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시인의 말
1부 안개 주점 입동 무렵 눈 내리는 달빛 까페 낯선 개울의 저녁 그때 나는 그 새 가을 장마 배낭을 버렸다 정원 다시 자란만 어린魚鱗 적막한 취기 술時 혹은 戌時 일성록日省錄 2부 변명 폐가 비 오는 집 종대 언제나 겨울 꿈길 따뜻한 남쪽 나라 1 따뜻한 남쪽 나라 2 아름다운 숲 그 여름 낙과 노숙의 잠 1 노숙의 잠 2 노숙의 잠 3 노숙의 잠 4 3부 비밀 숲속 산책 경계 방 대작對酌 비오는 밤의 판화 입원기 전생 젤리를 작은 숲 24시 비 오는 날의 외출 열대야 이상한? 시월十月 4부 바다의 끝 지네 마지막 항해 비둘기 불량한 농업 백치의 비망록 그 섬에 그가 산다 종소리 영희 갈망조개 갈망개 그리운 참새 노송도 송담주와 더불어 한밤의 역설 작품 해설_ 심연의 혼, 그 적막한 비상/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
|
밤은 무엇이든 얼굴을 가려준다
한 겹씩 까만 안개 망사를 덧씌워 몇 덩어리 어둠과 술잔들만 남는다 눈도 귀도 없는 것들이 쨍그랑 서로를 건배하며 안개를 게워내 다시 밤을 덧칠하는 아름다운 공생共生 입자들의 끈적이는 오래된 육질의 안부를 들추거나 따로 노는 몇 가닥 혀를 날름대며 서로를 찌르거나 파편을 향해 몰래 자망질을 한다. 뜬금없는 밤이 겹겹의 그물코에 걸려 말라가는 비늘, 냄새로 반짝이고 반짝이는 소용돌이로 타올라 별이 되는 안개주점. 담배를 물고, 사라진 얼굴을 잠시 생각하지만 폐부를 돌아나간 연기는 허공의 그물에 갇혀 맴돌다 끝내 다시 동공에 물방울로 숨어든다 하느님 이것이 당신의 맨얼굴이던가 가려준 게 아니라 밤이 와서 되돌려준 원래의 쌍판들, 너울대며 허기를 달래줄 숙주를 찾아 허방을 떠도는 적막한 불빛을 데리고, 주점은 이슥토록 아름다울 것이다 ---「안개 주점」중에서 입동이 다가오자 잠이 쏟아졌다 발자국만 남기고 모두 떠나 허드레로 남은 숲에서 억새들이 잎을 말며 비워낸 허공을 기웃거리거나 손절할 품목들을 생각해야 했다 담배나 술잔 오래된 기억 속의 만년필 같은 것들 내가 버린 것들을 미립자의 몽유로 동화시키기 위해 땅은 내장에 무수한 칠흑의 융기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반역처럼 한 번 더 한파를 몰고 오는 하늘의 민낯이 보고 싶었다 뿌리의 집을 찾아 돌아가는 것들이나 졸음 겨운 땅 위에서 인내해야 하는 것들, 모두가 엄정하여 어둡거나 밝거나 분리된 선택지를 받아야 하는 시간 경적을 울리듯 일제히 어둠을 켜는 이파리들 아직도 버려야 할 무엇이 남았던가 애당초 혼자여서 비켜설 도리가 없는 나는 입동 너머 오는 하늘을 향해 그저 눈을 감는다 ---「입동 무렵」중에서 저녁 어스름을 두드리는 눈발은 쓸쓸하다 낮은 무덤 몇 개만이 추위를 젖 물린 산기슭 지친 입술을 닫고 잠들어 가는 빗돌 아래 떠돌던 망혼들도 미련을 풀고 있다 억새밭에 널린 바람의 잔영을 밟고 가는 눈발들이 흐려진 시야를 데리고 골짜기로 사라진다 어둠이 어둠에게 길을 묻는 시간의 늪지에서 맴돌던 겨울 저녁이 들판을 건너간다 지붕들 눈을 감고 낮게 몸을 열고 외등 빛에 길을 연 창들의 볼 위에나 모르는 뒤켠 어디 혼자 누운 잠 위에나 가림 없이 순한 입김을 덮는 하늘의 부호들 먼 산도 마을도 한 꿈에 안기면서 소멸과 생성의 그림자가 서로를 포옹한 채 말 없는 위안의 말을 체온으로 나누고 있다 겨울밤은 형상 위에 나지막이 한 켜를 얹고 바람이 흔적을 지운 위에 다시 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중에서 밤내 정원에 새 몇 마리 날아들었다 알듯 말듯 주고받는 둔탁한 홑소리들 비린내가 났다 가지를 내어준 서나무는 어두운 껍질로 자벌레를 가린 채 입을 닫고 있다 둥글고 작은 잎을 거듭 덮는 소리의 먼지들 별빛이 흩어주는 이슬이 겹겹 대기에 굴절되어 저기 또 저기만치 비켜서 내리고 혼돈한 긍정과 부정을 뒤채이며 시간은 한발치 머리 위 잔금이 되어 떨고 있다 하루치 안식을 찾아 분주한 바퀴들의 불빛 한 겹 담장으로 갈라섰을 뿐인데 정원은 어두운 물결에 뜬 외진 섬이 되어 흔들리고 있다 새들은 어디서 알 수 없는 연줄처럼 날아들어 고단한 심사에 쓸쓸한 덧칠을 하는 걸까 오래전에 잊은 달빛 대신 허공에 희멀건 외등 불을 끌까 생각했으나 이 밤, 흘러가는 시간의 주인은 내가 아니어서 새가 사라진 뒤 혼자 오는 적막을 기다리기로 한다 한번은 목 놓아 우는 빛줄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달빛 까페」중에서 |
