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데미안〉
제1장 두 세계 • 13 제2장 카인 • 43 제3장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 • 73 제4장 베아트리체 • 103 제5장 새는 몸부림치며 알을 깨고 나온다 • 137 제6장 야곱의 씨름 • 165 제7장 에바 부인 • 201 제8장 종말의 시작 • 239 〈도슨트 서영채와 함께 읽는 『데미안』〉 참호전의 사상, 반-성장의 윤리 • 7 1. 탁월한 성장소설, 『데미안』 • 7 2. 성장과 반-성장 • 8 3. 성장의 첫 단계로서의 분리 • 13 4. 데미안, 데몬, 다이몬 • 20 5. 세 개의 그림, 아브락사스 • 28 6. 참호전의 사상 1: 하이데거, 헤세, 루카치 • 35 7. 참호전의 사상 2: 전혜린, 김윤식, 『데미안』 • 45 8. 절대적 자아주의, 반-성장의 죽음충동 • 56 |
Hermann Hesse
헤르만 헤세의 다른 상품
서영채의 다른 상품
권혁준의 다른 상품
|
내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내 젖은 신발만 탓했고, 그것이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에 주의를 뺏기느라 아버지는 더 나쁜 일은 알아차리지 못했고, 나는 아버지의 꾸지람을 속으로는 은밀히 다른 것과 연관시키면서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서 기이하고 새로운 감정, 신랄함이 가득한 사악하고 예리한 감정이 일어났다. 나 자신이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낀 것이다.
--- p.30 데미안의 진짜 모습은 바로 저 모습이다. 돌처럼 굳은 상태에 있고, 아주 나이가 많고, 동물적인 모습이고, 암석 같고, 아름다우면서도 차갑고, 죽은 것 같으면서도 전대미문의 생명으로 은밀하게 가득 차 있는 저 모습이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이 적막한 공허함, 이 창공과 별들의 공간, 이 고독한 죽음! --- p.99 나는 빛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림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서서히 그 얼굴은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은 실제로는 나와 닮은 구석이 없었고,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삶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 나의 내면, 나의 운명 혹은 나의 다이몬이었다. --- pp.125-126 삶과 죽음, 성장과 반-성장이 뒤엉켜 있는 『데미안』의 독특함은 헤세의 세대가 겪은 제1차 세계대전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참호전의 사상으로부터 나옵니다. 불패의 근대성이 구겨지고 접히는 곳에서 생겨난 참호전의 사상은 근대성의 가장 현저한 증상에 해당하는데, 그 위에 얹혀 있는 『데미안』이라는 소설은 근대적 사유의 비틀린 핵심으로 가는 통로 역할을 하죠. --- pp.7-8 「해설」 중에서 싱클레어가 그린 그림 속에서 이들 세 인물은 서로 겹칩니다. 에바 부인의 얼굴에는 데미안이 있고, 이 둘의 얼굴이 겹치는 곳에서는 싱클레어 자신의 얼굴이 솟아오르죠. 이런 점에서, 소설 속 세 인물은 물론 별개의 인물들이지만, 소설 전체의 서사적 위상으로 보자면 동일인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데미안을 향한 싱클레어의 동경은 자아 이상에 대한 동경에 다름 아니고, 에바 부인을 향한 싱클레어의 사랑은 전형적인 나르시시즘에 해당합니다. 『데미안』에서 죽음충동의 작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점 때문입니다. --- p.20 「해설」 중에서 한국에서 『데미안』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위상 역시 이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강렬한 형태의 동경과 초탈에의 의지입니다. 신비주의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세상 바깥을 향한 동경과 의지의 강렬함이 곧 아이러니에 해당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헤세의 신비주의는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 참호전의 사상 앞에 놓인 등가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 p.45 「해설」 중에서 전혜린이 헤세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다면, 김윤식은 루카치의 선택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전혜린은 헤세의 신비주의가 있던 자리를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로 채워 넣었고, 냉전 시대 분단국가의 공무원이었던 김윤식은 루카치가 선택한 마르크스주의 대신에 좀 더 폭넓은 네이션스테이트의 사상을 향해 나아갔죠. 그런 김윤식에게 헤세의 『데미안』은 어떻게 보였을까. --- p.55 「해설」 중에서 문학적 근대성의 핵심에서 움직이는 것은 죽음충동이되, 『데미안』의 경우 죽음충동이란 밝은 삶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어두운 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 자체를 감싸고 있는 좀 더 거대한 힘으로서의 죽음, 개체들을 피 흘리게 만드는 날 선 삶의 기운들 바깥에서 그 거센 힘들을 품어 안는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으로서의 죽음, 에피쿠로스적 우주의 쾌활함이 발견해 낸 맑고 밝은 힘으로서의 죽음입니다. --- p.62 「해설」 중에서 |
|
하나의 자아는 존재할 수 있는가
