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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바사니 선집 3권 세트
성벽 안에서+금테 안경+핀치콘티니가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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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리다 만토바니 007
저녁 먹기 전의 산책 065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105
클렐리아 트로디의 말년 155
1943년 어느 날 밤 219

옮긴이의 말 268
조르조 바사니 연보 270
추천의 말_안젤로 조에 278
조르조 바사니 『페라라 소설』을 펴내며_김운찬 283
페라라 지도 286
리다 만토바니 007
저녁 먹기 전의 산책 065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105
클렐리아 트로디의 말년 155
1943년 어느 날 밤 219

옮긴이의 말 268
조르조 바사니 연보 270
추천의 말_안젤로 조에 278
조르조 바사니 『페라라 소설』을 펴내며_김운찬 283
페라라 지도 286
리다 만토바니 007
저녁 먹기 전의 산책 065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105
클렐리아 트로디의 말년 155
1943년 어느 날 밤 219

옮긴이의 말 268
조르조 바사니 연보 270
추천의 말_안젤로 조에 278
조르조 바사니 『페라라 소설』을 펴내며_김운찬 283
페라라 지도 286

저자 소개 4

조르조 바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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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rgio Bassani

1916년 3월 4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난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유년기와 청년기를 페라라에서 보낸다. 1934년 볼로냐 대학 문학부에 입학해 미술사가 로베르토 론기에게서 수학한다. 대표적인 반파시즘 지식인 베네데토 크로체의 글에 심취해 있던 대학 시절, 페라라의 일간지 『코리에레 파다노』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38년 반유대주의적 인종법이 선포될 무렵부터 반파시즘 활동에 참여하다 1943년 체포되어 구금된다.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풀려난 뒤 로마에 정착한다. 이차대전 후에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동시에, 당대를 풍미한 문예지 『보테게 오
1916년 3월 4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난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유년기와 청년기를 페라라에서 보낸다. 1934년 볼로냐 대학 문학부에 입학해 미술사가 로베르토 론기에게서 수학한다. 대표적인 반파시즘 지식인 베네데토 크로체의 글에 심취해 있던 대학 시절, 페라라의 일간지 『코리에레 파다노』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38년 반유대주의적 인종법이 선포될 무렵부터 반파시즘 활동에 참여하다 1943년 체포되어 구금된다.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풀려난 뒤 로마에 정착한다. 이차대전 후에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동시에, 당대를 풍미한 문예지 『보테게 오스쿠레』 『파라고네』, 그리고 펠트리넬리 출판사의 편집장으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다.

바사니 문학의 원천은 ‘페라라’와 ‘유대인’이다. 작품 대부분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집권기를 전후한 페라라가 무대다. 혹독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부르주아 의식의 혼란상을 파헤치는 예리한 묘사, 영화적?회화적 장면 구성, 증언담에 가까운 독특한 반직접화법, 역사와 집단으로부터 모욕당한 개인의 의식을 포착해낸 서정적인 문체로써 페라라의 역사와 일상을 정치하게 그려내어, 페라라 유대인 공동체의 증인이자 ‘기억의 작가’로 불리며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대표 작가가 된다.

