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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사라진 자국
윤희경
현대시학사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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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기획시인선

책소개

목차

** 시인의 말

1부 나는 그 흔들림의 어디쯤을 찾으려다

파충강에서 I 12
파충강에서 II 14
습기의 기울기 17
녹빛 음절 19
부분적 복원실 21
꿩의 바람꽃 I 22
꿩의 바람꽃 II 23
내가 붙잡으려 했던 풀잎 24
앞으로, 앞으로 27

2부 숨죽인 빛, 내 안에서 아직도 달린다

디셈버 시드니 32
데스파시토 33
근대의 시기적절 35
귀를 여는 저녁 37
솜털 벌레의 길 39
죽변에서 온 언니 42
나의 근대성 44
흰 어둠의 노래 46
마이너스 계단 48
잠수함 50
막 사는 사람 52
마마 개미는 53
우리 안에 바다가 있다는 설 55

3부 내 안의 검고 푸른 구조들

감자가 썩어가는 계절 60
타임스 스퀘어 62
야구장에서 키스하는 먼로와 K 64
일산 호수공원의 기울기 68
부르탈리즘 70
DOWN 73
빈 눈 I 75
칼데라 77
빈 눈 II 78
상수에게 80
구월 82

4부 흩어진 빛과 닫히지 않은 표면

아프리카 바이올렛 86
마그네틱 공화국 88
모래는 B처럼 슬프다 91
코끼리 사원의 밤 93
브레첼의 기도 96
검은 빵 98
콘트라베이스와 워맨스 99
싱그랭이 봄날 100
목포 102
아버지의 바이칼 103
필바라의 신 106
흰 귀의 시간 109
완월이 완월이었더라면 112
닫히지 않은 말 119

** 해설
나는 나중에 왔다┃임후성(시인)

저자 소개 1

전남 나주 출생. 1996년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였다. 한국 사이버 외국어대학교 영어학부를 졸업하였으며 2015년 『미네르바』 신인상을 통해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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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5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72쪽 | 125*188*20mm
ISBN13
9791193615492

책 속으로

요절하지 않았다
오래된 엘리베이터처럼 어둠이 조용히 아래로 잠기고 있을 뿐이다
‘뭔가 해야 한다’라는 말이 어깨에 내려앉았고
그때는 양어깨가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옷걸이에 남은 무게만 남아있다
플레이리스트, 몇 개의 구겨진 계절
손에 잡히는 것들은 잠시 얼굴이 되었고 거울은 자주 바뀌었다
삶은 켜진 채 놓인 물건처럼 ‘살아짐’쪽으로 기울었다
가라앉는다는 말은 내 등 뒤에서 습기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바스락거릴 때마다 서랍 속 공기가 새어 나왔고
깨어난 건 말이 아니라 접어둔 종이 속의 거짓들이었다
달력의 빈칸들이 눈을 붙잡았다
일정과 채권자 이름, 카드값, 해야 할 목록이 검은 잉크로 먼저 자리를 잡았다
펜 끝이 흔들렸고, 문장은 조금씩 흩어졌다
아침은 시작되었으나 밤은 빈손으로 끝났다
복도에 센서 등이 켜졌다가 꺼지듯
다음 날도 잠시 열렸다가 닫혔다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날마다 아래로만 사라졌다
동사만 남아 흔들렸고 ‘나’라는 명사는 서류 맨 아래에서 흐려졌다
요절은 없었다
살아 있는 채로 잠겼다
아직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 뿐이다
--- 「나의 근대성」 중에서

시곗바늘, 폭설 예보
시간을 거꾸로 센다
식구들이 잠든 밤
멍든 스탠드 불빛 아래 종이를 뒤집는다
초고도, 퇴고도, 거꾸로 거꾸로 째깍, 째깍 -

89일, 88일, 87일
숫자는 한 칸씩 내려가고, 이면지의 문장들은 바스러진다
줄어드는 숫자만큼 습기와 피로
‘가난해야 복을 받는다’
그 말은 관절보다 먼저 낡았다
복 대신 퇴행성 관절을 넘겨받는다
로꾸거, 사랑도 아니면서 나를 집어삼키는 이름

마이너스 3, 마이너스 2, 마이너스 1
꿈속에서도 색 빠진 얼굴 하나
부푼 달력이 터진다
삭아가는 삶의 실내
밤은 계약이었고, 여자는 항목이었다
시간은 창문 틈으로 새고
체온은 눅눅해진다

철들 무렵,
첫 장례처럼 걸친 벗지 못할 한 장의 로꾸거 -
다시 첫 종이를 펼친다
무릎이 먼저 내 삶을 접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거꾸로
--- 「마이너스 계단, 로꾸거 -」 중에서

불변을 끝까지 붙들 수 있을까
우연뿐인 세계
사람들은 직선만 고집한다
그것을 상수라 부른다

‘너를 위한 행복한 고통이었다’
마른 빵을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고 씹더니
조용히 가셨다

‘수염 좀 깎아라’
아버지 마지막 말이다

부패와 우연으로 굴러가도
싫은 것 앞에서 자주 멈췄다

상수 쪽으로만 손이 간다고?