참호 속에서 건져 올린 카인의 표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단숨에 도약하는 새는 오로지 환각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도슨트 서영채의 해설 중에서 문학 + 철학으로 이루는, 나의 삶과 세계 경험의 확장!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10: 헤르만 헤세, 『데미안』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열 번째 권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그런데 흔히 기대하는 것처럼 『데미안』은 과연 성장소설일까? 이 작품은 성숙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라기보다, 하나의 자아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그 균열 속에서 흔들리는 존재의 불안과 분열을 집요하게 추적한 텍스트에 가깝다. 도슨트 서영채는 『데미안』을 ‘성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근대적 자아가 더 이상 통일된 형태로 유지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문제적 텍스트로 재독해한다. 문학 텍스트를 시대의 균열 속에서 읽어 내는 이러한 접근은, 『데미안』을 자기 계발적 성장담으로 소비해 온 기존의 독법을 재고하게 만든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모든 질문은 결국 ‘나의 삶’으로 수렴된다 문학은 우리가 살지 않은 삶을 경험케 하고, 만나지 못한 인물을 만나게 하며, 겪지 못한 일을 체험케 한다. 문학이라는 세계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온갖 정보와 소음 속에서 더욱 왜소해질 것이다. 문학의 세계는, 현실과 개인의 삶 사이의 완충지대가 될 뿐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틈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문학만의 특별한 상징과 비유는 독자들을 종종 난관에 빠뜨린다. 그리하여 작품은 표면적으로만 이해되거나 읽기가 애초에 포기되기도 한다. 이에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이 기획되었다. 철학과 인문학자의 시각을 빌려 세계문학의 고전을 읽는다면, 그리하여 저마다의 읽기가 수없이 많은 갈래를 만든다면, 거기서 수없이 많은 세계가 생겨날 것일 터이므로. 종종 해설은 문학에 딸린 부록으로 취급되지만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의 해설은 다르다. 그 자체로 한 권의 책과 같은 가치가 있다. 문학 고전을 처음 읽는 독자들, 자신만의 사유를 개척하려는 독자들을 위한 중요한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표지를 앞표지처럼 구성하여 해설을 첫 페이지처럼 읽게 했다. 문학과 맞물린 사유의 긴밀함을 표현한 것이다. “새는 몸부림치며 알을 깨고 나온다” 탄생인가, 파괴인가 『데미안』은 두 개의 세계로 시작한다. 질서와 도덕, 사랑과 규범이 지배하는 밝은 세계와, 욕망과 유혹, 혼돈과 공포의 기운이 뒤엉킨 어두운 세계. 싱클레어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이 소설의 긴장은 바로 이 경계에서 발생한다. 하나의 세계에 머무르려 할수록 다른 세계는 더 강하게 침투하고, 자아는 점점 더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상태로 밀려난다. 이때 두 세계는 단순히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부에서 서로를 잠식하며 충돌한다. 서영채는 이 지점을 ‘참호전의 사상’이라는 관점에서 읽어 내며, 『데미안』을 내면의 전장이자 사유의 충돌이 벌어지는 장으로 재배치한다. 자아는 더 이상 하나의 중심으로 통합되지 않으며, 오히려 균열과 긴장 속에서만 유지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된다. 하나의 온전한 자아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애초에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한 것인가. 참호전의 진흙과 절대적 고독, 『데미안』을 읽는 새로운 가능성 『데미안』은 과연 성장소설일까요. 한 개인이 성숙을 거쳐 세계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성장소설이라면, 왜 이 소설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화해나 통합이 아니라 참호전의 진흙과 절대적 고독일까요. 이 역설적 서사가 남기는 균열이야말로, 『데미안』이 세대를 넘어 읽혀 온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해설 6쪽) 서영채의 해설은 『데미안』을 특정한 의미로 환원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와 루카치 등 20세기 사상과의 연관 속에서 작품을 재배치하며, 그것이 단순한 문학 텍스트가 아닌 시대의 사유와 긴밀히 얽힌 하나의 ‘지적 사건’임을 드러낸다. 전쟁 이후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흔들린 자리에서, 『데미안』은 더 이상 성장이나 완성의 서사로 읽힐 수 없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사유들이 충돌하며 생성된, 불안정한 사유의 형식으로 남는다.이러한 사유의 지형은 한국 문학장 안에서도 나타났다. 전혜린에게 『데미안』은 초탈을 향한 강한 의지를 촉발하는 텍스트였고, 김윤식에게는 시대와 사상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문학적 사건이었다. 이 대비는 『데미안』 자체의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문학을 읽어 온 방식의 차이를 돌아보게 한다. 도슨트 서영채가 참호 속에서 건져 올린 카인의 표지는 우리가 알고 있던 『데미안』을 그와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