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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5
1부 그의, 행장·15 경건한 날의 오후·16 발산하는, 순간·18 어느 현재주의자의 기록·20 어느 의고주의자의 아침·22 신은 피조물로부터 무한히 떨어져 있다·24 죽음에 대한 내 취향을 의지의 신격화인 죽음에의 바람으로 대체하는·26 고독에 대하여·28 둥근, 공놀이·30 신은 가능태를 사유하지 않는다·32 영혼이란·34 또한 언제나 반복되므로·35 2부 커트 쉴링은 그랬다·39 저 두 손·40 라고 말할 수 없다·42 그러께, 그러께·44 이 침묵의 순간을·46 간절기의 아침·48 초월성이 내재적인 것 안에 있다는·50 풍요로움과 만나는 매우 작은 독방·52 노을공원에서·54 타샤 튜더·56 우글거리는·58 너무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우주·60 3부 도성·65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66 웃는 것이다·68 봉우리를 밀어 올리는 물결 혹은 구부러진 시간·70 기울어진 시간·72 말할 수 없는·74 이 세상에서의 자신을 미워하였다·76 기원에 대하여·78 노구소 가는 길·80 화포식당·82 성탄절, 다음·84 4부 환영들이 구도를 에워싸는 밤·89 모든 소리의 바깥에·90 공포는, 뒤섞인·92 관점 혹은 관점주의·94 겹겹이 쟁여진 시간 속으로·96 인칭은 언제나·97 무한히 고상한 것은 무한히 더 완벽하며·98 언제나 알지·100 그리고, 역설이·102 수색역, 또한·104 어느 트럼페터의 시론·106 비밀의 형식·108 해설 | 임지훈(문학평론가) 의고주의자의 슬픔과 의지 |
김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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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다른 오늘을
버스와 버스를 탄 사람이 달려가는 오늘을 열차와 열차를 탄 사람이 달려가는 오늘을 오늘과 다른 내일을 허공의 절벽 혹은 높은 거대한 흐르는 기둥 같은 곳에 서 그는 여기저기 구멍 뚫린 곧 무너질 것 같은 큰 평상 두 개를 가리키며, 또 무슨 고기를 분주하게 구우며 “이 걸로 장사하면 금방 일어설 것”이라며 호탕하게 웃는 것 이었다. 서로를 품으며 모든 것을 품는 언제나 같은, 오늘 언제나 같은 행장(行狀) ---「그의, 행장」중에서 희생이라고 말하지 말자 장맛비 지난 뒤 지렁이의 메마른 사체를 지열의 기울기대로 굳은 곡선을 자살이라고 말하지 말자 흡혈욕에 이끌린 모기의 짓눌린 찢어진 육신을 한 분노한 인간의 살의의 현실화를 제의라고 말하지 말자 포유동물의 향(香)을 좇는 진드기의 필사적인 운동을 그 장엄한 추락의 형식을, 반복을 ---「또한 언제나 반복되므로」중에서 돈도리는 된섬으로 북적거리는 돼지촌 돼지를 먹은 돼지와 돼지를 버린 돼지가 끼리끼리 위로하며 한 길로 또각또각 울다가 웃다가 뛰고 달리며 사랑을 좇다가 삼십 년 동안 돼지는 죽지도 않고 꽥꽥거리며 꿀꿀거리며 소보다 싸고 소보다 작으며 소보다 빨리 자라고 된섬은 돼지들의 천국으로 꿀꿀거리는 돼지 소굴로 돼지는 돼지를 위하여 울고 돼지는 돼지를 위하여 죽고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중에서 너를 부르기 위하여 너에게 묻는 밤 너는 무엇이 아니라 너는 어디가 아니라 너는 어떤 술어냐고 질문하는, 너를 부르기 위하여 네가 포함한 모든 어떤을 상상하는 밤 너의 환영들 너는 언제나 우발적이고 너의 내부에 너를 망각한 너의 환영들 무차별적인 외부적 산란 속으로 뒤집히는 혼돈 속으로 사건 속으로 폭력 속으로 네가 쌓은 의미들 표면들 망각들 너는 안개 속에서 안개의 입자들 사이로 스며드는 밤으로 모든 어떤들이 너를 관통하는 순간들 속으로 사라지는 너는, 누구냐, 텅 빈 ---「환영들이 구도를 애워싸는 밤」중에서 가령 이 세계가 우글거리는 이념들과 번쩍이는 어두운 전조들과 강도들과 문제들과 차이들의 무한한 일의성이 라면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고 외친 김수영이라거나, 분노와 원한과 저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빨아올리고 뿜어대는 충만한 신체라면 부글부글 이글거리는 분화구거나 태풍이거나 그 눈동자거나 규정될 수 없는 규정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는 열정과 절망과 환희와 운명의 극한이라면 인칭은 언제나 펄펄 끓는 뜨거운 핏줄을 퉁기며, 그 박동과 함께 영혼과 함께 뛰어다니며 솟구치며 욕망하는 기계의 욕망하는 생산을 욕망할 수 있다면 ---「인칭은 언제나」중에서 |
의고주의자의 슬픔과 의지가 담긴 시적 공간들
“왜 세상은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으면서 한없이 접혀들어 그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야 마는가.” 김재홍 시인은 그와 같은 질문을 차마 놓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현실이 그토록 부드럽고 매끈한 것이 아님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는 자이다. 세상의 표면이 부드럽고 매끈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눈이 흐려진 것일 따름임을 알고 있는 자이다. 그와 같은 자에게는 눈앞에 놓인 현상의 표면을 관통할 수 있는 시력(詩力)이 있으며, 동시에 그 시력으로 인해 차마 다 떠안을 수 없는 슬픔마저도 감각하고 감내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통해 축적된 내력 또한 존재한다. 