바사니 문학의 결정판은 일명 ‘페라라 소설 연작’으로 불리는 작품들의 모음집인 『페라라 소설』(1980)이다. 이전에 따로 출판했던 여섯 권의 책-『성벽 안에서』(1956, 스트레가 상), 『금테 안경』(1958), 『핀치콘티니가의 정원』(1962, 비아레조 상), 『문 뒤에서』(1964), 『왜가리』(1968, 캄피엘로 상), 『건초 냄새』(1972)-을 한데 모아 펴낸 것으로, 무대는 같으나 스포트라이트가 여러 인물에게 돌아가며 비춰지는 각각의 이야기들은 파시즘 치하의 페라라가 지닌 역사적 면면을 거울놀이하듯 눈부시게 비춘다. 이 가운데 단편 「1943년 어느 날 밤」과 『금테 안경』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은 모두 영화로도 만들어진다. 소설 외에도 다수의 시집을 출간한 바사니는 1982년 『운율 있는 시와 없는 시』로 바구타 상을 수상한다. 2000년 4월 로마에서 생을 마치고 페라라의 유대인 묘지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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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지도하에 화두(話頭)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현대 기호학과 문화 분석』, 『신곡-저승에서 이승을 바라보다』, 『움베르토 에코』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단테의 『신곡』, 『향연』,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에코의 『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 『거짓말의 전략』, 『이야기 속의 독자』, 『논문 잘 쓰는 방법』, 칼비노의 『우주 만화』, 『마르코발도』, 파베세의 『달과 불』, 『피곤한 노동』, 『레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지도하에 화두(話頭)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현대 기호학과 문화 분석』, 『신곡-저승에서 이승을 바라보다』, 『움베르토 에코』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단테의 『신곡』, 『향연』,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에코의 『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 『거짓말의 전략』, 『이야기 속의 독자』, 『논문 잘 쓰는 방법』, 칼비노의 『우주 만화』, 『마르코발도』, 파베세의 『달과 불』, 『피곤한 노동』, 『레우코와의 대화』, 과레스키의 『신부님 우리 신부님』, 비토리니의 『시칠리아에서의 대화』,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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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 이탈리아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인문·문학·예술·종교 분야의 책을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가재걸음』 『적을 만들다』 『60개의 이야기』 『금테 안경』 『눈물을 만드는 사람』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 비극』 『지구의 미래』 『깊은 곳의 빛』 『악령에 사로잡히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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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어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비교 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이탈리아 대사관 주관 제1회 번역 문학상과 이탈리아 정부에서 주는 국가 번역상을 수상했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이탈리아어 통번역학과 조교수를 지냈어요. 옮긴 책으로 『너에게』 『내가 정말 그렇게 이상한가요?』 『네가 찾아올 때까지』 『행복을 선물해요 : 친절』 외 여러 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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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6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쪽수확인중 | 1200g | 크기확인중

책 속으로

어리둥절한 리다는 쏘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서둘러요? 그녀는 물었다. 왜 그렇게 변했어요?
그는 머뭇거렸다. 절망의 눈,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결승점 앞에서 꼬꾸라져버리는 경주마 같아.”
---「리다 만토바니? 중에서

게다가 아직까지 그녀는 페라라에서, 특히 아름다운 봄날, 저녁 먹기 직전 조베카 대로를 걸어오면서 근엄하고 비딱하게 모자를 들어 인사하며 습관적으로 좌우를 경계하던 엘리아 코르코스의, 느닷없고 불가피한 어떤 호기심의 반영도 어떤 긴장된 탐색도 가로막던 그 공손함의 장벽을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던 유일한 사람 아니던가?
---「저녁 먹기 전의 산책? 중에서

맞군요!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추모 명판을 다시 만들어야 할 텐데, 저기에 헌정된 이름, 저 한구석을 차지한 제오 요즈가 다름아닌 ‘나’거든요, 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중에서

홍수로 인해 방대하게 인근 들판에 범람했던 큰 강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이제 자신의 강바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중에서

그 가혹했던 마지막 삼 년의 초기에 브루노의 부모는 달아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해 가짜 서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독일인들에게 끌려갔고, 둘의 이름은 지금 유대인 공동체가 마치니 거리의 성전 앞에 붙여놓은 추모 명판에 새겨져 있다. 이백 명에 달하는 다른 유대인들의 이름과 함께. 그렇다면 그는? 브루노는 반대로 페라라에서 달아났다. 제때 달아났기에 자기 부모와 똑같은 운명을 겪지 않았고, 살로공화국의 파시스트들에게 그해 12월에 총살당하지도 않았다.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 중에서

