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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하얀 바이러스
하얀 바이러스·12 소라 이어폰·14 새 주소·15 눈표범·16 색깔론·18 호프집·19 노을·20 아버지의 발·21 환청·22 마스크 쓰고 오는 봄·23 2부 플라스틱 인간 코로 나온 봄·26 달세방의 기억·27 플라스틱 인간·28 그립다. 청개구리·30 몬 산다는 그 꽃·32 억새 1·33 억새 2·34 하얀 달빛·35 나무늘보·36 산길양이의 용서·37 3부 스토커 stalker 그놈 화가 비 1·40 화가 비 2·41 스토커 stalker 그놈·42 음식물쓰레기·43 햇봄·44 에어쇼airshow·45 바보 가로등·46 민들레 활을 쏘다·48 국화빵·49 아, 정말·50 사랑초·51 4부 슬픈별 하얀 대화·54 흰소·56 회전목마回轉木馬·57 입주入住하는 날·58 낙엽·60 컵라면·61 촛불·62 북해도·63 반딧불이·64 가장 넓은 귀·65 가을비·66 슬픈 별·68 블랙리스트blacklist·70 5부 수채화 그리는 다슬기 수채화 그리는 다슬기·72 백목련·73 살색 스웨터 뜨는 여자·74 사랑의 접선방정식·76 철새·77 부들·78 몽돌붓다·79 징검다리·80 시계꽃·81 한밤중 사랑싸움·82 굴비·83 평안상회·84 해설 | 권온_쉼 없이 자라는 친절과 사랑을 품다·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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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스크 하나가 휙 지나갔다
검은 복면을 하고 바라보는 눈빛이 날카롭다 앵앵 소리 들려오는 도시의 스산한 회색빛은 죽은 까치를 밟고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 속도보다 빠르게 번지고 잠시 후 복제인간이 코로나를 타고 와서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는 총알이 날아와 꽂히듯 아프다 하나둘 늘어나는 표범의 눈빛이 번뜩거리는 오후 붉은 깃발을 들고 하얀 마스크가 몰려왔다 비행기를 타고 왔다 배를 타고 왔다 자동차를 타고 걸어서 왔다 또 다른 하얀 마스크가 내 곁으로 다가오고 나는 슬금슬금 자리를 뜬다 복제된 하얀 마스크가 다가와 길을 물었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또 한 손을 내저으며 ‘저리 가요 숨을 곳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불어나는 하얀 마스크 속에서 나는 하얀 바이러스 기침 소리 한방에 다리가 풀리고 텅 비어가는 유령들이 사는 도시 뉴스에서 내일은 영하 12도라고 일기예보가 나올 때 하얀 눈이 내렸다 하얀 마스크를 쓰고 내렸다 한동안은 녹지 않을 거다 ---「하얀 바이러스」중에서 소라가 검정 돌담 위에 앉아있다 얼굴이 뽀얀 그녀의 넓은 입술을 귀에 꽂으면 파도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 흘러나와 키 작은 한 여인이 걸어가고 있어 양산을 돌려가며 엉덩이 씰룩씰룩 걸어가는 그녀 발자국 따라가면 겹쳐지는 지점은 갯바위 달빛 사라져 그믐으로 가는 길 검은 LP판 돌아오는 해변에 소나타로 바뀌는 빗소리 후드득 모래알을 적시고 있어 아직 그녀는 돌담 위에 앉아 자기의 운명을 듣고 있어 파도 소리 우주의 숨소리 들려오는 밤바다 ---「소라 이어폰」중에서 언제부턴가 번지가 길로 바뀌었다 한 평도 안 되는 옛 번지에 살다 본향 찾아 새 주소로 이사 가신 분들은 어찌 살고 계실까 그 넓은 하늘길에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이 함께 뒷짐 지고 산책하고 계셨다 이따금 폭포수 흘러넘치는 은하 길 한 귀 포장마차에는 천상병 시인과 중광 스님이 마주 앉아 깔깔깔 대폿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옛 번지가 그리우신지 모두 땅 아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계시다 ---「새 주소」중에서 눈빛이 날카롭다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는 세상은 앵앵, 마스크와 모자를 꾹 눌러쓴 구급대원들이 들이닥쳐 쓰러진 사람을 싣고 황급히 떠났다 별이 지고 평온해 보이는 곳곳 숨어드는 희뿌연 미세먼지 자욱한 거리를 하얀 마스크가 휘청거리며 걸어 나온다 누가 뿌려 놓은 건가 중금속 플라스틱 가루 화생 독가스가 살포되고 바이러스가 사람이 되어 작은 눈이 더 작아지고 목이 따갑고 숨이 가쁘다 방금 죽은 사람이 지나간 자리 스카이 콩콩 튀어나오는 하얀 마스크 겨우 숨통을 열어 둔 허파에도 계엄이 선포되고 여기저기 조금 남은 초록 숲마저 우주로 통하는 숨구멍을 모두 막아버렸다 일교차가 심한 날 경비병들은 앙가슴에 발톱을 숨기고 허공에 코와 입을 버렸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 걸어 다니는 검은 광장에서 침묵시위를 하는 사람들 살금살금 흩어졌다 모이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하얀 마스크 눈빛이 날카롭다 ---「눈표범」중에서 봄인데 하얀 거울 앞에 무슨 색칠할까 주섬주섬 옷장을 뒤적이다 붉은 티를 걸쳤다 눈에 확 띄는 것이 불안해 아래는 찢어진 파랑 청바지에 붉은 티 입은 한 청년이 봄 앞에 섰다 엉거주춤 구색 맞추려 언제나 벗어놓을 모자는 노랑 ---「색깔론」중에서 소소한 저녁 서둘러 레이더를 수리하는 거미 한 마리 찬거리 마련하려고 푸른 나뭇잎 사이로 가게 문을 열고 있다 비를 뿌리며 다가오는 덩치 큰 먹잇감 먹구름이 무사히 통과했다 회오리도 한입에 삼키는 바람 집 끈적거리는 여름밤 발에 감지되는 몇 사람 거미줄에 걸려 바동거린다. ---「호프집」중에서 많이 힘든가 봐 하늘이 캑! 뱉어놓은 각혈 푸른 허파 속에 전투기. 