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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4
1부 농사를 지어야겠어요·12 저마다의 바다·15 언덕에 올라·18 오름 가는 길·20 바다로 나간다·24 그런 날·26 숲속 발자국·28 부추꽃이 피었다·29 일요일 오전·32 잊히는 일·34 섬·36 마음 노크·38 바람·40 가을이라는 이름의 쓸쓸함·42 2부 바다가 호수 된 날·44 눈 쌓인 거리·46 산수국 1·48 밤바다·50 아침 관조·52 폭풍 치는 날·54 어느 목요일 오후·56 별이 내려앉는 날·58 추자도 다녀오는 길·60 안개·62 위미 바닷가·64 시골 살이·66 혼자인 섬·68 3부 저녁이 지나간다·70 초록 창에 앉아·71 인연·72 남해 바다·74 개울 소리·75 사람이 먼저다·76 생이별·77 아프다·78 겨울비·80 마음을 보내다·82 연가·85 시골 살이 3·86 그리움·88 관계·90 해돋이·92 4부 애기 무덤·94 공항·97 솔직함·98 비탈에서 자라다·99 미련이 들어간다·100 숲속을 걷다·102 시간은 기다리지 않는다·104 겨울산·106 사진·107 섶섬·108 산수국 2·110 겨울밤·112 곶자왈·113 산문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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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나간다
무너진 마음이 아니더라도 머물던 미련의 자리를 털기 위해 물결을 마주한다 파도, 그리움보다 분노에 익숙한 흔들림이다 어느새 고요의 순간을 담고 순백의 청순함을 입은 듯 반짝임을 안개처럼 내뿜는다 사람들은 카페에 눌러앉아 쉽게 그리움과 만나고 정체 모를 감성에 휩싸여 감정을 소비하는 사이 거칠게 널브러진 현무암을 지나 비로소 바다와 만난다 폭풍의 흔적에 물벼락을 맞거나 두려움에 보폭이 좁아져도 바다로 나가면 새로운 사람이 될 듯 옛 기억을 돌 틈에 흘리고 돌아간다 일렁이는 물결을 타고 수평선으로 향하는 작은 배를 보며 잔잔한 출렁임에 마음을 싣는다 바다로 나가는 날에는 수평선 너머 먼발치 잔물결과 하나가 된다 ---「바다로 나간다」중에서 가을빛이 잎새에 가린 오전 빠져나온 빛이 눈부신 왕관을 만들고 어두컴컴한 숲이 찬란한 하늘빛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나뭇잎들은 온통 투명해지고 돌과 풀이 새롭게 찬미의 대상이 된다 늘 그 자리에 있건만 놀라는 것은 언제나 방문자의 몫이다 계속 따라가면 이승 밖이 되려나 아직 가지 않은 무엇이 될까 조심스레 내디딘 몇 걸음 나무 사이로 난 여백에 발자국이 남고 접힌 풀잎을 이어 어느새 길이 된다 숲속에 작은 오솔길이 생겼다 ---「숲속 발자국」중에서 해넘이에 고개를 든 별들이 바다로 쏟아져 불야성을 이룬다 밤새 자체 발광으로 바다를 밝힌다 제멋대로 호롱불 안에서 시간을 태운다 어둠이 짙은 여운을 남기며 타들어 가고 있다 별이 바다로 내리는 날이면 기억의 힘은 자동으로 온몸을 울리고 추억은 제멋대로 반짝인다 악몽이 되는 밤보다 기다림으로 가득 찬 날들이 될 터 나로서는 기대 이상의 시간이다 별이 내린 짙은 어둠 속에서 밤새 불 밝힌 밤바다가 조용히 재잘거린다 ‘잃어버린 이름을 기억해내느라 애쓰지 마라 살아 있으면 된 거지 나 잘 있어’ 기억되는 일은 시간을 관여치 않는 법 시간의 씨줄과 날줄의 엮임 없이 조금씩 현실로 들어온다 ‘잘 지내는구나, 그때처럼’ 별이 바다에 내려앉으면 나는 늘 누군가의 안부를 듣는다 ---「별이 내려앉는 날」중에서 혼자 마시는 술은 외롭다 외로워서 혼자 마시는 것일까 혼자 마시니까 외로운 것일까 잠이 안 오니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니 잠이 안 오는 것일 수도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아도 오늘도 섬에 있고 그래서 서성인다 혼자서 마시니까 친구가 없고 친구가 없어 혼자 마신다 잠들지 않는 섬, 사람들은 외로움을 타고난 것일까 외로워서 이곳에 오기에 더 외로워진다 ---「혼자인 섬」중에서 머리맡 창가에 달이 차올랐다 보름이 됐음을 알린다 환한 빛을 내는 건 달인데 생각나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밤바람 맞으며 산책 나선 밤 부는 바람이 가슴에 닿아 말소리로 전해진다 사람이 먼저인 것을 자연이 알려주고 있는데 무심한 하늘만 바라보며 괜찮은 척한다 사람이 먼저다 사랑이 우선이다 ---「사람이 먼저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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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
인간이 생긴 대로 하나씩 적어나가니 시집이 된다.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어서 좋다. 비록 그 삶이 여전히 이곳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지만 도시에서 꺼내보지 못한 속마음을 꺼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삶이 조금씩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시는 이제 삶의 한 부분을 떼어내어 색다른 기억의 언어로 저장하는 클라우드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다음은 서사를 이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터전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바다와 산과 오름과 숲이 있으니 가능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법하다. 맑고 견고한 서정시 이재근 시인은 자신의 시와 독자들 사이에 높거나 가파른 문턱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만난 사물이나 갖고 있는 서정에 솔직하고 담백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정서의 동화 작용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근의 시는 시인의 특수한 상황과 인식을 강요하거나 외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혼자만의 읊조림처럼 가만히 말할 뿐인데, 그것이 잔잔함이 독자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조심스레 내디딘 몇 걸음 나무 사이로 난 여백에 발자국이 남고 접힌 풀잎을 이어 어느새 길이 된다 숲속에 작은 오솔길이 생겼다 _「숲속 발자국」 부분 어디 한 군데 어렵거나 혹은 복잡한 상징을 갖지 않으면서도 맑은 서정시가 된다.