그의 시가 단순한 현상에서부터 시작하되, 그 속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피치 못할 슬픔에 골몰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재홍 시인의 시적인 '눈'은 그래서 가장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개별자들의 삶을 향하고 있다. 개별적인 삶 안에는 그에 준하는 충만한 의미들의 세계가 또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자와 아는 자에게, 이 충만한 의미의 세계는 다른 정도의 굴절률을 가진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만 한다. 김재홍의 시적 세계 속 화자의 언어로부터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연민, 다정함에 가깝다. 즉, 이 부정적 편린이 암시하는 것은 시적 화자의 회의주의적 성격과 같은 주체의 특수한 인격적 정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 세계 자체가 회의주의적 창조주에 의해 직조되어 있는 것이므로, 회의주의적 진술은 그의 시선이 정직하고 투명하게 작동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비극적인 사태는 처음부터 이 세계의 안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며, 시인은 그것을 정직하게 관찰하고 이를 언어를 통해 재현하며 활로를 모색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평생을 막일로 자식 셋 키워낸 어머니는 이제 늙어 쭈글쭈글한 육신에 그 영혼에 무수한 빗금이 칼날처럼 새겨져 라고 말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는 말이 아니라 언어 이전에 언표 바깥에서 평생을 막일로 어떤 잠재성도 가능성도 어떤 특이점도 변곡점도 없는 외삽의 필생을 사셨다 어머니의 연속성과 어머니의 항상성과 어머니의 필연성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리하여 운명이란 누가 시켜서 사는 게 아니라 버티며 살아내는 것이라는 표식을 온몸에 온 마음에 새겨놓았다 라고 말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 「라고 말할 수 없다」 전문(본문 42~43쪽) 위의 시에서 화자는 무수한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늙은 어머니의 육신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화자는 노모의 육신에 새겨진 삶의 비애를 바라보면서도, 그것에 대해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소의 혼란을 느끼고 있다. “라고 말하면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감각은 어머니의 삶에 대해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시인의 날카롭고도 고고(孤高)한 정신을 보여주는데, 이와 같은 고고한 통각이 가닿는 것은 어머니의 삶에 새겨진 상처란 결코 쉬이 말해질 수 없는 복잡성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다는 것은 결코 손쉽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삶이 내내 평안하고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아는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의 삶에 대한 기술이란 그것을 쓰고 취소하는 형식을 통해서만 에둘러 말해질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취소의 형식은 대상에 대한 온전한 기술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보편적 언어의 한계를 가리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와 같은 실패만이 대상의 본질을 실루엣으로나마 현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성공이다. 이것은 세세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가능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진실을 건 언어이다. 언어의 실패를 통해 성공을 거머쥐는 역설적인 묘사와 재현의 과정, 그로부터 비롯되는 의미화의 심층은 김재홍의 시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아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대상의 범위는 결코 사물 자체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관념과 개념과 같은 비실체적인 요소에까지 확장된다. 「기원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화자는 ‘나’의 기원이라는 불분명한 대상에 대해 물으며, 종래에는 ‘기원’이라는 것의 의미와 그것의 가치에 대해서까지 재정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엿봄으로써 자신이 걸어갈 길을 새로이 도정하는 언어적 활로를 모색한다. 기원을 묻는다면 바이칼이거나 부리야트거나 어떤 동종 교배와 족내혼의 기원을 묻는다면 미토콘드리아와 핵을 넘어 세포 넘어 분자 넘어 기원을 찾는다면 차라리 폐호흡과 횡격막과 언어의 기원을 찾는다면 아니면 툰드라와 스텝과 열대우림 너머 냉혈의 대기권과 화성과 목성 너머 태양계와 은하계 너머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를 알지 못하는 그러므로 기원은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도 있을 필요가 없는 어떤 기원을 믿는다면 차라리 기원의 전체주의를 믿음의 전제적 폭력을 고발하기 위하여 이겨내기 위하여 넘어서기 위하여 - 「기원에 대하여」 전문(본문 78~79쪽) 자신의 기원에 대하여 묻는 이 시에서, 처음에 화자는 신화적 세계로부터 그 해답을 탐문한다. 