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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서문 1장 ― 종결될 수 없는 사건 사라진 범인 영화보다 부조리한 현실 회색지대의 리얼리즘 한국 사회의 수렁에 빠진 장르 ‘봉준호’라는 현상 2장 ― ‘농촌 스릴러’의 결기 한국식 범죄드라마의 탄생 범인보다 어두운 시대 실패가 불러낸 질문 침묵하는 여성 3장 ― 죽음의 장소에서 유희하는 남성성 마주 보는 두 소년 수치심을 모르는 놀이 굴러떨어지는 남자들 냉혹한 자학, 우스갯소리의 송곳니 대답 없는 퀴즈 자기를 보지 못하는 얼굴 ‘본 자’의 말로 자멸하는 남성성 ‘부실한’ 남성성의 운명 4장 ― 눈을 뜬 여성들 살아남은 여자 죽음의 서스펜스 끝까지 뜬 눈 5장 ― ‘평범한’ 남성성의 얼굴 1986년과 2003년 사이 평범한 얼굴, 뼈저린 자기인식 주 참고문헌 크레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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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혔으나 잡히지 않은, 잡았으나 잡은 줄 몰랐던 범인. 허구 안에서도 이보다 더 부조리한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봉준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살인의 추억〉은 과연 태어날 수 있었을까.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살인의 추억〉이 재현한 한국 사회의 황당한 맥락들을 그보다 더 ‘영화적’으로 씁쓸하게 계승한다. 이를 주제로 〈살인의 추억〉 속편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 p.18 봉준호는 서사가 형사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설정만이 아니라, 그 시점이 국가기구의 무지와 폭압에 공모하는 장면 또한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전투경찰이 대학생들의 데모를 진압하는 광경, 여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줄지어 서서 대통령이 탄 차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단체로 교련 수업을 받는 모습, 민방위 사이렌에 마을의 불이 모두 꺼지는 상태 등 군부독재의 시간을 대변하는 집단적이며 강제적인 이미지가 논두렁에 발가벗겨진 채 널브러진 시체 장면 사이사이를 채운다. --- p.42 이 장면의 쾌감은 싸움과 놀이 사이에서, 혹은 그 둘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빚어진다. 〈살인의 추억〉은 ‘미끄러지는’ 남자들을 한심해하면서도 애틋하게 여긴다. 누명을 벗은 백광호가 다시 형사들 앞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그는 벌컥 열린 다락에서 굴러떨어진다. 봉준호에게 미끄러지는 행위는 존재의 유아적인 면모를 희극적으로 표상한다. --- p.64 또 다른 의미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박현규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다. 혼자 살며, 공장에 근무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에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신청하는 엽서를 자주 보내며 손의 감촉이 부드럽다는 사실 외에 그에 대해 주어진 정보는 없다. 그는 형사들의 가혹한 취조에 그리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어딘지 체념적인 구석이 있다. 그는 영화 속 다른 남자들과 여러 면에서 확연히 달라 보인다. 봉준호는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사슴 같은 눈망울과 예쁜 손을 가진 정체가 묘연한 캐릭터에 박해일을 염두에 두었다고 공공연하게 밝혀 왔다. --- p.80 영화는 다음 날 발견된 시신 장면에서도 김소현의 뜬 눈을 두 번이나 응시한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범인의 시점은 김소현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마지막까지 감지 않은 김소현의 눈은 서사 안에서 무엇도 보여 주지 못하고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이 설정은 너무도 잔인하다. 하지만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 소녀가 끝까지 ‘본다’는 사실을 직시하려는 이 시퀀스는 박두만과 서태윤의 무기력한 눈을 암울한 시대의 속성으로 체념하고 연민하려는 영화 자신의 유혹과 싸우는 것 같다. --- p.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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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범인을 찾아 헤매는 남성성의 세계
뛰어난 만듦새와 정치성을 지닌 작품답게, 이 영화는 개봉 직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쟁점을 낳고 있다. 평자들은 묻는다. 범죄스릴러가 한국 사회와 만나 장르의 쾌락을 무너뜨린 게 아니라, 더 원초적이고 강력한 ‘체념’의 쾌감에 복무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사건의 기반인 가부장제 구조를 지우고 침묵하는 여성 시체에 1980년대 한국사회라는 역사적 맥락을 채워 넣은 “왜곡된 남성 무용담”은 아닌가. 여성의 시신은 널려 있지만, 여성의 언어는 부재하지 않는가. 봉준호는 서투른 해결보다 모든 걸 다 드러내서 세계 자체가 미쳐 있다는 것을 싸늘하게 말하는 방식을 택한 것일까. 저자는 [살인의 추억]을 둘러싼 기존의 다양한 논의를 정리하는 한편 때로 그 견해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 영화에서 새롭게 발견한 성취를 주목한다. [살인의 추억]이 날카롭게 주시하는 방향은 여성을 구하지 못한 남성의 죄의식이 아니라, 구할 수 ‘없는’ 남성성의 모순과 궁지라고. 영화 결말 속 스크린 바깥을 응시하는 송강호 얼굴 클로즈업은 회한이나 후회, 공포나 불안의 감정보다 무지로 살아남은 남성성의 힘으로 진동한다고. 에필로그 속 소녀가 언급한 얼굴의 '평범함'은 가부장제에서 소위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남성성 일반을 겨냥하며, 영화 속 형사들과 어딘가에 존재할 범인 모두를 포괄하는 게 아니냐고. 이보다 매서운 자기인식이 어디 있느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