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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화본역·12 용연사 가는 길 따라·14 미루나무 숲에서·15 보리밭에서·16 백두산 천지·17 나무처럼 숲처럼·18 팔공산은 묻지 않는다·20 비슬산의 참꽃·21 의자와 금계산·22 교항리 이팝나무·24 목련꽃·26 호박꽃 같은·27 야생 나팔꽃·28 장미·29 그렇지만 그래서·30 2부 줄넘기·32 어떤 인문학적 제안·34 아버지 같은 사람 없어요·36 문제는·38 시골 학교에서 강사 선생님 모시기·39 효목동 500번지·40 엔타이煙臺의 추억·42 모기 편에 서다·43 신호등·44 곰팡이·46 느슨한 술래·48 길고양이 딜레마·50 떡볶이와 불 닭발·52 악몽·54 3부 대빗자루·56 속물 1·57 속물 2·58 이별·60 행복한 사람도·61 슬픔은 별빛보다 오래 가도·62 다도해·63 농구 골대·64 흔들바위·65 강둑에서·66 뽁뽁이·68 발 빠짐 주의·69 또 엉덩이를 내리기 전에·70 목욕탕·72 문득 새처럼·74 4부 몽돌 같은·76 군불·77 늦가을 석양에·78 외할머니와 수레·79 장모님·80 착한 알츠하이머 씨·82 무엇을 빌까·83 면회·84 슬픔과 그리움에 함께 하는·85 마지막 당부·86 뒷모습 영정사진·88 영결永訣·90 벌초 이야기·92 회한·93 뻐꾹 뻐꾹·94 해설 | 권온_자연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황홀함을 찾는 방법·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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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본역 대합실에 앉았다
떠남의 설렘이나 마중의 기쁨은 없다 기차를 타지 않으면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기차는 가끔 화본역을 향해 스치듯 손을 흔들고 카메라를 향해 오래 웃는다 서울처럼 기차에 실려 가던 그 절절한 희망과 꿈은 어디에서 타는지 전쟁처럼 기차에 실려 오던 그 많은 눈물과 그리움은 어디에서 내리는지 한때 빛났던 모든 희망 같은 슬픔 진심이 찍힌다면 화본역은 카메라 앞에서 웃지 않으리라 어떻게 기다릴까 마지막 기차 화본역은 카메라를 든 사람들처럼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는다 ---「화본역*」중에서 *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간이역 오는 길이 환한 용연사 가는 오래된 길 따라 벚꽃은 한 송이 한 송이 힘을 다해 피어나 한 잎 한 잎 진심을 다해 떨어진다 바람을 기다려 보면 벚꽃은 오히려 떨어질 때 더 진심이다 기억해보라 사랑 같은 절정에서 떨어졌던 모든 것은 정말 진심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황홀하지 않았던가 오는 길이 환한 용연사 가는 오래된 길 따라 ---「용연사 가는 길 따라」중에서 하늘로 구름꽃을 들어 올릴 만큼만 바람이 불어도 잎들은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처럼 하나씩 흔들릴 때 아, 가만히 두면 모두 하늘로 올라갈 것 같아 잎 무성한 가지에서 방금 입을 맞춘 새들이 날아간 하늘로 잎들도 서로 반짝이며 입 맞추고 새들을 따라갈까 치마를 올릴 듯 말 듯 하는 바람에도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미루나무 숲에서 그리운 사람들인 양 미루나무를 바라보는 기쁨이여 ---「미루나무 숲에서」중에서 지구는 푸른 별이라매 그럼 지구에서 사는 우리는 별에서 사는 거잖아 그런데 별에서 온 사람이니 별에서 살고 싶다니 하는 말들은 무슨 말이야 별에서 살면서 다른 별을 그리는 것은 사람들의 절망적 욕심이지 친구야, 다른 별이 아닌 이 별에서 이별할 때까지 종달새 원앙금 펴는 보리밭 같은 별밭 이루어 푸르게 푸르게 출렁이다 누렇게 누렇게 일렁이면 좀 좋겠니 ---「보리밭에서」중에서 야훼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정녕 죽어야 하지만 아, 기뻐서 울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에 무슨 풍경이 더 남아 있을까 무슨 신비가 더 남아 있을까 ---「백두산 천지」중에서 햇살이나 함박눈 안개비가 내리는 날이 아니어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풍경은 황홀하다, 깊게 숲이 파도처럼 출렁일 때는 전율한다, 아득히 왜 몰랐을까 헤아릴 수 없는 바람 앞에서 미동도 안으려 버텼던 사람아 바람 앞에서는 나무처럼 숲처럼 흔들려야 하는 것을 바람 앞에서는 출렁거리는 모든 것이 황홀한 전율인 것을 ---「나무처럼 숲처럼」중에서 부러워했었다 평일 대낮에 산속을 걷는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공덕을 쌓았나 늦게 알았다 형이 아프고 산에 가면서 평일의 산은 아픈 사람들의 피난처임을 산은 병病에게 묻지 않는다 몸이, 마음이 어떻게 아픈지 학벌은 어떤지 어느 동네에서 사는지 무슨 일을 하며 밥을 먹어왔는지 그냥 받아주고 동행이 될 뿐이다 밥때가 되어 배낭에 지고 온 맛깔스러운 병을 꺼내 놓으면 내께 니 꺼고 니께 내 꺼다 다시 웃으며 걸어도 여기저기 비 그친 후의 독버섯 같은 병들 다 이해도, 품을 수도 없지만 산은 병을 묻지 않는다 함께 걸을 뿐이다 ---「팔공산은 묻지 않는다」중에서 눈이 함빡 내리는데 난데없이 참꽃의 안부가 궁금하여 비슬산을 오른다 봄날의 황홀했던 꽃바다 비슬산 정상은 눈꽃이 피어 다시 아득한 바다다 아, 꽃은 한 계절을 피는 게 아니구나 보여주고 싶지 않아라 눈 내리는 비슬산의 참꽃 ---「비슬산의 참꽃」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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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석의 이번 시집을 대표하는 핵심 요소로는 ‘자연’과 ‘인간’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자연’은 꽃, 나무, 숲, 산 등으로 구체화된다. 