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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차례 1부 복종하는 검은 양 감나무 밑에 탯줄 묻듯 검은 양 고자질하는 그림자 빈집 그림자 없는 새 체리 향기 싸워서 진 개 유년의 그늘 열두 살 인생 추석이라도 쇠고 봄날의 폐가 오렌지 어둠은 어둠끼리 늙은 여자 거지 꽃 그림자 그림자가 머무는 숲 2부 낯꽃 펴고 살라 하셨건만 신께서 날 미워하시면 어쩌나 다음 생에는 나무가 되고 싶다 버리고 간다 꽃 지면 여름 한낮 △△나무 서곡 머리 없는 마애불을 찾아서 새가 머리를 쓸 때마다 나, 숲속에서 한 생애가 다시 시작된다 풀 새로 생긴 무덤 사라짐에 대하여 12시간 동안 많은 꽃이 다녀갔다 3부 화성의 붉은 말을 버리고 추억역 새장의 새 언제나 먼지 S로 시작하는 것들이 가진 슬픔 몇 가지 1 Sunset S로 시작하는 것들이 가진 슬픔 몇 가지 2 Sunrise 세 자매 건져 올린 속눈썹 어찌해서 나무 반 그루 단풍 늦가을, 충렬사 색소를 마시다 적은 멀리 있지 않다 싱거운 바람 밤에 꿈꾸는 실종 폭풍 속으로 4부 바다에 동백 떠 가듯 십일월 훗날에 필 동백 동백의 계절 푸른 꽃 너는 반짝이는 아나콘다 거울은 알고 있다 갈매기 눈발 밤바다의 안내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작나무 가계도 소녀의 꿈은 빨강 갱생원 시 다시, 봄 저 집 해설 생명에 대한 깊은 슬픔, 생존에 대한 깊은 아픔 | 이승하(시인 · 중앙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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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때문이었다
엄마 심부름으로 정육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산을 깎고 있었다 바리깡 한 줄 쓱 지나간 듯한 흙길에서 하늘을 보았다 선짓덩이 같은 노을 때문이었다 엄마가 죽는구나 엄마가 나보다 먼저 죽는구나 엄마 없는 세상을 어찌 사나 선양동 말랭이에서 노루지에 싼 고기 들고 목놓아 울던 흙먼지 날리던 여름 저녁 엄마가 김치찌개 끓이려고 이 고기 기다리실 텐데 저물도록 어디서 뭐하다 이제사 왔냐며 할망빠진년이라고 혼낼 텐데 걱정하면서도 엉엉 엄마 심부름으로 명산동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갈고리에 걸린 살덩이에서 고기 쓱 끊을 때 보았던 고무 양동이에 가득한 선지 핏덩이 푸딩이었다 마음이 멀미한 듯 심하게 울렁거리던 열두 살 인생이었다 ---「열두 살 인생」중에서 산비탈에 모여 있는 무덤을 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청하 초등학교 이학년 때 내 짝꿍은 정미소에서 멀지 않은 공동묘지 기슭 기와집에서 일본 여자와 함께 살았다 어디서 주워온 아이라고도 하고 일본 여자가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아이라고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봄 소풍 가을 운동회 때면 으레 학교에 오지 않았던 눈이 토끼 눈처럼 빨갛고 말 더듬던 아이 공동묘지 낡은 기와집 앞을 지날 때면 뼈를 고는 냄새가 진동하고…… 동네까지 들려오는 소문들은 무성했다 일본 여자가 키우는 아이들은 가끔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들로 바뀐다고도 했다 또 일본 여자는 무덤에 묻힌 송장을 잘라다 약도 만들고 먹기도 한다고 했다 동네 아이들은 보리밭에 숨은 문둥이보다 일본 여자를 더 무서워했다 얼굴은 본 적 없는 그녀 소식을 지난봄 고향 가서 들었다 한밤 전날 묻힌 시체 다리 한쪽을 무덤에서 잘라 오다 들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출소에 붙잡혀간 일본 여자는 며칠 만에 곧 풀려났다고 했다 그녀가 준 약으로 살아난 불치병 환자들이 서에 진정서를 냈다고 했다 내 유년의 그늘진 곳에 늘 서 있는 일본 여자 그녀가 키우던 내 짝꿍은 어딜 갔을까요? ---「유년의 그늘」중에서 그림자가 내게 악수를 청하는 순간! 아마 나는 죽어 누워 있겠지 나는 내 안에 숨은 그림자 손을 어떻게 오려낼 수 있을까? 눈빛 꺼지고 눈꺼풀도 셔터가 내려져 있을 텐데…… 그때면 그림자가 기거하던 피 웅덩이는 바짝 말라 있겠지 그리고…… 긴 노역도 끝나겠지 그러나 그게 끝인가? 끝이기만 할까? 한 생의 정탐을 마친 그림자가 검은 휘파람을 휘휘 날리며 신께 고자질하러 가는 건 어쩌지? 다음 생에는 나무가 되고 싶다 지리산 벽소령 대피소 지나 도라지모싯대 꽃 종 울리는 곳 백수 천수까진 아니더라도 나무로 살다 살다 하얗게 쓰러지면 나무에 이끼 불러 살라 하고 그 이끼마저 품을 수 없을 때 부서지고 바스라져 등산객들 발밑이나 포근포근하게 하는 나뭇가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상이나 의자의 쓸모보다는 그저 나를 딛는 발바닥 한 발짝이라도 호랑이 발바닥처럼 푹신푹신했으면 좋겠다 썩어 땅속으로 돌아가기 전에 ---「고자질하는 그림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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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남여치에서 며느리밥풀꽃 따라 예까지 왔다. 직소폭포가 내게 갈지자 인생 이제 내려놓고 시원하게 한번 내리 꽂아보라고 한다. 감춰진 과녁에 꿈의 화살 제대로 쏘아보라고 한다. 2022년 늦가을 장영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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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님 시인의 시세계는 생명에 대한 깊은 슬픔과 생존에 대한 깊은 아픔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죽음을 생의 완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끝’이란 인식에서 종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원래 ‘고자질’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 쓰지를 않지요. 기독교의 신은 사후세계에서의 복락을 약속했는데 이 시의 화자는 죽음을 긴 노역의 끝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자는 검은 휘파람을 휘휘 불며 ‘사후세계를 두려워하는 화자’를 고자질하러 신께 간다고 보았습니다.
소설가가 쓴 소설의 내용은 허구라고 생각하고 시인이 쓴 시의 내용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라는 시를 읽은 모든 독자가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갖고 시적 가공을 하지 않을 거라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완벽한 허구인 그 시를 사실로 간주케 했던 것입니다. 저는 미지의 그대에게 시인의 유년 시절의 일화를 들려주는 게 아닌가 여겨지는 몇 편의 시를 먼저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 시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면 전화로 물어봐야 하겠지만 상상력의 산물이면 어떻고 사실이면 어떻겠습니까. 시적 진실을 추구하면 그만인 것을. -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