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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론
양장, 개정판
볼테르 저
한길사 201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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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top2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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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1

Voltaire,본명 :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인 다재다능한 작가 볼테르(필명)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ois Marie Arouet)’라는 이름으로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볼테르는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Louis le Grand) 학교에 들어가는데, 이 학교에서 금세 두각을 드러내고 평생 이어갈 교유관계들도 형성한다. 한편,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인 다재다능한 작가 볼테르(필명)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ois Marie Arouet)’라는 이름으로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볼테르는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Louis le Grand) 학교에 들어가는데, 이 학교에서 금세 두각을 드러내고 평생 이어갈 교유관계들도 형성한다. 한편,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간다.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한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플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한다.

이후에도 소(Sceaux)성(城)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학적 재능을 증명해 보이던 그는 청년 시대에 섭정 오를레랑 공을 풍자한 시의 작자로 간주되어 바스띠유에 갇혔다가 출옥한 뒤, 볼떼르란 필명으로 24세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이디푸스(Oedipus)』(1718)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진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볼테르도 존중받는 장르였던 비극과 시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작가로서의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반면, 나중에 재미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1759), 『자디그(Zadig, ou la Destinee)』(1748), 『랭제뉘(L'Ingenu)』(1767)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Pantheon)에 안치된다.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꼽히는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저서들 속에는 당대의 지배적 종교 권력이었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통적 가치들의 토대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비난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는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생전에는 대시인으로 대접받았지만, 그의 재능의 본질은 풍자 작가, 명쾌하고 기지에 찬 프랑스적 산문 작가의 전형에 있으며, 특히 철학적 에세이와 우화 소설에 뛰어났다. 이신론(理神論), 이성론의 입장에서 초자연을 강하게 부정하고 신랄하게 성서를 비판해, 후세에 그의 이름은 회의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계몽주의의 보급을 통해 대혁명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철학의 간』(1734), 『깡디드』(1759), 『관용론』(1763), 『철학사전』(1764) 등이 있다.

볼테르의 다른 상품

역자 : 송기형
송기형(宋紀炯)은 서울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프랑스 혁명기 언어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현대 프랑스의 언어정책과 불어 사용법」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앙드레 말로, 문학과 행동』 『프랑스 문화예술, 악의 꽃에서 샤넬 No.5까지』(공저)가 있다.
역자 : 임미경
임미경(林美京)은 서울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스탕달의 글쓰기와 자기 탐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민주주의로 가는 길』 『어느 전쟁영웅의 당연한 죽음』 『파르마의 수도원 1, 2』 『여성과 성스러움』 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4월 08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618g | 153*224*20mm
ISBN13
9788935664450

출판사 리뷰

장 칼라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관용론』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란 가증스러운 것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그와 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_ 48쪽

성실한 신교도 칼라스는 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광신적 대립이 지배했던 프랑스 남부의 툴루즈에서 모범적인 가장으로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다. 1762년 5월 9일, 그의 큰아들 마르크 앙투안이 삶을 비관한 끝에 목을 매고 자살한다. 이 사건을 보려고 모여든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칼라스의 큰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를 죽였다고 소리쳤다. 이런 소문은 신교도에게 적대적이었던 툴루즈 시민들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고 시정부는 성난 여론에 떠밀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칼라스 가족을 체포했다. 거듭되는 가혹한 심문에도 칼라스 가족은 범행을 부인했으나 맹신과 편견에 오도된 재판관들은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이 가장을 수레바퀴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칼라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볼테르는 재판절차의 부당함에 분개했고 이 사건 속에 자신이 공격하고자 하는 옛 시대의 종교적 맹신과 야만적 형벌제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절감했다. 이후 볼테르는 칼라스의 복권을 위해 『관용론』을 쓰고 각종 팸플릿을 제작해 유포하는 각종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동·서양의 역사와 『성서』 강론, 도덕론 등 각종 자료를 뒤져가며 불관용에 대한 반론의 논거를 정리한 『관용론』은 볼테르 특유의 감각과 재치 덕분인지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 매우 폭발적이었다. 결국 ‘파리’, 즉 중앙정부가 이 사건을 인지하게 되었고 1765년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었다. 볼테르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해온 옛 체제의 낡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야만적 형벌제도에 대해 계몽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자연법에 어긋나는, 예속을 강요하는
세속적 종교권력 비판