시인의 시에 제시되는 ‘인간’은 은행, 학교, 도서관, 초원, 바닷가, 병원 등 다양한 장소 또는 공간과 연결된다. 그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2개의 축으로서의 자연과 인간은 각각 독립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대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서로 조화를 이루며 소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전병석은 시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는 ‘반복’을 활용하여 ‘운율’ 또는 ‘리듬’을 극대화한다. 또한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시 세계를 확장하고 심화한다. 그는 〈바보들의 행진〉과 같은 ‘영화’를 시의 자양분으로서 흡수한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고 ‘반성’과 ‘성찰’을 실천하며 삶의 본질에 근접한다. 그는 단순한 구도 속에서 ‘여운’이나 ‘여백’을 남기는 시를 제공함으로써 현대시의 경쟁력을 높인다. 화본역 대합실에 앉았다 떠남의 설렘이나 마중의 기쁨은 없다 기차를 타지 않으면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 서울처럼 기차에 실려 가던 그 절절한 희망과 꿈은 어디에서 타는지 전쟁처럼 기차에 실려 오던 그 많은 눈물과 그리움은 어디에서 내리는지 (……) 어떻게 기다릴까 마지막 기차 화본역은 카메라를 든 사람들처럼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는다 ―「화본역」 부분 “화본역(花本驛)”은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위치한 중앙선의 역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화본역’은 ‘간이역(簡易驛)’ 곧 일반 역과는 달리 역무원이 없고 정차만 하는 역에 속한다. 화본역에서는 “떠남의 설렘이나/ 마중의 기쁨”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간이역을 방문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기차를 타지 않으면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차를 타거나 내리면서 또는 기다리면서 “희망”이나 “꿈”, “눈물”이나 “그리움”, “슬픔”이나 “진심” 등 삶의 희로애락을 마음껏 경험한다. 전병석은 이번 시집의 ‘표제시(標題詩)’에 해당하는 이 시에서 “떠남”과 “마중”, ‘가다’와 ‘오다’, ‘타다’와 ‘내리다’, ‘마신다’와 ‘마시지 않는다’ 등 일련의 ‘대비(對比)’를 구사함으로써 ‘조화’와 ‘중용’의 시학(詩學)을 실천한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전병석의 시 세계를 이해하려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파악해야 한다. 또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 의한 ‘황홀’의 경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친절의 기회가 있다.(Wherever there is a human being, there is an opportunity for a kindness.)”라고 이야기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오직 그것을 자연이라고 쓴다.(I believe in God, only I spell it Nature.)”라고 언급하였다. 또한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인생에서 황홀함을 찾아라. 생활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Find ecstasy in life; the mere sense of living is joy enough.)”라고 진술하였다. 전병석은 친절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루었고, 인문학의 가치를 믿었으며, 인간미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형상화하였다. 그는 신(神)과 같은 절대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공감하며 이를 시로서 표현하였다. 시인은 인간과 자연의 만남에서 삶의 즐거움과 황홀함을 발견하고, 음악성이 내재하는 반복의 미학을 구현하였다. 그는 자연을 닮은 사람들이 충만한 공동체와 사회를 꿈꾸었다. 시인의 말 우연히 세상을 향해 작은 창 하나를 내었습니다. 이름하여 시입니다. 이것으로 “사자”처럼 질문하며 “어린아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의 “선함과 진실함”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는 즐겁습니다. 내일은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