로 ‘보문동 경험’이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사는 현실에 더욱 공감하게 했을 것이다. 먼저 등단작인 「순한 골목」을 보면, ‘소년의 기억’을 통해 세계가 긍정적으로 감각되고 있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박한 시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여기가 자신과 다름 없는 존재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세계임을 보여준다. 동시에 자신의 ‘소년의 기억’을 가만히 보듬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골목은 왜 이리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요 숨을 쉬는데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손가락 마디를 보면 내가 헤맸던 길목을 알 수 있죠 매일 걸어다녀도 달이 어느 창문에서 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골목은 지붕들이 기르는 것이라서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요 _「순한 골목」 부분 그런데 “자꾸만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 그린 동심원은 의외로 작지 않다. 시집 앞 부분에 배치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시도 그렇지만, 제일 마지막에 배치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시도 박한 시인이 가지고 있는 리얼리스트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박한 시인이 리얼리즘 시를 쓴다는 말이 아니라 골목을 “쓰다듬고 싶”어 하는 공동체를 향한 마음이 ‘소년의 기억’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사실 박한 시인의 ‘소년의 기억’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시의 화자가 그 참사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빈 배」에서 “네가 영원히 하선해버린/ 그 하루를 인양하기 위해/ 오늘도 집은 빈 배처럼 혼자 떠 있다”고 할 때나 「뒤집힌 꽃잎」의 “여긴 들어오지 마세요/ 어둠과 날숨들이 엉킨 이곳은/ 뒤집힌 꽃잎”이라는 진술은 화자가 참사의 한가운데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단지 특정한 시적 진술 때문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전해주는 시인의 정서와 감각에서 그것이 느껴진다. 피상적으로는 ‘소년의 기억’이 시를 낡아 보이게 하는 것 같지만, 이는 오늘날 구체적인 경험의 재현을 아무 근거 없이 폄훼하는 이상한 문화 때문에 그럴 뿐이다. 슬픔의 복판을 통과해온 주체의 정서는 어쩔 수 없이 시에 슬픔의 거품이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슬픔의 거품을 씻어내는 일 중에 타자의 슬픔에 공명하는 일만큼 건강한 게 없다. 박한 시인은 이 첫 시집을 통해 조금씩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 방향이 어디일지 단언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시인이 사는 지금-여기가 또 다른 슬픔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슬픔의 파도를 박한 시인이 과연 어떻게 지나갈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시는 슬픔을 피하지 않는 삶의 태도에서 피어난다는 것이 지금껏 밝혀진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이 진리를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시집을 읽는 일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시인의 말 그림자가 앞으로 지는 시간 불을 꺼도 유리에 비치는 증상은 낫질 않는다 거울 앞에서 화농 핀 얼굴로 다 쓴 연고를 힘주어 짜다 잎사귀 하나하나 붉은 이유를 알았다 내 얼굴도 이곳에선 공터였다 있는 악을 다 짜내며 사는 것들은 붉어지는 수밖에 부디 불길 마르지 않는 검은 기름이다 고갈되길 깊은 저녁, 바람이 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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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 시인이 골목길을 걸으면서 만난 이들은 주로 가난에 “쫓기는 사람들”이다. 역시 골목의 존재성을 형성시키는 그 사람들은 시인에게 시적 대상으로 나타난다. 시인이 시화(詩化)한 “쫓기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인가? 「깡통을 줍는 노인」에서 볼 수 있듯이, 깡통을 주워 파는 극빈자 노인과 같은 이들이다. “실눈을 뜨는 골목”에 나타나는, “네온사인처럼 빛나는 이름엔/ 관심이 없”는 노인. “젊은이들이야 쉽게 구겨지지 않아서/ 버려진 것들이 궁금하지 않겠지”라는 그의 말은, 노인이 깡통처럼 구겨진 삶을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자임을 암시한다. 그의 존재감은 “주둥이를 오므린 골목 끝으로” “연기처럼 흩어”질 정도로 미미하다. - 이성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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