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옮겨 놓아서 그렇다. 경험이 곧바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고 경험을 시적으로 할 때만이 시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뭐니 뭐니 해도 마지막 행인 “숲속에 작은 오솔길이 생겼다‘는 평범한 진술은 희한하게 이 시를 번쩍 들어 올린다. 시는 멋진 수사나 은유, 혹은 깨달음의 언어로 장식되어 한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이 자신에게 정직할 때 시의 샘물이 고인다는 게 우리들이 망각하고 있는 진리이다. 이재근 시인의 시가 갖는 평이함은 이 진리를 독자들에게 새삼 일깨워준다. 시인이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그만큼 큰 미덕이다. 이재근 시인이 자신의 서정에 충실하면서 심리적 고독이나 삶의 비의에 대해 말할 때에도 목소리는 언제나 낮다. 그런데 이 낮은 목소리가 단지 저음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맑음으로 울리는 것은 자신의 고독이나 살면서 깨달은 삶의 비의에 대해서도 정직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의 시가 그렇다. 칠 테면 쳐보라지 세상에 맞서는 힘으로 얼굴을 내밀다 총알처럼 박히는 모래 알갱이에 슬쩍 차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는 거친 숨을 쉰다 숨의 바닥이 느껴질 만큼 비바람은 방향 없이 들이치고 멋쩍은 우산대만 하늘을 향해 펼쳐 들고 나면 그제야 마음이 빼꼼 문을 연다 거친 물보라에 평안함이 흔들리는 순간 그래 세상이 원래 그랬다 어찌 관망만 하며 살 수 있겠는가 문 열고 폭풍우를 흠뻑 맞아 보련다 _「폭풍 치는 날」 부분 “칠 테면 쳐보라지” 같은 강단 있는 독백도 전혀 강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앞에서 말한 정직과 겸손 때문이다. 물론 이 정직과 겸손이 언어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배를 띄우는 바닷물의 부력처럼 언어화되지 않은 심층에 존재하면서 언어의 갈라진 틈으로만 비친다. 하지만 “문 열고 폭풍우를 흠뻑 맞아 보련다” 같은 진술에서는 삶을 향한 어떤 의지도 보이거니와 이 의지도 바깥으로 향해 대상과 사물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다지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결국 끊임 없는 자신에 대한 직시가 이재근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맑고 견고한 서정시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런데 미래의 시가 더 궁금해지는 것은, 시집 뒤에 수록된 시인의 산문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은 “어쩌면 다음은 서사를 이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바로 밝히고 있다. “터전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바다와 산과 오름과 숲이 있으니 가능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법하다.” 삶의 터전을 제주도로 옮기고 나서 “몸이 열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는 이렇게 삶을 바꾸는 이행의 과정에서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그때 쯤에는 아마 훨씬 깊어진 시를 독자들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번 시집은 그 ’깊이‘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 시집을 내는 일은 영혼의 조각을 모으는 일이다. 매 순간 바뀌는 감정을 모아 깊이를 평준화시켜 세상에 대한 나의 시선을 내보인다. 두서없이 쏟아내던 단어를 모아 보니 무딘 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칼을 연마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낸다. 타인의 시선이 두렵지만 오래 기다려온 만큼 피하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모자란 구석과 어색한 문구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한다. 힘을 내기로 했다. 이번 시집에는 나름 말랑한 글귀들을 모았다. 시간에 때가 타다 보니 물러터져 그런가 보다. 지혜의 샘이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가고 얼마 안 남은 감정선을 붙잡으려 애쓴다. 늦었지만 첫 모음집을 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신선함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시작의 끝이 되는 일이지만 ‘그래 가보자’라고 스스로 되뇐다. 엮어 낼 수 있는 기회가 닿아서 기다려진다. 내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과 풍경과 자연이 있어서 너무나 큰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위로를 위한 수도꼭지를 틀어놓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주변 사람과 자연이 너무 고맙다. 만나는 사람, 방문하는 곳마다 인사를 해야겠다. 2023년 가을, 이재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