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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봄호 | VOL. 53
특집 | 자해 그리고 자살 001 Care in Progress _ Sarah Navan 012 At Least Until The World Stops Going Round _ Charlie Tallott 030 Now is Not the Right Time _ Peter Pflügler 044 Uma Azeitona Bordada em Azul _ Rui Costa 056 After _ Martin Kollar 070 The Unforgetting _ Peter Watkins 084 How is life? _ Hannes Jung 098 Las flores mueren dos veces _ Cristóbal Ascencio 112 The Suicide Boom _ Kenji Chiga 127 생일날 손목을 긋는 그에게 _ 박지수 145 보여지는 고통 _ 임민경 150 상처 입었으나 빛나는 별 _ 정혜윤 155 나는 자살한 사람을 봤다 _ 남궁인 160 낭만적인 자살은 없다 _ 이예지 165 자해상 _ 김신식 170 [연재 _ 영화의 장소들] 정치적인 것의 장소 _ 유운성 177 [연재 _ 일시 정지] 사진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_ 서동진 184 [에디터스 레터] 콜론의 의미를 필터 삼아 _ 박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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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두 살 때,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숲속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20년 넘게 그의 자살 시도에 관해서 침묵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끌리기 시작했고, 기일이 돌아오면 알 수 없는 슬픔의 물결이 저를 감싸기도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가족들은 마침내 제게 말하기로 결심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피터 플뤼글러, 작가 노트」 중에서 다시 사진 속의 앙상한 팔을 바라본다. 여전히 새빨간 피가 흐른다. 아무리 바라봐도 결코 생일날 스스로 자신의 팔을 칼로 긋는 이유를 들을 수는 없다. 당연히 그 사진은 그들이 왜 자해하는지 말해줄 수 없고, 다만 자해하는 그들이 있다는 사실만 보여줄 뿐이다. 이제야 나는 뉴스와 신문에서 접했던 추상적이고 집합적인 개념의 ‘자해하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생일을 자축하며 칼을 손에 쥔, 구체적이고 유일한 존재를 바라보게 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없이 그가 존재하고, 그가 자해를 하고, 그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오롯이 보게 된다. ---p.141 「박지수, [생일날 손목을 긋는 그에게]」 중에서 이미지를 차단하거나 삭제하는 것만으로는 고통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이 이미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응답받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자해 이미지를 둘러싼 난감함은 결국 우리 사회가 고통을 어떻게 듣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자해이미지를 마주한 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지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필요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미지는 증상이다. 우리는 그 이전의 고통을 보아야 한다. ---p.149 「임민경, [보여지는 고통]」 중에서 “엄마!”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목소리 안에 사랑이 가득하다. 정말 깊은 사랑. 그리고 너무 순수했다. 이 순수한 마음이 깊게 상처를 입은 곳이다. 내일이면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아이가 느끼는 뜨거운 사랑과 슬픔, 눈물을 잊을 수는 없다. 재현이가 느꼈을 외로움, 죄책감, 그리움, 분노, 체념, 수없이 상상했을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재현이 엄마 같은 사람들, 진실을 알고 싶어 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사람들만이 유일한 한줄기 빛이다. 재현이가 많은 사람의 ‘가슴에 존재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마치 상처 입었으나 빛나는 별처럼.... ---p.154 「정혜윤, [상처 입었으나 빛나는 별]」 중에서 마지막으로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그는 노년에 대해 이렇게 썼다. “Old age isn't a battle. Old age is a massacre.”(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대학살이다.) 나는 이 문장을 바꾸어 쓴다. 이 나라에서 매일 40.7명이 죽는다. 자살은 전투가 아니다. 대학살이다. 이 죽음들은 엄연히 통계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실존한다. 다만 나는 그것을 목격하고 느꼈으므로 이렇게 쓴다. ---p.159 「남궁인, [나는 자살한 사람을 봤다]」 중에서 죽음 충동과 자해의 고통이 예술의 재료 혹은 경유지가 될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 그 자체는 예술이 아니다. 벌어진 피부와 근육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피, 목을 매거나 추락하거나 물에 불어 엉망이 된 몸.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상처고, 그냥 시체다. (…) 아무리 예술과 음악과 문학과 어떠한 미사여구를 덧붙여 미화하더라도, 자살 뒤엔 구조가 있다. 자살자들이 오지선다의 문제지에 오직 그 선택지밖에 없는 답지를 받아 들게 한 트리거가 있다. 세계와 구조, 관계와 환경과 무관하게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만으로 ‘무’로 돌아감을 선택하는 자는 없다. (…) 그러므로 그것은 낭만이 아니다. 나는 자살의 신화화에 반대한다. ---p.164 「이예지, [낭만적인 자살은 없다]」 중에서 필립 뒤봐의 사유처럼 사진이 사진으로 기록하는 이와 사진을 감상하는 이를 ‘존재의 흔적’이란 지점으로 연루시킨다면, 나는 빛의 낙인으로 연결되는 사진 찍는 이와 사진 감상자의 관계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사진 찍는 이가 사진 감상자가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한 상황에서, 우리 각자는 사진-하기를 통해 타인에게 또 나 자신에게 자국을 남긴다. 