외로움과 집중, 자기 자신 말고는 달리 친구가 없다는 점은 은혜로운 일이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의 성향에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때로는 거기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감방의 네 벽 사이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지요. 1930년 감옥에서 나올 때, 나는 내 36호실을(우연의 일치지요? 내 동생의 집 번지와 똑같아요) 정말 우울한 마음으로 떠났어요. 마치 나 자신의 일부를 거기에 버려둔 것처럼 말이에요.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 중에서

누가 페라라에서 1943년 12월 15일 밤을 잊을 수 있을까? 누가 그날의 그 긴 밤을 잊을까? 모두에게 끝없는 고통을 선사한 그 밤을, 덧창문 틈새로 눈에 불을 켜고 캄캄한 어둠에 잠긴 거리를 유심히 살피면서, 정적을 깨는 기관총 소리에, 무장한 이들을 태운 트럭이 황급히 지나는 요란한 소리에, 번번이 심장이 터질 듯 두근대던 그 밤을.
---「1943년 어느 날 밤? 중에서

하지만 검은셔츠단 대원은 저 유리창 너머에서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피노 바릴라리, 그 사람의 윤곽이 비친 창문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 위의 저 신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맹세코 정말 머리가 빈 사람인지, 어떤 위협이나 협박, 어떤 기관총 사격을 가해도 단 일 밀리미터도 움직이게 하지 못했거든요.
---「1943년 어느 날 밤? 중에서

그는 재판장의 질문에 또박또박 또렷한 발음으로 단 한마디의 말만 증언했다. “자고 있었어요.” 그 말은 공기로 부풀어오른 부레를 바늘 끝으로 콕 찌른 것처럼 법정에 가득한 숨막히는 긴장을 허무하게 해결해버렸고(그의 얼굴을 살피느라 불안하게 몸을 숙인 아내는 물론, 누구 하나 숨도 못 쉴 만큼, 아주 깊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시아구라가 찡긋, 피노 바릴라리에게 재빠른 화해의 인사를 건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눈짓, 거의 감지할 수 없는 공모의 눈짓이었다.

---「1943년 어느 날 밤? 중에서

오후 두시나 세시가 지나서 아드리아 해의 빛깔이 어떤지 보셨을 테지요. 파랗다 못해 검은빛으로 변합니다. 즉 눈부실 게 없어요. 수면은 태양광을 반사하기보다는 흡수해버리지요…… 나는 식사 끝나기 무섭게 해변으로 돌아옵니다. 오후 두시. 경건한 평화 속에서 우리의 신성한 아드리아 해변을 만끽하기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순간은 없으니까요! --- p.70

매우 가까운 장래에 그들, 이교도들은 칠팔십 년 전에야 마침내 우리가 벗어났던 참담한 중세 구역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에다 또다시 우리를 떼거리로 몰아넣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겁먹은 많은 짐승들처럼 철책 뒤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고, 거기서 절대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 p.111~2

인간에게도 다분히 동물성이 존재하는데, 과연 인간이 복종할 수 있을까? 동물이라는 것을, 단지 한 마리의 동물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 p.123

이봐, 내 소중한 친구,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훨씬 더 인간다운 거야. 왜 거부하고, 왜 맞서야 하지?…… 이 모자…… 이 외투……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안경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있겠어? 그런데도 이렇게 입는 것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고 터무니없게 여겨지는 거야! 오, 그래, 온 곳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이 상황을 말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할 순 없어.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 p.124~5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p.142

나는 그를 보았다. 축복이 내려지는 시간 내내, 그의 밑에 있는 알베르토와 미콜 역시 그들의 텐트 틈 사이로 바깥을 쉴새없이 탐색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보고 웃었고 윙크를 했다. 둘 다, 특히 미콜이,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p.51

