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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새 두 마리
그 골목은 몹시도 가팔랐다. 아버지는 그 골목에 들어서기만 하면 미리 저만치 앞에서부터 마차를 세게 몰아가지고는 그 힘으로 하여 단숨에 올라가곤 했다. 그러나 이 작전이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더러는 마차가 언덕의 중간쯤에서 더 올라가지를 못하고 주춤거릴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이마에 심줄을 잔뜩 돋우며, “이랴, 이랴!” 하면서 노새의 잔등을 손에 휘감고 있는 긴 고삐 줄로 세 번 네 번 후려쳤다. 노새는 그럴 때마다 뒷다리를 바득바득 바둥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듯했으나, 그쯤 되면 마차가 슬슬 아래쪽으로 미끄러내리기는 할망정 조금씩이라도 올라가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마차에 연탄을 많이 실었을 때와 적게 실었을 때에도 차이는 있었다. 적게 실었을 때는 그깟 것 달랑달랑 단숨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런 때는 드물고 대개는 짐을 가득가득 싣고 다녔다. 가득 실으면 대충 오백 장에서 육백 장까지 실었는데, 아버지는 그래야만 다소 신명이 나지 이백 장이나 삼백 장 같은 것은 처음부터 성이 안 차는 눈치였으며, 백 장쯤은 누가 부탁도 안 할뿐더러 아버지도 아예 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 p.28-29 도시의 비탈길, 그 위에서 미끄러진 아버지의 초상 도시화의 두 얼굴과 불안한 생계 최일남의 「노새 두 마리」(1974)는 도시화가 빨라지던 1970년대 서울 변두리를 배경으로, 변화에 밀려나는 도시 서민의 삶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그린 작품이다. 2층 슬라브집과 문화주택이 들어서고 자동차와 삼륜차가 늘어나는 동안, 아버지는 여전히 노새가 끄는 마차로 연탄을 나른다. 새동네의 등장은 연탄 주문을 늘려 아버지에게 일감을 주지만, 새로운 운송 수단은 그의 낡은 노동 방식을 점차 밀어낸다. 작가는 이처럼 도시 개발이 가져온 편리함과 그 과정에서 생겨난 소외를 함께 보여 주며, 눈부신 성장 뒤에서 불안한 생계를 이어 가야 했던 사람들의 고단함을 차분하게 비춘다. 구동네와 새동네, 맞닿고도 갈라진 삶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구동네와 2층 슬라브집과 문화주택이 들어선 새동네는 같은 도시 안의 생활 격차를 눈에 보이게 만든다. 새동네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구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지만, 노새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연탄도 주문한다. 이처럼 두 공간은 맞닿아 있으면서도 생활과 관계에서 뚜렷이 갈린다. 그 경계에 놓인 가파른 언덕은 아버지가 매일 몸으로 넘어야 하는 노동의 자리다. 따라서 언덕은 도시의 변화가 가난한 노동자에게 지운 무거운 부담과 불안한 생계를 함께 드러내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 p.24-25 서울 사람들 내가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두 시 이십 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오늘사 말고 회사에 바쁜 일이 있어서, 여느 토요일보다 늦게 회사를 나온 후 단골로 다니는 중국집에 들러 후다닥 짜장면을 먹어 치우곤 이내 택시를 몰았다. 그랬는데도 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 일행은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에 모이기로 한 시간이 두 시 반이니까 약속한 시간까지는 칠팔 분이 남았으므로 그럴 법도 한 일이지만, 그래도 일행 네 사람 중 나밖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소 의외이다 싶었다. 