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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5
제1부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 31 변증법의 모험과 재난 66 광신주의, 신중함 및 신앙 121 제2부 마르크스에 대한 실존주의적 읽기: 『변증법적 이성비판』에 대하여 167 알튀세르 또는 마르크스에 대한 사이비-구조주의적 읽기 204 마지막 글 모호하고 고갈되지 않는 367 옮긴이 후기 392 찾아보기 413 |
Raymond 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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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주석자가 한 세기 동안 해결하는 데 실패했던 난점들이 이 젊은 세대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해소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부정적인 답을 제시한다. 이 답은 누구도, 특히 알튀세르주의자들을 놀라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내가 35년이 지난 후에 『자본론』을 (다시) 읽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점을 설득할 수 있는가?
--- p.23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실존주의를 배척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르트르의 근심이나 고뇌와 관련된 분석 중 어떤 것을 선뜻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 아주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의식은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창조하고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므로, 근심이나 고뇌와 같은 근본적인 감정의 변증법이나 기술(記述)이 존재론의 본질적 요소가 될 수는 없다. --- p.60 노동자의 생활 수준은 기업의 소유 형태보다는 오히려 노동 생산성에 달려 있다. 그리고 소득 분배가 반드시 계획경제 체제에서보다 개인 기업과 자유 경쟁 체제하에서 더 왜곡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좌파가 경제적 영역에서 성장과 공정한 분배라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 공적 소유와 계획경제가 필수적인 수단이 아니다. 사회주의적 교조주의는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애착에서 기인했다. 신화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화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국민이 경험하게 될 체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 p.146 하지만 대립은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근본적이지 않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이나 자본주의 경제나 소련 경제에 대해 사르트르보다 더 잘 알지 못한다. 『자본론을 읽자』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한 경제에 대해 알튀세르 자신에게도 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 p.208 나는 부족(部族)의 성스러운 단어를 부정하는 자들을 경계한다. 오늘날의 영웅인 “체 게바라”나 “마오쩌둥”은 폭력 숭배를 구현하고 있다. 그들은 승리보다는 투쟁을 찬양하며, 희생을 정당화시키는 것보다 희생 자체를 찬양한다. 그들은 파시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비의미를 축성한다.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이다”라고 학생들이 외치는 것, 이것은 국가나 민족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않는다. 가장 차이가 큰 ‘파생체들’은 그로부터 파시즘이 태어나는 감정적 상태를 보여 준다. 니힐리즘은 그것이 비난하는 전통과 연결된 부분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 p.329 나는 거의 비정상적인 하나의 경우를 선택했습니다. 파리의 유행 속에서 극단적이거나 또는 극단주의자적인 해석의 교차가 그것입니다. 내가 흥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극단주의를 차치한다면 마르크스의 사유에 모순되는 두 가지 해석의 싹이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한쪽 극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그 자체를 역사의 한 순간, 다음과 같은 인식의 한 순간을 위해 스스로를 제시합니다. 인류는 그 자신의 고유한 모험을 하고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승에게 충성을 보인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그것입니다. 물론 스승이 말한 것을 단순히 반복하면서가 아니라 다른 정세에서 생성 중인 역사적 전체성을 포착하기 위한 노력을 갱신하면서 그렇습니다. 다른 한쪽 극에서는 사회-경제학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구조와 기능을 분석합니다. 이 분석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분석이지, 역사적으로 상황 지어진 한 관찰자의 역사에 대한 전망적인 분석이 아닙니다. 충실하든 그렇지 않든 첫번째 극의 마르크스의 계승자는 루카치와 지식사회학자 만하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극의 마르크스의 계승자들은 다양하고 이질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역사학자들, 막스 베버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 심지어는 구조주의자들까지도 마르크스를 원용하고 내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 p.363 사르트르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못했음을 밝혀내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에 왜 그렇게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인간은 현재 있지 않은 것으로 있거나 또는 현재 있는 것으로 있지 않는 존재 방식 때문입니다. 조금 더 평범한 말로 하자면 그가 하나의 마르크스주의를 믿고 있다고 할 때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배척당한 마르크스주의이고, 또 아마도 마르크스 자신도 놀랐을 그런 마르크스주의입니다. --- p.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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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라는 태양에 달려드는 20세기의 프랑스 지성계, 그 맹목성을 향한 레몽 아롱의 외침
마르크스주의의 왜곡된 군살을 깎아 내림으로서 마르크스 본연의 모습을 통찰하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 연구자’의 이성적 분석으로 마르크스주의 이해에 대한 균형을 찾는다 레몽 아롱에 의하면 당대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는 크게 두 가지 사조 속에 큰 왜곡을 겪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가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기로 한 것은 어쩌면 시대적 요청에 의한 필연적 부응이었을지도 모른다. 18세기의 산업혁명을 거쳐 발전을 거듭한 유럽은 19세기에 이르러 광신에 가까운 낙관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고도의 발전을 추구했는데, 사실 유럽의 국가들이 성장할수록 한편으로는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일부 빈민들은 극심한 억압 가운데 살아갈 만큼 발전의 빛과 어둠은 극명히 나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에 인간성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 마르크스주의는 실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대안적 사상의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어둠에 맞선 탁월하고도 급진적인 사상에 매료된 프랑스 지성계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롱은 이 과정에서 나타난 집착에 가까운 왜곡을 비판하고 나선다. 