우리와 닮은 외모를 지닌, 바이칼 호의 광대한 자연 속에서 신을 믿으며 살아가는 부리야트 족의 모습에서 시작되는 ‘기원’에 대한 물음은 이내 인류학적 관점과 생물학적 관점을 거쳐 무수한 자연의 틈 속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툰드라와 열대우림에서도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화자의 눈은 이내 대기권 너머로, 생명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어디에서도 화자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현상의 내부로부터 찾아질 수 없는 근원에 대한 질문이 이처럼 인식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먼 옛날부터 인간은 해명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그것을 신의 의지로, 우리가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고차원의 질서가 작동하는 것이리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김재홍의 시적 화자가 내놓은 답변은 정반대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상은 저기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의지일 것이라는 유신론적 답변 대신에, 그는 ‘기원’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가닿는다. 예컨대 이와 같은 지점에서, ‘기원’에 대한 물음은 ‘기원’ 그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새롭게 도정되는 것이다. 역사적 사례 속에서 기원에 대한 물음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되어 왔음을 떠올려보자면 이와 같은 물음의 만곡은 자신의 정당성을 타자를 향해 입증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정당성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주체적 태도에 가깝다. 또한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가해진 무수히 많은 역사적 폭력의 사례를 떠올려보자면, 이와 같은 주체적 사유는 타자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폭력의 역사 그 자체에 대한 폭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규범적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에는 또 하나의 변곡점이 존재하는 셈인데, 시인은 ‘기원’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또 다른 질문으로 계속적인 시적 사유를 노정해나감으로써 역사 속에 내재된 인간의 한계 자체에 대해 질문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그 자체의 역사로부터 탐문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것이 김재홍이라는 시인이 주창하는 ‘의고주의자’의 의지가 아닐까. 사전적 의미에서 그것은 옛것을 숭상하고 흠모하는, 그리하여 모방하고 재현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김재홍의 시에서 나타나는 의고주의자의 의지란 그 사정이 한결 복잡하면서도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창조적 지점을 소유한다. 이는 ‘기원’에 대해 사유하며, 그것을 재발명해내는 「기원에 대하여」의 화자에게서 엿볼 수 있는 의지이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그의 시에서 일어나는 특유의 ‘발산’과도 관련되는 지점이다. 대상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 의고주의자의 사유 방식이란 대상의 실패를 다시금 반복하는 것이되, 그와 같은 실패를 더 잘 반복하려는 의지에 가깝다. 때문에 「어느 의고주의자의 아침」에서처럼, 그는 옛 미래를 바라보되, 그 시선은 과거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뻗어 있다. 이와 같은 시선은 대상에 내재된 실패를 동일하게 반복하게끔 만들지만, 이와 같은 반복이 거듭될 때 여기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발생한다. 일종의 “클리나멘 혹은 편위”(「어느 현재주의자의 기록」)라 불리우는 현상으로, 동일한 대상에 존재하는 최소한의 차이이다. 다만 그것은 너무나도 작고 미세하여 한눈에 식별될 수 없는 것이기에, 시인은 일상 속에서 그와 같은 실패를 거듭 반복하며 이 미세한 편위의 상황을 거듭 써나가며 편위의 역사를 새롭게 구성해나가고자 시도한다. 시인은 부인하지 않는 거라며 인정하라고 받아들이라고 무엇보다 화내지 말라고 꿈꾸는 꿈은 오지 않고 꿈의 뜻대로 온다고 꿈은 하루치일 뿐이라고 불현듯 비명을 지르거나 소리치거나 입추 지난 아침은 아직 더운데 자다 깨다 뒤척이다 늦잠에 들고 - 「간절기의 아침」 부분(본문 48~49쪽) 김재홍의 시에서 슬픔은 단일하지 않다. 그것은 두 개의 결로 나뉘어져 있으며, 특정한 대상에 대한 감각이면서 동시에 그와 같은 감각조차 현실 속에서 마모되고 말 것이라는 필연성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재홍의 시가 거듭 슬픔을 앓고 그것을 다시금 앓는 것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은 현상이다. 