항공모함, 미사일, 핵폭탄, 우주선 (…) 그리고 시커먼 매연, 플라스틱 미세먼지 별별 쓰레기 다 들어있다 ---「노을」중에서 공사장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가 대낮에 절룩절룩 한 발을 들고 집에 오셨다 군살 배긴 아버지의 발은 못에 찔려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덧나지 않게 피를 빼야 한다고 망치로 발바닥을 마구 두드리셨다 온몸에 번지는 통증은 오장육부를 관통한 일용할 양식 못 구멍으로 아버지의 빈 수레가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못 구멍에 호랑이기름 쓱 문지르고 장군처럼 공사장 쪽으로 걸어가셨다. ---「아버지의 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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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섭의 시집 『플라스틱 인간』에 수록된 시들을 읽으며 우리는 그가 집중하는 주제의 넓이와 깊이에 감탄하였다. 특히 「플라스틱 인간」이나 「사랑의 접선방정식」 또는 「몽돌붓다」 등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를 확인하였다. 독자들이 ‘인간’과 ‘사랑’ 그리고 ‘원(圓)’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친절을 위한 기회가 있다.(Wherever there is a human being, there is an opportunity for a kindness.)”라고 이야기하였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에 의하면 “사랑은 지배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장한다.(Love does not dominate; it cultivates.)” 또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에 따르면 “원은 영혼과 같아서 끝나지 않고 멈추지 않고 빙글빙글 돈다.(Circles, like the soul, are neverending and turn round and round without a stop.)” 어렴풋이 몇 대째인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유전자 몸속에는 플라스틱 피가 흐르고 있어 플라스틱 자궁에서 플라스틱 탯줄을 달고 태어나 플라스틱 인간으로 살아왔어 눈물도 모르는 플라스틱 여자 차가운 성질의 플라스틱 남자 열 받으면 녹아내리는 플라스틱 사랑으로 세상에 툭 던져놓은 원치 않는 플라스틱 아이는 플라스틱 우유를 먹고 플라스틱 성장호르몬으로 자라나 플라스틱 비행기에 몸을 싣고 플라스틱 찬란한 도시로 유학을 떠나지 버림받을 걸 알면서 껌딱지처럼 달라붙는 플라스틱 여자 플라스틱 남자 감각이 없는 플라스틱 사랑은 구름 속에 모여 검은 파티를 하지 하늘을 날아다니며 플라스틱 비를 뿌리고 플라스틱 초록바다에 꼬리 흔들며 헤엄쳐가는 플라스틱 물고기 파도가 밀려오면 지칠 줄 모르고 뼛가루가 스밀 때까지 갯바위에 살을 부비는 플라스틱 사랑은 죽지도 않아 흔적 없이 떠나는 차가운 이별 얼음 유전자로 바꾸고 싶어 45억 년 전 빙하기 그리운 내일 아침은 또 플라스틱 칵테일 ―「플라스틱 인간」 전문 “플라스틱”의, “플라스틱”에 의한, “플라스틱”을 위한 시가 여기에 있다. ‘플라스틱’이 미치는 범위는 “피”, “자궁”, “탯줄”, “인간”, “여자”, “남자”, “사랑”, “아이”, “우유”, “성장호르몬”, “비행기”, “비”, “초록바다”, “물고기”, “칵테일” 등 매우 광활하다. 최순섭은 여기에서 열이나 압력으로 소성 변형을 시켜 성형할 수 있는 고분자 화합물로서의 플라스틱을 광범위하게 도입한다. 그는 ‘현대 사회’ 또는 ‘21세기’의 본질을 탐구한다. 시인은 “45억 년 전”부터 시작된 ‘지구’의 역사에서 “유전자”의 지속을 원하는 ‘인간’의 눈물겨운 ‘사랑’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최순섭의 이 시는 김종삼 시인이 시 「나」에서 “망가져 가는 저질 플라스틱 臨時 人間”이라는 어구를 제시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곧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시가 여기에 있다. 최순섭은 ‘친절’을 실천하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믿는다. 그가 신뢰하는 인간은 성장하는 가치로서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긴다.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통제하려는 사람은 사랑의 핵심을 모르는 셈이다. 타인에게 친절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에게 허락된 가치가 사랑이다. 시인은 빙글빙글 도는 원과 같이 쉼 없이 자라는 사랑을 지향한다. 그의 바람처럼 친절과 사랑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날 때, 우리는 더욱 건강하고 아름다운 한국 사회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와 역사를 향해 작동할 최순섭의 예민한 시적 촉수를 기대한다. -권온(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가을, 단풍이 아프다는 말 사치일까 세상 곳곳이 몸살이다 나도 아프다 너도 아프다 아니 모두가 아프다 아프다는 말 한마디로 치유가 되는 세상이 오면 모두가 평온한가 세상에… 또 물어본다 2022년 가을 최순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