흔히 몇 사람이 다방이든 거리든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놓고, 막상 현장에 닿았을 때 다만 한 사람이라도 먼저 와 있는 사람을 만나면 모를까, 자기가 맨 먼저 와 있을 때는 내가 시간을 잘못 안 것이 아닐까, 내가 장소를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는데, 지금의 내가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물론 그만그만한 장소에, 비슷비슷한 이름으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번화가의 다방이 아니라, 서울에도 몇 군데 없는 시외버스 터미널이고, 그만큼 단단히 약속한 터이어서 설마 일이 틀어질 리는 없겠지 하면서도, 혹시 한두 사람이 갑작스런 사정으로 못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객적은 걱정이 잠깐 스치기도 하였다. --- p.79-80 잃어버린 고향과 도시인의 비극 ‘서울 사람’이라는 역설적 명명 최일남의 「서울 사람들」(1975)은 산업화 시대 중산층의 내면을 정밀하게 포착한 작품으로, 제목부터 강한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소설 속 화자 ‘나’와 친구들은 모두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 정착한 이른바 ‘성공한 촌놈들’이지만, 겉으로는 서울 시민의 외양을 갖추었을 뿐 정서적으로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에 가깝다. 최일남은 이들을 ‘서울 사람’이라 명명함으로써, 서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곧 정체성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드러내고, 고향을 상실한 채 도시의 톱니바퀴로 편입된 현대인의 혼란과 공허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단순한 귀향 서사가 아니라, 산업화 과정에서 뿌리 뽑힌 자들이 스스로를 비추어 보게 되는 슬픈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 p.74-75 흐르는 북 “나가시게요?” 일당을 주고 불러온 요리 전문의 파출부와 함께, 오렌지빛 고무장갑을 낀 채 잰걸음으로 주방 안을 헤엄쳐 다니던 며느리는, 현관 앞에서 구두를 찾고 있는 민 노인 쪽을 향해 빠르지도 처지지도 않게 말했다. 비스듬히 몸만 돌렸을 뿐, 한눈팔다간 썰고 있는 전복의 두께가 들쭉날쭉하게 될까 봐, 시선을 도마 위에 못질해 두고 입만 달싹거린 셈이었다. “응. 좀 볼일이 있어서.” 칠십 노인의 해질녘 외출에 대해, 그러나 며느리 송 여사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암호 풀이의 명수들처럼, 아 하면 어 하는 관습에 익숙해진 터여서, 굳이 가는 데는 밝힐 것도 자상하게 수소문할 것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전혀 감정의 높낮이가 개입되지 않은 예사스런 격식을 갖추려는 가까스로의 노력이, 피차간에 잠깐 오갔다고 보면 될 일이었다. “조금만요.” 송 여사는 여전히 물기 없는 건조한 어투로, 시아버지를 후딱 묶어놓은 다음 안방으로 들어갔다. 며느리의 뜻을 아는 민 노인이, 그녀의 뒷모양을 쫓던 눈에 잔망스럽게도 웃음을 비죽이 내비치는 순간 하필이면 파출부가 자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무심한 얼굴로 되돌아갔을 때쯤, 송 여사는 나왔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 p.126-127 단절된 벽을 두드리는 혼의 공명 세대 간의 불화와 가치관의 충돌 최일남의 「흐르는 북」(1986)은 198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삼대(三代)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전근대적 예인 기질을 지닌 할아버지 민 노인,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아들 민대찬, 그리고 민중 문화와 저항 정신을 추구하는 손자 성규는 각기 다른 시대의 가치관을 보여 주지만, 본문에서 중심 갈등은 민 노인과 민대찬 사이에 놓이고 성규는 후반부에 다른 가치관을 드러내며 세대 간 대립을 한층 확장한다. 작가는 전통적 상징물인 ‘북’을 매개로 삼아 서로 다른 삶의 태도와 세계관이 어떻게 불화하고 대립하는지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심화되는 가족 해체의 위기와 세대 간 단절의 문제를 한 가족의 역사 속에서 더욱 깊이 있게 탐색한다. --- p.122-123 은장도와 트럼펫 정님이한테만, 아--- p.나는 수탉이었다. 가고지고 가고지고 가고지고 가고지고, 부르고 싶은 영가가 정님이한테는 있다. 그동안 참아준 정님이가 하긴 용타. 갈 테면 가라지, 할 때는 엉덩이 들이밀며 눌러앉더니, 이제 와서 나를 어쩔 셈인구. 사내라고 엉엉 못 울 것도 없지. 다만 울지는 않을란다. 