현실로의 몰입을 통한 망각과 마모가 하나의 질서로 작동하는 세계 속에서 이와 같이 반복되는 슬픔에 대한 되새김질은 쉽게 마모되거나 망각하지 않겠다는 의고주의적 의지의 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정한 누군가를, 특정한 시간을, 특정한 공간을 거듭 언어화하여 되새김질하는 것은 감정의 통증을 대가로 하여 벌어지는 법칙에 대한 도전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 안에 상실한 대상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에서 단순히는 대상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인 것이며, 보다 확장된 의미에서는 ‘인용’이라는 그의 시적 방법론이 지닌 의미이기도 하다. 즉, 인용은 본래의 사건/혹은 단언이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 가능성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이되, 지금-여기의 이미지들을 통해 다시금 실패하는 방식이며, 사라져가는 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현실의 중력에 저항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실패한다 하여도 개의치 않는 것은, 실패의 반복 속에서 어떤 편위들이 거듭 누적되어 갈 것임을 김재홍이라는 의고주의자는 알고 있으며, 또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반복되는 것은 ‘실패’이면서, 결코 동일한 실패의 반복이 아니다. 더 잘 실패하는 것, 그와 같은 실패 속에서 거듭 편위를 축적해가는 것, 그리하여 어떤 한 시점까지 이어지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 예컨대 이와 같은 실패는 그의 의지가 현실화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한낱 실패가 아닌, 고고한 실패인 것이다. 허공을 향한 저 맹목적인 눈 벌어진 입 열린 몸으로 빈틈없이 스며드는 솟구치는 숨소리 극점을 향해 타오르는 목젖 끝에는 침묵이 어떤 정물과 평화와 심연이 유기적 연쇄를 끊은 출렁거리는 외로운 세포들의 적막의 한순간이 쏟아지는 사악한 반성의 한순간이 슬픔보다 빨리 슬픔보다 차갑게 슬픔보다 날카롭게 몰아치는 휘몰아치는 순간의 순간 시공의 굴절은 찢어진 분절은 휘어진 범주는 관점을 통곡을 발산하는 순간 - 「발산하는, 순간」 전문(본문 16~17쪽) 비록 그 순간이 언제인가를 유한자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여도,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 슬픔이 아니다. 또한, 실패가 반복된다 한들, 그 또한 시인에게는 슬픔이 아니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슬픔의 형상이 거듭 다른 결로 분화되며 누적되어 가는 것은 외려 새로운 편위의 발생이며, 그것은 언제고 이뤄질 「발산하는, 순간」에 대한 보증이다. 이 의고주의자로서의 시인의 모습이 한낱 노스텔지어적인 욕망이나 고전에 대한 동경으로 환원될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의 순순한 흐름에 있어 이와 같은 의지는 일탈이 아닌 발산을, 그리하여 새로운 규범적 질서의 정초를 예비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무한하지만 유한한 경로로 흐르는 시간은 그와 같은 태도로부터 단절되고, 굴절되고, 휘어지고, 찢어지며, 새로운 경로를 물색한다. 시인이 말하는, 슬픔으로부터 연유하는 “통곡”이 단순한 정서적 표현이 아닌 낯설고도 기이한 가능성을 지닌 어휘로 식별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이 그토록 상실에 천착하고, 슬픔을 거듭 앓고, 그러면서도 결코 파도가 넘실거리는 어두운 바다 속으로 자신의 몸을 내맡기지 않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가 다시금 일어나 슬퍼하고, 다시금 상실을 앓으며, 기어코 다시금 실패하는 것은 그것이 망각에 저항하는 일이기 때문에, 감정의 휘발을 위한 지리한 눈물이 아닌 통곡을 위한 예비적 제스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의지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슬픔을 다시금 읽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며, 우리가 그의 슬픔의 순간들에 눈을 뜨고 바라보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슬픔과 괴로움은 죄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세계의 모순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감정의 대가인 것이다. 그 감정들이 언어로 재현되고, 재현 속에서 편위가 축적되어 나갈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비극적인 역사가 아니라, 결코 망각하지 않겠다는, 유한자의 한정된 시간보다 앞서 활로를 발견하겠다는 시적 의지인 것이다. 김재홍 시인은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에서 실패 너머에 있는 우리 모두의 ‘돼지촌’을 시 속에서 되살려내고,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잠시 발을 헛디뎌 넘어진 독자들의 손을 따뜻하게 쥐어 자신의 돼지촌으로 인도한다. 독자들은 시인의 오래된 익숙함으로 이뤄진 그 공간에서 고향의 온기를 느끼며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