눈을 감으면 미콜 핀치콘티니가 아직도 거기, 그녀 집 정원 담 위에서 얼굴을 내밀고 나를 보며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콜 머리 위쪽의 새파란 하늘은 어느새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여름 하늘이었다. 그 하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할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만큼은 실로 그 무엇에도 변함이 없었다.--- p.63

무솔리니가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준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의 이상인 그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여섯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두체는 출판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당을 해산시키는 것으로 그들의 기여에 보답했다. 조반니 졸리티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피에몬테 시골로 몸을 숨겼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다시 좋아하는 철학과 문학 연구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죄가 덜한 사람, 아니 완전히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한층 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멘돌라와 고베티는 죽을 만큼 맞았다. 필리포 투라티는 가여운 안나 부인을 불과 몇 년 전 땅에 묻은 밀라노에서 멀리 떠나 유배 생활중에 사망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우리의 그 유명한 감옥에 갇혔다--- p.작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나?). 이탈리아 도시노동자와 농민들은 그들의 타고난 지도자와 함께 사회적인 자유를 얻고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실질적인 희망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미 거의 이십여 년 전부터 식물인간이 되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p.51

“대신 저기 저 보트를 좀 봐. 얼마나 정직하고 위엄 있는지, 얼마나 정신적인 용기가 있는지…… 보트는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그 뒤에 이어질 결과들을 받아들일 줄 알아. 사물들도 죽어, 친구. 그러니까 사물들도 죽어야 한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죽게 놔두는 게 더 나아. 무엇보다 그게 훨씬 멋있으니까, 안 그래?” --- p.146

아니, 제발. 페라라는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 떠올릴 수도 있을 법한 그런 감옥이 절대 아니었다. 물론 공업단지에서 보면 둥근 원같이 오래된 담 안에 갇혀 있어, 특히 날이 안 좋을 때면 고립되고 고독한 도시라는 인상을 쉽게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와 가까이에서 선입견 없이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다른 모든 도시와 마찬가지로 페라라는 정직과 지성과 선량함, 그리고 용기까지도 자신의 가슴 안에 품고 있던 도시다. 다만 눈멀고 귀먹은 사람들, 아니면 메마른 사람들만이 이를 무시해버리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 p.202

가장 증오할 만한 반유대주의는 이런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고 불평하다가, 또 반대로 그들이 주변 환경에 거의 완벽하게 동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평균적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p.208

마지막으로 어두운 수면 같은 앞쪽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보았다. 나 역시 벌써 머리가 약간 셌고, 나 역시 동일한 톱니바퀴 속에 들어가 있었지만, 마지못해 거기에 끼어 있으면서도 아직은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속으로 말했다. 나는 아직 분명히 살아 있어! 그러나 그때, 아직 살아 있었다면, 뭐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그곳에 계속 앉아 있었던 걸까? 그 절망적이고 기괴한 유령들의 모임을 왜 당장 박차고 나가지 않은 걸까?--- p.230

“다 지나갈 거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다 지나갈 거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물론 지금 이 순간 네가 어떤 기분일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구나. 그래도 약간 부러운 마음도 있단다, 아니?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적어도 한 번은 죽어야만 하겠지. 그러니까 법칙이 이렇다면야, 젊어서 죽어보는 게 더 좋다는 거다. 일어나서 부활할 시간이 아직 눈앞에 많이 남아 있을 때 말이다……”--- p.351

나는 마그나도무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풀이 무성한 비탈길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핀치콘티니 저택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남쪽으로 난 미콜의 방 창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날 밤 그 창문에서도 작은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신한다. 마침내 ‘신성한’ 담장, 미콜이 보들레르 시구를 빌려 “철없는 사랑의 푸르른 낙원”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곳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점에 이르자, 돌연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다. 담을 타고 올라가 정원에 몰래 들어가볼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까마득한 옛날, 유월의 그날 오후, 난 감히 그렇게 해볼 엄두도 못 냈었다. 겁이 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 p.358