정님이한테만은 수탉이고 싶다. 맨드라미꽃 벼슬 정수리에 달고 서슬 퍼렇게 숫내 피울 수만 있다면 마냥 죽어도 좋지 뭐. 하지만 아하, 떠나려는 게로군. 조금 아까 창틀을 타고 앉아 트럼펫을 불 때 정님이가 그랬다. “나, 정신 시끌시끌헝께, 자기 나팔 좀 그만 불래?” “왜? 트럼펫 소리 안 듣구?” “듣고 싶긴 하지만.” 트럼펫은 내 자랑스런 남성이다. 내가 수탉이고 싶을 때, 그녀 앞에서 나는 트럼펫을 분다. 창틀을 타고 앉아 트럼펫을 불면 별이 온통 모래처럼 사각거린다. 닭전머리 미화 이발관께서 살 때도 정님이가 그랬다. “우리 이사 가자아.” 사내자식 둘이서 동성연애라도 하는 것 같아 뵈는 이발사 그 밥맛없게 생긴 새끼가 ‘댁의 쥔양반은 아마 밤무대에 나댕기나 부죠, 그쵸?’라고 불었다던 그날 밤이다. “어디로 간다?” “그냥 철다리 밑으로나 가 볼까.” “하-필?” “거기서 자기 나팔두 맘대로 불 수 있고, 난 그렇게 남 상관 안 받는 데가 좋더라.” --- p.188-189 엇갈린 욕망의 이중주와 도시의 우울 회색빛 도시, 뿌리 뽑힌 영혼들의 만남 송하춘의 「은장도와 트럼펫」(1977)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그늘 속에서 뿌리 뽑힌 채 떠도는 주변부 인물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명한 작품이다. 흔들리는 기차와 철길 마을 조천, 하숙방과 철다리 밑 같은 임시적 공간을 배경으로, 소매치기 봉수와 가출한 주부 정님의 우연한 만남과 이별이 펼쳐진다. 여러 지역에서 온 뜨내기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조천에서 두 인물은 서로에게 기대어 삶의 안정을 얻고자 하지만, 끝내 하나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엇갈리고 만다. 작가는 이들의 짧은 동거를 통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현대인의 고독과 비극을 담채색 풍경화처럼 절제된 문체로 쓸쓸하면서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 p.184-185 밀알의 새 동네에서 어머니를 쪼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곧이었다. 딱다구리처럼, 사람들은 어머니를 톡, 톡, 톡, 쪼아댔다. 나무 기둥처럼 어머니는 톡, 톡, 톡, 톡 쪼아 먹혔다. 그나마 어머니는 마을에서 빤히 내다뵈는 잔등 위에만 서 있었고, 간간 곰배팔이가 거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곤 하였다. 난리가 나고,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그리고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부터니까, 벌써 여러 날째 보는 풍경이었다.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 비린내 나는 노인과 젖내 나는 어린것들이 있어도 마을은 빈 거나 마찬가지였다. 푸르러야 할 아이들이 누렇게 떠서 칭얼거렸다. B29 두 대가 그들의 울음소리를 뚝 그쳐 놓고, 읍내 쪽으로 날아갔다. 눈탱이랑 귓불이랑을 마구 싸잡아 갈기듯한 폭음 소리가 읍내 쪽에 내리퍼붓던 것은 그러고 나서 조금 뒤였다. 읍사무소를 때렸을 거다. 역(驛) 구내에 있는 양곡 창고를 때렸을 거다, 를 놓고 뒷잔등에서는 갈대처럼 앙상한 노인들이 나와 앉아 눈가늠을 하고 있었다. 마을 앞으로 강물처럼 출렁거리는 벌판이 뻗어 있고, 만삭의 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칠월의 따가운 햇살을 들이키고 있었다. 기어가는 듯, 벌판을 가로질러 가는 구릉은 황토배기다. 그 위에 외딴집 한 채가 졸고 있다. 키 큰 호밀의 숲에 외딴집은 그나마 가려 있었다. 구릉을 타고, 높새바람이 언덕의 왼쪽으로부터 불어 젖혔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호밀의 연두색 숲이 일제히 드러눕는 시늉을 할 때마다 외딴집의 누추한 지붕이 독버섯처럼 드러났다 가려지곤 하였다. 밀밭 언저리에서는 어머니가 고추를 따고 있었다. 호밀은 거둬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추만 따고, 따서, 더 딸 것도 없는 고춧대 잔가지의 얼크러진 숲을 어머니는 다만 헤젓고 있을 뿐이었다. 외딴집과 어머니와 호밀밭의 그 낡은 풍경 속에 곰배팔이가 끼어들기만 하면 빈 마을은 온통 딱다구리가 되어 톡, 톡, 톡, 톡 어머니를 쪼기 시작한 것이다. 할머니가 육신이 성해 나다닐 수만 있어도 괜찮을 텐데, 호랑이 없는 산중에 여우가 판을 치는 격이라고들 헐뜯었다. 걸려들어도 하필이면 왜 곰배팔이한테냐며, 꿩 대신 닭 아니겠냐고들 맞장구를 쳤다. 