아롱은 이 도착(倒錯)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의 대표로 장폴 사르트르와 루이 알튀세르를 꼽는다. 더 구체적으로 살피자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를 위시한 실존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와 알튀세르를 위시한 구조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다. 이 두 철학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교조화됨으로써 오도된 것들을 바로잡아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갱신한다는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마르크스주의에만 입각하지 않고 외부적 이론, 가령 현상학 혹은 구조주의에 입각하여 두 이론을 결합한 형태로 이루어짐으로써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아닌, 마르크스주의를 닮은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 버렸다. 정확하게는 마르크스주의의 결론만을 가져와 문제의식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틀어버렸다. 그럼으로써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요청을 외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개인에 국한되는 문제로 한없이 축소시켰다. 이는 오히려 마르크스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이 마르크스라는 태양을 향해 날아들다 녹아버린 프랑스 지성계의 날개가 와도 같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한다는 좋은 의도를 억지로 이루려다가 마르크스주의를 떠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된 것이다. 이러한 비판점은 책의 제목에서 무엇보다 잘 드러난다. 역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책의 제목에서 “신성 가족”이라는 표현을 바우어 형제와 그 추종자들을 비꼬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책에서 바우어 형제와 그 일파, 곧 청년 헤겔 학파를 공격하면서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다. 이런 공격과 비판에 이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적 관점을 수호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청년 헤겔 학파에 속했던 바우어 형제와 그 추종자들, 곧 비판적 신학자들은 국가와 종교를 비판하긴 하지만, 그 비판이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관조와 이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실천 활동에 대한 부정 위에서만 이루어질 뿐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책의 제목에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는 표현을 넣었으며, 그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비판적 비판”만을 일삼았던 자들을 싸잡아 ‘신성 가족’이라고 조롱하듯이 지칭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아롱이 현상학적-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제시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그들의 주위에 있었던 실존주의자들과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확립한 알튀세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지칭하면서 “한 신성 가족에서 다른 신성 가족으로”라는 부제를 사용한 것은, 이 두 유형의 마르크스주의가 레닌-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즉 교조화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제대로 된 비판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어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 모순성을 갖고 있음에도 그 자체로 성역화되어 버린 두 집단에 대한 비판적 어조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순성이란 인간성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에 폭력의 수단을 허용하고 더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마르크스주의를 확립하고자 했음에도 자신의 이론 자체도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가졌음을 간과한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을 말한다.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실천을 외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무리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두 무리를 ‘신성 가족’이라고 지칭한 아롱의 반어는 상당히 예리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집단은 그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행하며 한 ‘신성 가족’에서 다른 ‘신성 가족’으로 이행했을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아롱 자신도 무엇이 바른 마르크스주의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밝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기에는 상당히 많은 도움을 준다. 이는 마치 오답을 분석함으로써 정답의 의미를 찾는 오답노트의 원리와 같다. 물론 아롱의 진단이 모두 옳다고 보증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 책 출간 이후에, 그러니까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의 후기 철학에 이르러 제시되는 그들의 논의는 아롱의 이와 같은 비판을 무색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롱의 진단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가 ‘왜곡’이라고 말하는 내용들 속에 무엇이 본래적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요소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프랑스 지성인이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답’들을 분석하는 방식은 많은 이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마르크스에 대해 새롭게 환기해 볼 만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아롱 특유의 명쾌하고 시원하되, 반어적으로 유쾌하게 진행되는 서술은 그가 단지 사회학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탁월한 저널리스트임을 잘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특정이 있다. 다만 때로는 거칠게 요약된 부분 또한 공존한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다만 이런 부분에 대해 옮긴이의 전문적이고 꼼꼼한 각주가 맥락을 잘 잡아 주어 아롱의 전체적인 논지를 폭넓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반드시 양쪽의 말을 다 들어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설명 또한 양편을 다 들어볼 필요는 있다. 많은 경우 진보계열에 의해 추앙받던 마르크스, 프랑스 우파 지식인이 말하는 방식을 아울러 살피는 일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과도하게 입혀졌던 과도한 군살을 벗겨 내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폭넑은 이해를 돕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선사하지는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