|
시적 화자는 “나는 너무 많은 적막을 지나왔다”는 말로 자신의 현존과 그 현존에 따른 고통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은연중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의식적 사색의 힘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시적 화자도 감지했는지 “문양도 흔적도 지운 상처들이 한 햇살을 받으며/ 하늘의 경계를 지워가는 마지막 물목에 이르렀다.”고 표현하면서 “물방울에 갇힌 하늘이 풀려나가 저마다 바다를 이루는 곳.”이라는 득의의 경지로 나타난다. 작은 세계인 ‘물방울에 갇힌 하늘’은 외적 상황에 의해서든 내적 상황에 의해서든 그 스스로 만든 심연, 즉 마음의 감옥이다. 깨달음은 이러한 질곡의 상태를 깨뜨린다. 시구절에서 ‘풀려나가 저마다 바다를 이루는’ 내용이 바로 이것을 형상화한 것인데, 풀려남은 해방이자 초월이며, 진정한 세계로의 비약이라는 점에서 구원이다. 존재의 본질적 측면에 대한 감득을 통한 진정한 세계로의 감응, 곧 영적 존재로의 비상을 감지하게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실명이라는 병에 의해 발생한 ‘심연’은 이제 더 이상 이상원 시인에게 질곡이 아니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깊게 달성하게 만드는 도량이다. 그에 따라 이상원 시인은 “세상의 모든 길이 구부러져 있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백치의 비망록」)라는 역설적 혜안을 획득하고 있고, 오히려 심연의 적막에 대해 “지나가는 것들 다 지나간 뒤에 다시 낯선 한 평 적막으로 남으리라.”(「노송도」)라고 그 가치를 인정하여 소환하고 있다. 그 놀라운 반전에 접했을 때 문득 드는 생각, 우리 생애에서 심연을 본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될까? 고통의 극심한 바닥을 심연이라 부른다면 그 심연에서 유유하게 살아남고 비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매우 치열한 정신적 단련을 거친 고귀한 존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상원 시인은 “쉼 없이 교차하는 빛과 어둠의 소용돌이 심연에,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쌓아온 죽음 같은 고요를 보았다.”(「노송도」)라는 말을 언급함으로써 심연을 보았으며, 심연을 만들고, 그 심연에 기거하여 고통과 불안으로 영적 단련을 수행함으로써 혼의 구원을 이루어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비장한 존재의 승리이자 장엄한 혼의 기록이다. 심연에 빠진 외로운 한 영혼이 곤궁함 속에 본질을 깨우쳐 적막한 혼의 비상을 이루니 참으로 복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을 인식의 도약을 통해 깨닫는 자이자 영적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로 본다면, 이상원 시인이야말로 여기에 근본적으로 부합하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그러기에 더욱더 앞으로의 시작에 시인의 건투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동굴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작은 술잔 모든 빛이 돌아간 뒤에도 변함없는 이 간절한 동거 그래, 나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