출판사 리뷰

‘기억의 작가’로, ‘페라라를 영원의 도시로 만든 작가’로 불리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의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이탈로 칼비노와 W. G. 제발트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는 [금테 안경]과 더불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조르조 바사니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다. 특히 바사니의 섬세한 문체와 정교한 구성을 맛볼 수 있게 작가의 개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다섯 편의 뛰어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바사니는 1956년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소설집으로 그해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스트레가 상을 받음으로써 입지를 단단히 다진다.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는 부제에 나타난 대로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를 배경으로 한 다섯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집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페라라에 관한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이곳이 중세 르네상스를 꽃피운 데스테 가문의 본거지였고, 장편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를 노래한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고향이기도 했던 문화적 도시라는 사실이다. 또하나 르네상스 이후 페라라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20세기 초 파시즘의 열풍이 불면서라는 점이다.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된 1922년 파시스트의 로마진군을 주도한 세 사람 중 하나인 이탈로 발로가 페라라 출신이었다. 이는 이탈리아 북부의 파시즘이 창궐했던 여러 곳 중에서 페라라가 차지하는 악명 높은 위상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소설집은 이런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진가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작가가 처했던 특수한 상황 또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요소다. 작가는 페라라의 부유하고 유서 깊은 유대인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다. 과거 사보이아 왕가에서는 유대인들을 우대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폈고 따라서 이들 유대인은 자신이 무엇보다 이탈리아인임을 의심하지 않고 나름의 삶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1938년 인종법이 공포된 이후 페라라 유대인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며 분리와 배제, 소외와 핍박의 싸늘한 시선에 늘 노출되는 신세가 된다.

이 소설집의 원래 제목은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였다. 하지만 1973년 ‘성벽 안에서’로 제목을 바꾸었고 이후 1974년 [페라라 소설]이라는 연작을 출간하면서 ‘성벽 안에서’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이 소설집에는 페라라에서 삶을 영위한 다양한 사람들의 여러 가지 삶이 이야기된다. 앞서 말한 대로 사건의 무대인 페라라는 다른 여러 고장들이 나름의 역사성과 사연을 지닌 것처럼, 이곳도 그 나름의 역사성과 사연을 지녔다. 다섯 편 모두 저자의 시점은 대체로 종전 이후에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띤다. 그러면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역사의 격동기인 1938년 이후의 페라라, 그리고 1943년 12월의 페라라를 집중 조명한다. 또하나 흥미로운 특성은 각 단편에 등장했던 인물이 이후 다른 소설에도 그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파시스트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검은셔츠단의 행동대원 카를로 아레투시, 일명 ‘시아구라’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네번째 단편소설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에 잠깐 등장한 악한의 상징 시아구라는 마지막 단편 ?1943년 어느 날 밤?에서는 보다 자세히,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훗날 명망 높은 정치가가 되는 보테키아리도 계속해서 여러 단편에 등장한다. 이들은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나 [금테 안경] 같은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교차해서 등장함으로써 각각의 작품들을 하나로 아우르며 연작 [페라라 소설]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는 필요한 만큼만 노출된다. 따라서 이 소설집은 전체 연작의 어떤 시발점, 훗날의 어떤 사건들이 있기 이전, 각 인물들이 간직했던 숨겨진 전사前史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럼, 아래에 각 단편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리다 만토바니?의 제목은 주인공 여인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리다 만토바니는 미혼모의 딸로 성장한 가난한 처녀다. 그녀는 부유한 유대인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와의 사이에서 아기 하나를 낳은 뒤 버림받는다. 미혼모였던 어머니 처지가 고스란히 거울처럼 대물림된다. 그러나 이 사슬을 끊어줄 누군가가 나타난다. 이웃의 제본소 주인 오레스테 베네티가 이 모녀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충실한 베네티는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결혼의 의미가 각자에게 서로 달랐음이 나중에야 밝혀진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페라라 전통사회에 기층민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통해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차분히 되묻는다.

