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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선 것들은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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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창시선

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5

1부

흙밥 / 12
품다 / 13
상추잠 / 14
크고 넓은 그림자 / 15
손 / 16
정남 아주머니 / 18
사람의 소리 / 20
흙꽃 / 21
흙의 시간 / 22
고수 / 23
분달이네 / 24
꾹꾹 / 25
어머니의 텃밭 / 26
능소화 / 27

2부

밥상 / 30
평두둑 / 31
스스로 선 것들은 푸르다 / 32
나물값은 되게 / 34
부러진 쇠갈퀴 자루를 다듬었다 / 35
약속 / 36
움트다 / 37
입춘(立春) / 38
자루를 만들며 / 40
뿌리를 뻗다 / 42
늦바람 / 43
오지다 / 44
똥고집 / 45
기도 / 46
장마 / 47

3부

길고양이로부터 / 50
백봉이 / 52
달걀 열 개 / 53
풀 / 54
저항 / 55
흙에서 / 56
풀의 외침 / 58
착각 / 59
한 삽의 무게 / 60
푸른 가을 / 61
들깨밭을 비우고 / 62
손이 무섭다 / 63
귀신 / 64
논 / 66

4부

마음이 오가는 길 / 70
겨울꽃 / 71
편지 / 72
도시 씀바귀 / 74
단양쑥부쟁이 / 75
초록 봉숭아 이야기 / 78
봄이 오는 길 / 80
세월에게 / 82
아내의 손 / 84
아내 발 시리지 않게 / 85
어머니 / 86
냉잇국 / 87
버들피리 / 88

해설
잘 빚어진 흙의 언어(문종필) / 91

저자 소개 1

1973년 충북 제천에서 났으며 현재 ‘해방글터’ 동인이다. 남원 지리산 자락에서 농사를 지으며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생활하고 있다. 2019년 『사람의 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해방글터 동인지 『우리의 시가 무기가 될 수 있을까』(푸른사상, 2020), 『살아보고 싶은 날의 하늘은 무슨 색일까』(삶창, 2024) 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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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3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28*205*20mm
ISBN13
9788966551996

책 속으로

마당가에 꼬들꼬들 말라가는 고사리를 봐
젊었을 적부터 저것 꺾어 팔아
오남매를 키웠잖여
흙이 내어 준 것이여
쩌— 아래 다랭이논에 시퍼런 벼 보이지?
나는 모를 낸 것밖에 없는디
흙이 저렇게 키웠잖여
애호박도 가지도 고추도……
근디 나는,
흙에게 줄 것이 읍써
가진 건 몸뚱아리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줘야제
늙고 꼬부라져 맛이나 있을랑가 모르겄네
나중에
숨넘어가면
흙밥이나 되야제
--- 「흙밥 전문」 중에서

새벽부터 쪼그려 앉아 상추 딴 만호 형은
엄지와 검지 끝마디 새까맣고
목에 수건 하나 두르고 허리 숙여 논 맨 대중이 형은
갈라진 손끝마다 흙심줄 박혔고
하루 종일 마늘밭에 붙어 있던 재운이 형은
장도리 닮은 손가락 끝이 황톳빛이고

만호 형 손 닿은 잔에서는
상추 냄새가
대중이 형 손 닿은 잔에서는
논흙 냄새가
재운이 형 손 닿은 잔에서는
마늘 냄새가

흙 묻은 손이 따라 준 소주 석 잔에
기분 좋게 취한 저녁 까딱까딱
서산으로 넘어가고
내 손도 저런 손이 되어야 쓰겄다
꿀꺽꿀꺽 마음 삼키고
--- 「손 전문」 중에서