아버지 집 나간 날을 손꼽으며, 아직은 도둑도 이르다고들 입방아를 찧었다. 톡, 톡, 톡, 톡, 쪼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머니의 속사정을 나는 헤아릴 길이 없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여편네들이 부르르 할머니한테 가서 앙큼을 떨었다. --- p.234-236 폭력의 들판에서 비상하는 윤리적 생명 전쟁의 후방, 심리적 전쟁터가 된 마을 송하춘의 「밀알의 새」(1980)는 한국전쟁 중 폭격과 수색, 총성이 이어지는 한 농촌 마을을 서사의 무대로 삼고 있다. 젊은 남성들이 대부분 자취를 감춘 이 마을은 겉보기와 달리 평화로운 안식처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공포와 의심이 일상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전쟁터다. 작가는 건물의 파괴나 직접적인 살육보다도, 심리적 폭력이 공동체와 개인의 내면을 어떻게 서서히 황폐화하는지를 치밀하게 포착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마을은 더 이상 보호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경계하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견뎌 낸다. --- p.230-231 청계천 가는 길 위인전보다 지금은 인간전을 써야 할 땝니다. 아, 그렇군요. 오늘 참 유익한 말씀 많이 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그 인간전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여져야 된다는 말씀인지, 거기에 대해서 한 말씀? 아, 그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흠…. 운전기사 아저씨가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도록 라디오 꼭지를 비틀어 꺼 버렸기 때문에, 차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은 차가 마악 청계천 고가를 내려선 그때였다. 그는 핸들을 잡지 않은 한쪽 손으로 더듬더듬 라디오 꼭지를 찾더니, 그만 짐승의 숨통을 죄듯 그것을 홱 비틀어 버렸는데,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구겨 박는 것 같았달까, 하여튼 순간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토록 세상을 잠재울 수 있는 그는 대단한 폭군이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당사자나, 무슨 박사라는 사람까지도 자기들 말이 갑작스레 차단당한 걸 안다면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때 내가 그토록 화가 날 만큼 방송을 귀담아듣고 있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러니까,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반은 듣고 반은 한 귀로 흘리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작 그것이 차단되고 나니까 함께 잡념도 사라지고, 오히려 아까 대충 듣던 말들이 다시 확실하게 떠오르면서도 그 뒷말이 궁금했던 것이다. --- p.281-282 미로 속에 갇힌 도시인의 초상 지도 밖으로 밀려난 현실과 미로 같은 도시 송하춘의 「청계천 가는 길」(1994)은 1990년대 초입의 도시에서 방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섬세히 형상화한 작품이다. 담임 선생님이 손바닥에 그려 준 약도에서는 서울의 일부가 단순하고 질서 있게 보이지만, 남재룡이 처음 상경해 마주한 서울역 일대는 처음부터 길을 헤매게 하는 복잡한 공간이다. 이후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손바닥 위 약도의 질서와 실제로 헤맸던 미로 같은 도시의 기억이 겹쳐진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가 실제로 택시를 타고 통과하는 도심의 풍경 역시 정체와 혼란이 뒤엉킨 ‘미로’에 가깝다. 작가는 콘크리트로 덮인 청계천과 꽉 막힌 도로를 통해 자연성과 인간성이 함께 매몰된 숨 막히는 도시 문명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목적지를 향한 이동의 과정은 단순한 공간적 여정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와 속도 경쟁 속에서 표류하는 현대인의 삶이 지닌 불안정성을 확인해 가는 성찰의 과정으로 확장된다. --- p.276-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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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청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 귀가 번쩍 뜨였다.