?저녁 먹기 전의 산책? 또한 남녀 간의 결합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유대인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첫 소설과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른바 메잘리앙스(낮은 신분과 높은 신분 간의 결합을 이르는 프랑스어)가 주요 모티프다. 부유한 유대인 의사 엘리아 코르코스와 서민 출신의 간호사 젬마 브론디 부부,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사랑을 오랫동안 남몰래 간직했던 아우실리아 브론디의 이야기가 중층적으로 겹쳐진다. 이 작품은 특히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특별할 것 없는 낡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과거로, 그 먼 역사 속의 공간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현재로 빠져나온다. 마치 카메라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바사니가 시각예술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고 실제 영화에도 지속적으로 관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묘사가 작품 전반에 가득하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인종법 이후 유대인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소외의 도립상을 과거 페라라의 신분제 사회에서 찾는다. 낮은 신분, 가난한 계층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소외가 어떤 방식으로 페라라에 겹쳐져 있는지를 말이다.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은 그야말로 역설이 가득한 뛰어난 작품으로 이 소설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1938년 이후 독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던 이탈리아 유대인 백팔십삼 명 중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젊은이 제오 요즈의 이야기다. 이 소설 또한 첫 도입부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페라라 마치니 거리에 있는 시나고그, 즉 유대교 회당에 한 미장이가 명판을 붙이고 있다. 회당 입구 이 미터 높이에 붙게 될 그 명판은 나치 독일 절멸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추모 명판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한 뚱뚱한 남자 하나가 명판 속에 명단 중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고, 자신은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면서 그 작업을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죽음의 수용소에서 페라라로 살아돌아온 제오 요즈는 한동안 시민들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그 환대는 오래가지 않는다. 재건을 꿈꾸는 페라라 사회에서 유대인은 망각되어야 할 존재였다. 이 소설은 늙은 파시스트 스코카 백작의 뺨을 후려갈긴 요즈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수용소에서 입던 옷을 입고 나타나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뚱뚱하던 몸이 갑자기 왜 비쩍 마르게 됐는지, 그리고 마침내 그가 왜 페라라의 시민들 사이에서 다시 사라져야 했는지를 진지하게 되묻는다.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은 유서 깊고 아름다운 체르토사 수도원 옆 페라라 시립 공동묘지에 묻힌 어느 사회주의자 여인의 삶과 투쟁을 되짚어보고 자신을 냉정히 돌아보는 일종의 회고담이다. 클렐리아 트로티와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맺었던 유대인 젊은이 브루노 라테스가 수년 전의 일들을 가만히 떠올린다. 인종법이 발효된 이후인 1939년 그녀를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와 같은 사회주의자였으나 이제는 정치가로 성공을 꿈꾸는 변호사 보테키아리, 파시스트 비밀경찰의 감시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산타마리아인바도 광장 교회 옆에서 공방을 하는 구두장이 로비가티, 그리고 폰도반케토 거리 36번지 은둔지의 집 주인 코데카 부인과 그 남편 등을 만난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 일차대전 때부터 이차대전 말기 이탈리아의 사상적 갈등과 변화를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격조 있게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유복한 유대인 브루노는 사회주의자의 열정과 이상에 공감하지만 삶을 온전히 던지진 못한다. 사회적 약자들, 특히 나이든 퇴락한 여성 혁명가 트로티에게 큰 동감을 느끼면서도 본질적인 자신의 어떤 속성, 돌이킬 수 없는 냉정함, 차별의식을 부정하지 못한다. 비겁한 자신에게 트로티는 거울 같은 존재였지만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이상과 같은 존재였음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