이번 축제의 백미는 저 교수대 위에서 칼라스 일가를 바퀴에 매달아 죽이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거리낌 없이 말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죄인들을 우리의 신성한 종교에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_ 33쪽

맹신에 빠져 칼라스를 사형장으로 내몬 대중에 대한 볼테르의 한탄 섞인 평이다. 볼테르는 이런 ‘마녀사냥식’ 처벌을 비판하며 각종 역사적 사례를 제시한다. 우선 고대 아테네에서는 사형 판결을 내리려면 의사결정에 참여한 시민 반수의 찬성에 더해서 50명이 더 찬성해야만 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다른 종교를 믿는 부족을 평화롭게 통치하고 있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20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 정교도가 아무런 위험 없이 생활하며, 술탄은 그리스의 몇 개 섬을 위해 가톨릭 주교들을 임명해 파견한다. 그뿐인가. 아메리카 대륙 캐롤라이나의 법률에 따르면 어떤 종교가 법적으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한 가족의 가장인 신도가 일곱 명만 있으면 된다. 이러한 종교의 자유 때문에 무질서가 초래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볼테르는 당시 툴루즈를 비롯한 프랑스 사회의 이성의 불완전함과 법률의 불충분함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일삼는 광신도들의 수를 감소시킬 묘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광신이라는 이 정신의 질병에 이성의 빛을 쬐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을 계몽하는 데 효과는 느리지만 실패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이고, 이성은 온화하고 인정미가 있으며 너그러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덕을 확고히 하며 기쁜 마음으로 법에 복종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진보와 행복을 보증하는가? 아니다. 이성은 그 효율성과 합리성 외에 관용의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가 다르다고 박해하는 일은 볼테르가 보기에 매우 어리석고 잔인한 것이다.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이것은 호랑이 같은 맹수들에게나 어울릴만한 법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다. 왜냐하면 호랑이들은 먹을 것을 다툴 때만 서로를 물어뜯지만, 우리 인간은 말 몇 마디 때문에 서로를 죽였던 것이다. _ 66쪽

관용은 가장 겸손한 형태의
인간에 대한 사랑


옮긴이는 해제에서 관용을 “소극적 인정과 방임을 넘어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승인하는 태도”라고 정리한다. 그렇다면 왜, 언제부터 관용은 문제시되었는가? 옮긴이는 절대적 진리를 요구하는 일신교의 정립과 함께 관용이 문제로 부각되었다고 말한다. 기독교가 국교로 승인된 후부터 종교개혁시대 이후까지 관용의 정신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볼테르에 따르면 기독교도들은 자신의 종교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마다치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적 감정이 매우 강한 민족이긴 했지만 에피크로스 학파가 신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을 기꺼이 용인했으며 로마인들 역시 그들의 번영과 제국팽창을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관용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냈다. 심지어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저술 첫머리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이 있던 자리에 대신 태양을 놓았으며, 키케로는 지옥에 대해 “아주 어리석은 노인들조차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로마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인간의 권리 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볼테르는 물론 네로 황제 때의 기독교 박해도 언급한다. 그러나 “네로 황제 시대에 불운한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당한 재앙을 종교적 불관용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종교적 박해가 국익에 기인한 정치적인 박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례들과 문헌들을 섭렵해가면서 볼테르는 소위 기독교의 순교자들에 대한 신화를 낱낱이 반박한다.

볼테르는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후일 열매를 맺게 될 씨앗을 하나 뿌렸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계몽의 빛을 널리 퍼뜨리기 시작한 이성의 정신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그러나 볼테르가 기다리는 그 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오늘날까지 자행되는 수많은 국지전 등은 볼테르 시대의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근대정신의 어두운 측면이자, 관용정신의 적나라한 결핍을 보여주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행동이 성스러운 것이라면, 이교도들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천국에서 최고의 성인이 될 것”이라는 볼테르의 역설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여전히 『관용론』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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