한창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소설을 읽어주겠다니 참 아름다운 인간교육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은 그 시대가 창출한 가장 강렬한 정신적 유산이자, 미래를 지향하는 상상적 공간일 텐데, 커가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그걸 성장의 발판으로 삼게 하겠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에서 소설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또 직접 창작을 해온 사람으로서, 문학이 인성개발에 미치는 영향을 높게 평가함은 당연하며, 한바탕 성장과 발육을 향해서만 치닫는 청소년기야말로 좋은 소설을 많이 읽을 때라는 생각을 늘 해온 사람이다. 강소천 선생의 「꿈을 찍는 사진관」을 읽으면서 자랐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도시로 나간 시골소년 앞에 갑자기 나타난 이 동화집은 나로서는 세상에는 없던 신대륙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고도 신비한 글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책들을 찾아 읽기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훨씬 훗날 미국에 가서 한국문학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무엇을 가르칠까 고심하다가 나는 결국 나의 성장기에 읽은 「꿈을 찍는 사진관」을 갖고 가서 읽어주기로 하였다. 그때 그들은 대학생이었지만 그들이 한국을 이해하는 정도는 아직 중학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나는 내가 미국에 다녀왔다는 생각보다 그들의 세상이 태평양을 건너 우리 대한민국까지 뻗친 것을 보는 것 같아 마음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서연비람〉이 엮어낸 『해설과 함께 읽는 한국 대표 단편문학 선집』이 오늘의 청소년들에게도 같은 즐거움과 보람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한다. 읽어라! 모르겠거든 알 때까지 읽어라! 이것이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고 또 소설을 쓰면서 얻은 올바른 소설독법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친절한 해설까지 곁들였으니 서연비람의 독자들이야말로 천군에 만마를 얻은 셈이다. 이 『한국 대표 단편문학 선집』은 아름다운 단편소설 모음집이 될 것이다. 새로운 작품을 발굴한다는 등의 이유를 걸어 괜히 낯설거나 정체가 불명한 책을 만들기보다는, 좀 해묵어 보이더라도 우리 조부모 때부터, 부모 때부터 대를 이어 읽히고 검증을 받아온 모범적인 작품들을 선별하고자 노력한 책이다. 편편이 ‘작가 소개 - 작품 해설 - 작품 - 선생님이 들려주는 작품 이야기’의 순서를 밟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완벽을 기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선생님이 들려주는 작품 이야기’는 이 책이 고안한 아주 특별한 코너로서, 그동안 그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한 선생과 학생의 실체를 여기서 만나게 될 것이다. 학습은 꼭 배워서만 안다기보다 그것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회초리와 함께 기억된다는 말이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서 그만큼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여기 실린 단편들도 그렇게 선생님이 들려주신 그 시절 이야기와 함께 오래 기억될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 송하춘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