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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 들라크루아의 삶과 작품 / 옮긴이의 글 / 작품해설 - 기스와 들라크루아 : 현대적 삶의 화가와 위대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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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예술의 원료일 뿐이다
19세기 파리는 경제적·문화적으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대량생산된 상품이 넘쳐나는 백화점과 부르주아들이 부(富)를 자랑하는 거리를 배경으로 새로운 예술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로마 미술을 번지르르하게 모방한 신고전주의로 대표되던 부르주아의 미적 관념을 거부하고 현대의 일상을 솔직하게 재현한 이런 예술을 보들레르는 ‘현대’ 예술이라고 부르며, 기스는 이 예술의 거장이다. 이는 자연주의와는 다른데, 보들레르는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교정’되지 않은 자연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대기가 새의 활동영역이고 물이 물고기의 활동영역이듯, 군중은 그의 활동영역이다. 그의 열정과 그의 직업, 그것은 군중 속에 몸을 섞는 것이다. 자기 집을 벗어나 있기, 하지만 어디서든 자기 집인 양 느끼기. 세상을 바라보기,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 세상 속에 숨어 있기. … 관찰자는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익명성을 즐기는 군주다. … 일반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대한 전기 에너지 저장소로 들어가듯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또한 그 사람을 이 군중만큼이나 거대한 거울에 빗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다양한 모습의 삶을, 삶의 온갖 요소들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아함을 비춰주는, 인지력을 갖춘 만화경에다가도.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25~26쪽 과거에 예술의 임무는 아름다움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객관적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에 아름다움은 예술가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주관적 창조물이 되었다. 예술가는 역사 속에서 유행이 담아내는 시적인 그 무엇을 끌어내야 한다. 세상의 ‘영원한 덧없음’을 재현할 수 있는 한 예술은 자연보다 아름답다. 예술이 아름답다면 삶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예술가의 미적 능력 때문이며, 그것이 예술가가 현대라는 ‘폐허’를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술의 덧없음과 영원함을 위하여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에 묘사된 19세기 여성들은 터무니없이 큰 리본과 어색하게 든 부채 등 유행을 좇은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남자들을 곁눈질한다. 그런데 한편, 이들은 당대의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동시대적으로 느껴진다. 안나 카레니나 같은 명작소설의 히로인이 현대로 옮겼을 때 패션 화보의 여배우와 같다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친숙한 이 여성들은 SNS의 사진 속 우리들 모습 같다. 재단사가 만들어준 우아한 의상을 걸치고 이발사가 다듬어준 머리를 한 얼간이들 가운데 한 명이, 안팎으로 환히 밝힌 유리창에 기댄 채 카페 문간에 나와 있다. 그의 곁에는 정부가 요긴한 발받침 위에 두 발을 올려놓은 채 앉아 있는데, 이 여인은 행실은 나쁘지만 귀부인처럼 보이기에는 부족한 게 거의 없다. … 이 두 존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뭔가를 보고는 있는 걸까· 어리석음의 나르시스인 그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반사하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군중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쾌감보다는 관찰자의 쾌감을 위해 존재한다.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75~76쪽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시시하고 하찮은, 그러나 영원한 존재들에 바쳐진 화려한 수식이다.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를 동경했으나 사실상 기스에 더 가까웠다. 그는 부르주아를 혐오하고 조롱했지만, 그들이 자신의 주된 독자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술이 더 이상 아름다움의 재현이 아닌 시대에 예술가의 새로운 역할을 성찰한 이 글로써,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하기 백 년도 더 이전에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허문 선구자가 되었다. 바야흐로 대중문화가 소위 순수예술보다 각광받게 된 지금, 진정 ‘현대의 삶을 그리는’ 예술가는 누구일까· 대답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