부엌 식탁 위, 아직 치우지 않은 그릇들
손 안 더럽히고 살 수 있을까

정중동의 말들이
눈꺼풀을 하나씩 닫았다
로또 번호를 긋는다

아버지 말대로 수염을 깎았다
위층에서는 화장실 공사가 끝나지 않는다
겹치지 않는 조용한 방식이
이 겨울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는다

가장 작은 상수가 손끝에 걸린 채
두 칸짜리 혹독한 겨울을 건너고 있다
--- 「상수에게」 중에서

함께라는 말이 왜 이렇게 가벼운가
우리는 더 멀리, 더 쉽게 튀었다

여기저기 떠밀려
돈을 모았다
푸석한 얼굴
분홍빛 파우더조차 닿지 못한 결

계수나무 아래
생의 헝겊을 꿰매는 오후

속 빈 달,
완월玩月이라는 이름을 비웃으며

꽃값은 몸값
웃음값마저 끝내 남지 않았다
쌀과 연탄, 병원비,
그 무게가 앞을 막았다
마트로 향하는 발걸음조차 뒤통수가 시렸다

희주와 나는
굴리던 공처럼 흩어졌다

공共

완월이
그저 ‘놀던 달’이었더라면

고양이 이불 속
쥐를 물던 밤.
오지 못한 달빛의 자리

희주는 달의 끝자락을 끌어안고
숨을 쉬었다

엄마의 울음은 까마귀
지붕 위에서만 맴돌다,
희주의 귓속을 쪼아대던 어둠

그날 이후 우리는
말보다 긴 침묵을 삼켰다

희주는 조용히 아메리카로 떠났고
나는 아직, 달빛 아래 서 있다

달은 오늘도
속 빈 공처럼 튕겨 나가
누군가의 이불 아래
울음처럼 스며든다

양철지붕 빨랫줄에 걸린 꽃무늬 팬티들
바람 한 점 없이 눈처럼 매달려 있다

마른 가루
부서지던 시간
--- 「완월玩月이 완월이었더라면」 중에서

무릎 위, 벽돌 같은 가방을 꼭 쥐고
차가운 전철 바람에 숨을 고르던 시절

가방 속 책과 빵이
냄새를 묻히며 있었다

아직 무너지는 쪽에 있다

우리는
심야 극장, 꺼져가는 불빛 속에 앉아 있었다
나는 어둠의 골조를 더듬었다

식은 죽의 온도,
철근처럼 굳어가는 말

정육면체
가난의 계단이었다

각을 쌓아 올리던 날들,
가장 거친 구조는
굵은 손을 거쳐 세워졌다

비좁은 옥탑방,
먼지 쌓인 쌀독 곁
납작하게 눌린 잠을 버텼다

빛이 마른 시간
삶의 모서리를 비틀었고

뚫고 지탱하며
말이 자주 부서지던 때
작은 벽 하나가 덧대어졌다

정육면체 속 숨결
사람이 얇아지던 날들

어떤 기도는
내 안에서
기둥 하나의 무게였다

날숨 끝에
하루가 한 층씩 올라갔다

--- 「부르탈리즘」중에서

추천평

무수히 많은 ‘결’을 섬세하게 더듬어가야 만날 수 있는 궁극의 자리. 윤희경 시집 『말이 사라진 자국』은 “잔결”과 “물결”, “숨결”과 “잠결”, “뒤집힌 결”과 “매운 결”, “파문의 결”과 “식물의 결”, “뼛결”과 “묵은 결”을 지나 “새싹의 결”에 이르는 여정을 비추면서 존재의 빈자리를 더 깊은 울림으로 채운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필바라 사막의 “지문 없는 돌 하나”에서는 “말 없는 신의 그림자”와 “작은 것들의 장엄함”을 읽어낸다. “가장 낮은 음이 가장 멀리 흔들린다”는 것을 성스러운 말의 결로 다듬은 손결 또한 완월처럼 희고 도탑다. - 고두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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