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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겨울호 | VOL. 52
특집 | 미지의 하루 001 Reverie _ Jin Yoshimura 012 On Stillness _ Anke Loots 034 여자와 남자는 서로 신성함으로 이끈다 _ 안옥현 050 Be 누(累) _ 신수와 066 돌아오는 길에 다 얘기해줘 _ 이슬아 072 내 삶에도 형체라는 것이 _ 천선란 078 기쁜 하루 _ 정보라 084 「기지(旣知)를 구독합니다」의 시놉시스에 관하여 _ 구병모 090 내가 관측한 하루 _ 김보영 096 [연재: 일시 정지] 아카이브 속의 사진은 어떻게 역사를 숨기는가 (2) _ 서동진 106 Above Us the Day _ Robert Ormerod 118 2021 ± II: Utopia Broadcasting _ Serena Ho 130 Medicine+ _ Aristidis Schnelzer 142 What About the Heart? _ Luisa Whitton 156 Non Technological Devices _ Chloe Azzopardi 170 Dream Moons _ Yurian Quintanas Nobel 184 [에디터스 레터] 물러섬과 다다감 _ 박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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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지도 도착지도 존재할 수 없는 이 여행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만날지, 무엇을 느낄지, 무엇을 남길 수 있을지 모두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뿐이다. 다만, 이 여정은 남들에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자기만의 리얼리티를 시각화하려는 의지를 따라가는 시간인 셈이다. 존 사코우스키는 “예술가란 삶의 실재에 대한 자신의 감각을 가지런히 해주고 단순화시켜주는, 새로운 구조물을 찾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안케 루츠의 여행은 ‘자신의 감각’과 동기화되는 ‘새로운 구조물’을 대면하는 과정일 것이다.
--- p.17 「안케 루츠의 스틸네스」 중에서 장지로 향하는 길에 운구차에서 담이가 쭉 겪은 작별은 내가 진입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담과 안의 아주 사적인 시간이다. 같은 일을 겪기 전엔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장례 셋째 날의 시간. 그래서 담이는 돌아와도 나에게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슬아가 똑 닮은 일을 겪는 날에 말해줄 수 있으려나 짐작만 했을 것이다. 담이가 먼저 겪은 그 미래를 난 모른다. 안의 영정 사진을 안고 조수석에 앉아 강릉으로 향했을 담이의 마음도 진짜로는 모른다. 미지의 하루를 먼저 겪은 담이의 표정만을 안다. 담이가 안의 사진을 껴안고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만을 안다. --- p.72 이슬아, 「돌아오는 길에 다 얘기해줘」 중에서 나는 이제야 내 삶에도 형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체가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두려움이라는 마음이 본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형체가 없는 내 삶이 언제나 두려웠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고작 형체 찾기이면 된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자기 삶의 형체만 있다면 모든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사회가 개인의 형체를 빼앗아 가고 있다는 것도. 나의 존재가 뚜렷해져야 우리는 선명한 내일과 미래를 그린다. --- p.77 천선란, 「내 삶에도 형체라는 것이」 중에서 만약에, 만약에 내란이 성공했다면. 이런 두려움이 여전히 가끔씩 고개를 든다. 내란 사건 재판도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뉴스를 보면 또 불안해진다. 그럴 때면 옵티칼 공장에 생수를 보낸다. 명동 세종호텔 앞에서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고공농성하는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을 보러 간다. 퀴어문화축제에 가서 행진을 한다. 전장연 지하철 선전전에 간다. 불안할 때마다 내가 존경하는 동지들이 모두 살아있고 (감옥에 끌려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고 투쟁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러 간다. 그러면 나도 살아있고 자유롭고 투쟁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다. 연대는 생존이다. 낯선 세상을 헤쳐나갈 방법은 이것뿐이다. --- p.82 정보라, 「기쁜 하루」 중에서 각성한 사람들은 기지(旣知)를 거부하고 인간적이며 실수도 많은 미지의 아름다움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지만 불안 사이로 실금처럼 그어진 한줄기의 위안에 서로의 존재를 의지하고 플랫폼이 집어삼킨 데이터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인간의 내일은 계측과 예측에서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연대의 의지를 다질 것이다. --- p.88 구병모, 「「기지(旣知)를 구독합니다」의 시놉시스에 관하여」 중에서 흔히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사진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거론한다. 이는 사진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시각언어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사진이 다른 시각언어를 매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이 취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기 위해서나 개인의 삶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태도를 읽기 위해서나 사진에 의지한다. 사진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힘을 지닌 시각언어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콘서트에서 스타 뮤지션이 출현할 때, 미술관에서 낯선 작품을 마주할 때, 집회에서 연사가 등장할 때, 거의 약속이나 한 듯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마치 사진을 통해 보는 것이 그것에 관한 진정한 경험을 보증한다는 듯이 말이다. --- p.97 서동진, 「아카이브 속의 사진은 어떻게 역사를 숨기는가 (2)」 중에서 몰래 가까이에서 찍은 제 사진을 더 이상 뿌듯해하거나 만족스럽게 여길 수 없었습니다.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몰래 찍은 것도, 가까이 다가선 것도, 뿌듯함과 만족감을 느낀 것도 상대방의 상황이나 의중과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그건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일이 아니라, 결국 제 마음대로 이미지를 가지려는 욕망에 다가가는 일이었습니다. --- p.184 박지수, 「물러섬과 다가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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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풍경에서 예감하는 내일의 기분
카메라를 통해 천천히 오래 바라보면 익숙한 대상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할 때가 있다. 원래 이런 모양이었던가, 이런 색이었던가. 매일 마주해서 오히려 무뎌진 감각을 카메라가 일깨워준다. 본다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애써 바라볼 때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고. 혹시 평소에 놓쳤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계속 바라보게 되면 보이지 않았던 것도 드러나게 된다. 너는 옛날에 참 빛나는 모습이었겠구나, 꽤 오랫동안 이곳에 홀로 있었네. 비록 카메라는 오늘 여기를 향하고 있지만, 뷰파인더를 거친 눈길은 어렴풋한 어제 거기를 더듬는다. 다음에 만날 때 너는 다른 모습이겠구나,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르겠네. 이제 바라봄은 내일 저기까지 가닿게 된다. 때로 사진가들은 우리가 이미 안다고 여겼던 대상들, 충분히 보았다고 여길 만한 세상을 시각적으로 새롭게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의 풍경 속에서 어제를 짐작게 하는 순간들, 내일을 예감하는 장면들을 예민하게 포착해 제시하기도 한다. 특집 ‘미지의 하루’에서는 평범한 오늘을 낯설고 신비롭게 보여주거나, 다가올 내일을 상상하는 사진가들의 시선과 감각을 만날 수 있는 이미지들을 모았다. 그리고 ‘미지의 하루’라는 키워드로 쓴 엽편소설과 에세이를 수록했다. 구병모, 김보영, 이슬아, 정보라, 천선란 등 필자들은 자신에게 찾아오길 바라는 하루가 어떤 모습인지, 그런 내일을 상상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무엇인지 각자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러한 사진과 글을 통해 매일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오늘 속에도 깃들어 있을지 모르는 새로운 발견과 내일의 기분을 놓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