땅에 사는 것들은

뿌리를 내린다

뿌리가 얕으면

줄기가 낮고

뿌리가 깊으면

줄기도 높다

뿌리가 가늘고 부드러우면

바닥을 긴다

낮아도 푸르고

높아도 푸르며

휘어져도 푸르고 기어도 푸르다

땅에 사는 것들은

스스로 선 것들이다
--- 「스스로 선 것들은 푸르다 전문」 중에서

죽은 노간주나무 하나 잘라
자루 세 개 만들었다

괭이 두 개
쇠스랑 한 개
새 삶을 얻고

나는
곁을 지킬
벗 셋을 얻었다

내 손이 닿은 자루는
반질반질
단단해질 것이고

자루를 쥔 내 손에는
노간주 냄새 날 거다

삶은
서로의 모습을
새기는 일이다
--- 「자루를 만들며 전문」 중에서

엄나무 순 얻어먹고
건넨 달걀 열 개

트랙터 모는 법 배우고
건넨 달걀 열 개

아랫동네 아기 먹이라
건넨 달걀 열 개

바꿔 먹고
나눠 먹고
같이 먹는

달걀 열 개
--- 「달걀 열 개 전문」 중에서

느릿느릿
거름 지게 타고 밭에 올라
늙은 농부 손에
휘이 뿌려진

손바닥만 한


매화나무 곁에서
햇살 잡아 앉히고
쿰쿰한 이야기
사나흘

궁금했던가

꽃다지도
매화도
부스스 눈뜬다

기계가 올 수 없는
비탈밭에서

---「봄이 오는 길 전문」중에서

출판사 리뷰

낮은 곳으로의 뿌리내림

순환하는 존재의 진리는 어떻게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숨은 동력이다. 그것을 자본주의 근대가 은폐하고 억누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진리는 그 틈새를 통해 어떻게든 드러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채서 받아 적는 존재가 시인인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면 이규동 시인이 꿈꾸는 세계가 무엇인지 헤아려진다.

니 땅 내 땅 경계 없이
넉넉한 밥상을 나누던
잠자리, 물방개, 미꾸라지, 장구애비
_「논」 부분

삶은
허공에 피우는 게 아니라
낮은 곳으로의 뿌리내림
_「초록 봉숭아 이야기」 부분

「논」이 말하는 것은 경계 없는 세계다. 오늘날 ‘경계’는 단순한 구분선 혹은 한계선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새 타자에 대한 배제, 조작, 버림 등의 프로세스로 경화(硬化)되었다. 이규동 시인이 “논”을 통해서 품게 된 세계는 이런 경계 없는 세계다. 시인에게 “논”은 단지 농사를 짓는 공간만이 아니라 여러 생명들이 어우러져 삶을 꾸리는 경계 없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그 모든 생(生)의/ 논”. 그런데 이런 관점 혹은 삶의 태도(관점 자체가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지만)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초록 봉숭아 이야기」는 “비탈길 콘크리트 틈에 싹튼/ 작은 봉숭아”에 대한 관찰기 성격의 작품이다. 그 봉숭아가 서리가 내린 후 이파리를 다 떨구고 줄기로만 남은 것을 보고 시인은 “삶은/ 허공에 피우는 게 아니라/ 낮은 곳으로의 뿌리내림”이라는 것이라고 낮게 읊조린다. 사실 이런 의인화는 시에서 흔한 비유 방식이다. 낯익은 의인화를 넘어서는 것은 거기에 담긴 시인의 태도 혹은 세계관인데, “낮은 곳으로의 뿌리내림”이 진정성 있는 울림을 주는 것은 시인이 꿈꾸는 경계 없는 세계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시집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배경음이 사실 “낮은 곳으로의 뿌리내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을 시인은 ‘땅’과 ‘흙’에서 배우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마음이 소박하고, 담백하고, 꾸밈이 없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드러남이다. 마음이 그러하니 언어도 말할 수 없이 투명하다. 미세먼지처럼 희뿌연 의미를 갖는 도시의 시들과 이규동 시인의 시는 여기서 갈라진다.

시인의 말

흙에 쪼그려 앉아
흙과
흙에 뿌리내린 생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쓰기하듯 적다

추천평

살면서 더러 시집을 읽었으나 이리 깨끗하고 고운 글을 만나 행복합니다. 노동자 선전일꾼으로 살면서 이오덕 선생님이 평생 실천해오신 우리말 바로 쓰기에 길들여진 내게 거슬림 없는 글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군더더기 없고 꾸미지 않으면서 가슴을 울리는 힘은, 일하는 사람의 경험에서 빚어낼 수 있는 솔직함이 바탕을 이루고 있어서겠지요. 땅에 사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 이규동의 따뜻한 마음이 이쁘고 고맙습니다. 나는 얼치기 농사꾼이지만 그래도 때맞춰 심어 가꾸고 거두는 그 일상이 얼마나 고된지 알기에 이규동이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기록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허투루 읽히지 않습니다. - 이재관 (곡성 사는 농사꾼, 적당기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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