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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기획시인선

목차

시인의 말

차례

1부 복종하는 검은 양

감나무 밑에 탯줄 묻듯
검은 양
고자질하는 그림자
빈집
그림자 없는 새
체리 향기
싸워서 진 개
유년의 그늘
열두 살 인생
추석이라도 쇠고
봄날의 폐가
오렌지
어둠은 어둠끼리
늙은 여자 거지
꽃 그림자
그림자가 머무는 숲

2부 낯꽃 펴고 살라 하셨건만

신께서 날 미워하시면 어쩌나
다음 생에는 나무가 되고 싶다
버리고 간다
꽃 지면
여름 한낮
△△나무
서곡
머리 없는 마애불을 찾아서
새가 머리를 쓸 때마다
나,
숲속에서 한 생애가 다시 시작된다

새로 생긴 무덤
사라짐에 대하여
12시간 동안
많은 꽃이 다녀갔다

3부 화성의 붉은 말을 버리고

추억역
새장의 새
언제나 먼지
S로 시작하는 것들이 가진 슬픔 몇 가지 1 Sunset
S로 시작하는 것들이 가진 슬픔 몇 가지 2 Sunrise
세 자매
건져 올린 속눈썹
어찌해서
나무 반 그루
단풍
늦가을, 충렬사
색소를 마시다
적은 멀리 있지 않다
싱거운 바람
밤에 꿈꾸는 실종
폭풍 속으로

4부 바다에 동백 떠 가듯

십일월
훗날에 필 동백
동백의 계절
푸른 꽃
너는 반짝이는 아나콘다
거울은 알고 있다
갈매기
눈발
밤바다의 안내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작나무 가계도
소녀의 꿈은 빨강
갱생원 시
다시, 봄
저 집

해설


생명에 대한 깊은 슬픔, 생존에 대한 깊은 아픔 | 이승하(시인 · 중앙대 교수)

저자 소개 1

전북 김제 청하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현대시학》등단. 시집『언 개울가의 흰 새』.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204g | 125*188*20mm
ISBN13
9791192079455

책 속으로

노을 때문이었다
엄마 심부름으로 정육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산을 깎고 있었다
바리깡 한 줄 쓱 지나간 듯한 흙길에서 하늘을 보았다
선짓덩이 같은 노을 때문이었다
엄마가 죽는구나
엄마가 나보다 먼저 죽는구나
엄마 없는 세상을 어찌 사나
선양동 말랭이에서
노루지에 싼 고기 들고 목놓아 울던
흙먼지 날리던 여름 저녁
엄마가 김치찌개 끓이려고 이 고기 기다리실 텐데
저물도록 어디서 뭐하다 이제사 왔냐며
할망빠진년이라고 혼낼 텐데
걱정하면서도 엉엉
엄마 심부름으로 명산동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갈고리에 걸린 살덩이에서 고기 쓱 끊을 때 보았던
고무 양동이에 가득한 선지
핏덩이 푸딩이었다
마음이 멀미한 듯 심하게 울렁거리던
열두 살 인생이었다
---「열두 살 인생」중에서

산비탈에 모여 있는 무덤을 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청하 초등학교 이학년 때 내 짝꿍은 정미소에서 멀지 않은 공동묘지 기슭 기와집에서 일본 여자와 함께 살았다 어디서 주워온 아이라고도 하고 일본 여자가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아이라고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봄 소풍 가을 운동회 때면 으레 학교에 오지 않았던 눈이 토끼 눈처럼 빨갛고 말 더듬던 아이 공동묘지 낡은 기와집 앞을 지날 때면 뼈를 고는 냄새가 진동하고…… 동네까지 들려오는 소문들은 무성했다 일본 여자가 키우는 아이들은 가끔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들로 바뀐다고도 했다 또 일본 여자는 무덤에 묻힌 송장을 잘라다 약도 만들고 먹기도 한다고 했다 동네 아이들은 보리밭에 숨은 문둥이보다 일본 여자를 더 무서워했다 얼굴은 본 적 없는 그녀 소식을 지난봄 고향 가서 들었다 한밤 전날 묻힌 시체 다리 한쪽을 무덤에서 잘라 오다 들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출소에 붙잡혀간 일본 여자는 며칠 만에 곧 풀려났다고 했다 그녀가 준 약으로 살아난 불치병 환자들이 서에 진정서를 냈다고 했다 내 유년의 그늘진 곳에 늘 서 있는 일본 여자 그녀가 키우던 내 짝꿍은 어딜 갔을까요?
---「유년의 그늘」중에서

그림자가
내게 악수를 청하는 순간!
아마 나는
죽어 누워 있겠지

나는 내 안에 숨은
그림자 손을 어떻게
오려낼 수 있을까?

눈빛 꺼지고
눈꺼풀도
셔터가 내려져 있을 텐데……

그때면
그림자가 기거하던
피 웅덩이는
바짝 말라 있겠지

그리고……
긴 노역도 끝나겠지

그러나
그게 끝인가?

끝이기만 할까?

한 생의 정탐을 마친 그림자가
검은 휘파람을 휘휘 날리며
신께 고자질하러 가는 건 어쩌지?
다음 생에는 나무가 되고 싶다

지리산 벽소령 대피소 지나
도라지모싯대 꽃 종 울리는 곳
백수 천수까진 아니더라도
나무로 살다 살다
하얗게 쓰러지면
나무에 이끼 불러 살라 하고
그 이끼마저 품을 수 없을 때
부서지고
바스라져
등산객들 발밑이나 포근포근하게 하는
나뭇가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상이나 의자의 쓸모보다는
그저 나를 딛는 발바닥 한 발짝이라도
호랑이 발바닥처럼
푹신푹신했으면 좋겠다
썩어 땅속으로 돌아가기 전에

---「고자질하는 그림자」중에서

출판사 리뷰

■ 시인의 말

남여치에서 며느리밥풀꽃 따라 예까지 왔다.
직소폭포가 내게 갈지자 인생 이제 내려놓고
시원하게 한번 내리 꽂아보라고 한다.
감춰진 과녁에 꿈의 화살 제대로 쏘아보라고 한다.

2022년 늦가을
장영님

추천평

장영님 시인의 시세계는 생명에 대한 깊은 슬픔과 생존에 대한 깊은 아픔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죽음을 생의 완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끝’이란 인식에서 종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원래 ‘고자질’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 쓰지를 않지요. 기독교의 신은 사후세계에서의 복락을 약속했는데 이 시의 화자는 죽음을 긴 노역의 끝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자는 검은 휘파람을 휘휘 불며 ‘사후세계를 두려워하는 화자’를 고자질하러 신께 간다고 보았습니다.

소설가가 쓴 소설의 내용은 허구라고 생각하고 시인이 쓴 시의 내용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라는 시를 읽은 모든 독자가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갖고 시적 가공을 하지 않을 거라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완벽한 허구인 그 시를 사실로 간주케 했던 것입니다. 저는 미지의 그대에게 시인의 유년 시절의 일화를 들려주는 게 아닌가 여겨지는 몇 편의 시를 먼저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 시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면 전화로 물어봐야 하겠지만 상상력의 산물이면 어떻고 사실이면 어떻겠습니까. 시적 진실을 추구하면 그만인 것을. -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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