이 자국은 타인과 나의 정신이 반영된 자국이며, 사진은 이를 확인하는 체험이다. 좀 더 과감해지자면, 사진은 당신과 나의 육체와 정신에 접촉하여 당신 자신과 나 자신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고, 묘하게도 바로 이 점은 삶에서 제거하고 싶은 행위가 아니라 고통과 쾌락이 병존하는 순간으로 다가온다. ---p.169 「김신식, [자해상]」 중에서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복합적이면서 생리적으로 박력 있는 액션영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한때 액션영화의 거장들은 정치적인 것의 자리를 직접적으로 영화 내부에 두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인 것을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하게 활성화하곤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영화의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 별다른 정치성을 띠지 않은 서사로 전개되는 영화가, 혹은 대단히 보수적이거나 심지어 파시즘적인 서사로 전개되는 영화가 놀랄 만큼 상황의 짜임을 복합적으로 환기하는 정치적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영화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리는 작품 내부에 있지 않고 스크린과 객석 사이에 있다. 이때 스크린은 정치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기호가 되는 대신 그 앞에 앉아 있는 관객을 정치적으로 자극하는 공명기가 된다. ---p.172 「유윤성, [정치적인 것의 장소]」 중에서 수십 년간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미술을 장악한 헤게모니적 미술이 어떤 위장도 없이 적나라하게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현대미술을 개시하는 일이 글로벌 미술 제도와 장치의 일부가 되는 것,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자신의 예술적 실천의 방향을 가늠하기보다는 동시대 글로벌 미술의 방향타에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조정하는 것,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이 마침내 억압되고 글로벌한 형식의 자율성을 신속히 습득하고 체화하는 것, 그것이 아마 오늘날 동시대 미술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미술이란 것의 주소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어떻게 미술이 되는가 따위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사진이 미술이 되도록 매개하는 신비의 묘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동시대 미술을 규정하는 논리가 모든 매체에 미술로서의 인장(印章)을 지긋이 눌러줄 것이기 때문이다. ---p.183 「서동진, [사진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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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판단하지 않고
충분히 바라보는 일에 관해서 우리는 무심코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저울로 잰다. 그렇게 아파할 만한 고통인가, 저렇게 소리칠 만큼의 슬픔인가. 일정한 무게에 미달한다면 그럴 자격이 없다는 듯이…. 계체량을 통과한 고통과 슬픔은 이제 또 다른 심사를 기다린다. 이 고통의 원인은 납득할 만한가, 그 슬픔의 이유는 수긍할 만한가. 상식적인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함께 아파하거나 슬퍼하기에는 곤란하다는 듯이…. 이번 호의 특집으로 다루는 ‘자해’와 ‘자살’이라는 키워드 앞에서도 나쁜 버릇처럼 계속 저울질하고 이치를 따진다. 얼마나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지녔기에 스스로 자신을 해칠까.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걸까. 이러한 의문 속에는 이미 죽음보다는 삶의 의미가 더 중요하고, 자기 파괴보다는 자기 보호가 더 합당하다는 전제가 담겨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러한 전제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삶보다는 죽음의 의미가 더 무겁고, 자기 보호보다는 자기 파괴가 더 이치에 맞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어느 가치가 더 중요한지, 어떤 선택이 더 옳은지 저울질하고, 이치를 따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자해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호 특집 ‘자해 그리고 자살’에서는 모호한 관념이나 피상적인 숫자가 아닌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환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자해와 자살을 주제로 다루면서 어떤 이가 지나온 생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 작업을 소개한다. 그리고 정혜윤, 남궁인, 이예지, 임민경, 김신식 등의 필자가 쓴 에세이를 통해 ‘자해와 자살’이라는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시선과 태도를 함께 고민해 본다. 이러한 사진과 글을 천천히 바라보고 읽으면, 우리가 막연하게 품었던 자해와 자살에 관련된 생각과 표상이 얼마나 납작하고 무지한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그것에 관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과정이 아닐까. 그래야만 자신만의 기준을 내세워 섣불리 저울질하거나 함부로 이치를 따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과연 그렇게 미리 판단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까?’ 이번 호를 만들면서 독자들에게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이다. 충분히 바라보기 전에 판단을 내리지 않는 일이야말로 카메라와 사진이 지닌 가장 큰 역량일지도 모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