?1943년 어느 날 밤?은 페라라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각색하여 반치니 감독에 의해 1960년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소설은 1943년 12월 15일 밤 페라라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학살을 다룬다. 유대인 출신으로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약국을 상속받은 약사이자 누구나 흠모할 만한 미모를 지닌 여성 안나 레페토와 결혼한 피노 바릴라리가 주인공이다. 결혼 후 얼마 안 돼 하반신 마비가 된 피노는 사건이 있기 수년 전인 1939년부터 약국 건물 꼭대기층 창가에서 쌍안경으로 로마 거리를 관찰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1943년경 이탈리아 반도는 연합군 세력에 의해 해방된 남부와 나치 독일의 꼭두각시 정권인 살로공화국이 수립된 북부로 양분되었고, 당연히 북부 페라라는 이른바 형제살해 싸움의 소용돌이, 동족상잔의 비극 한복판에 있게 된다. 1943년 9월 나치와 무솔리니에 맞서서 여러 정당이 연합한 민족해방위원회 같은 거대 레지스탕스 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볼로냐 지부에서 파시스트당 재건을 위해 페라라 지부로 파견됐던 볼로녜시 대령이 암살된다. 이를 계기로 1943년 12월 15일 밤, 데스테 성 맞은편 델라보르사 카페 길 건너편에서 파시스트 행동대 검은셔츠단이 시민 열한 명에게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사건이 빚어진다. 남편이 하반신 마비가 된 뒤로 외간남자를 만나곤 했던 안나 레페토는 그날 밤 다른 데서 귀가하다가 우연히 학살을 목격한다. 시체 더미를 본 순간 약국 건물 위를 봤을 때 남편과 눈이 마주친다.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학살자(그중에서도 특히 사건의 주모자인 시아구라)를 기소해 재판이 진행된다. 피노는 주요 목격자로 법정에 선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오직 한마디의 말뿐이었다. “자고 있었어요.” 정말일까? 그 순간 사람들은 시아구라가 던진 은밀한 공모의 눈짓이 피노를 향하는 것을 보았다고 느낀다. 초기 파시즘에 많은 유대인이 동조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노 또한 십대 시절 로마진군에 동참했던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 전체를 덮어버린 그 증언에 정당성을 줄 수 있는 걸까? 그는 어째서 그런 증언을 했던 걸까?

두 개의 소외, 하나의 운명

‘기억의 작가’ ‘페라라의 작가’로 불리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숨은 거장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의 1958년작. 단편집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장편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과 함께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바사니의 경장편 소설이다.

『금테 안경』을 두고 이탈리아 작가 엘사 모란테는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의 하나”라 했고,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아마도 바사니의 최고작일 것”이라 극찬했으며, 안드레아 카밀레리는 2000년 바사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페라라의 위대한 작가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았다. 또한 이탈로 칼비노는 이 작품을 읽은 직후 프랑스 세유Seuil 출판사의 프랑수아 발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사니를 “요사이 등장한 이탈리아 작가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작가 중 하나”로 평가하기도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베네치아 출신으로 페라라에 정착해 성공한 의사 아토스 파디가티다. 교양 있고 온화한 예술 애호가인 중년의 신사 파디가티는 페라라 시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금테 안경’은 성공한 부르주아 파디가티의 상징물이다). 그러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한 젊은이에게 공개적으로 수모를 겪으면서 한순간에 인생이 바뀌게 된다.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서술자 ‘나’는 페라라에 사는 유대인으로 볼로냐 대학에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며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파디가티에게 연민을 느끼고 친구가 되는데, ‘다름’과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그 둘은 비슷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탐미적 형식미, 네오리얼리즘의 진수

『금테 안경』은 바사니 문학의 형식적 완결성을 아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한편에 파시즘 시대의 역사와 부르주아사회의 일상이 포개져 있고, 다른 한편에 유대인 ‘나’의 이야기와 동성애자 의사 파디가티의 이야기가 병치되어 있다. 역사와 일상, 유대인과 동성애자는 서로를 되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한다.

페라라 부르주아사회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동성애자와 유대인)은 어느 날 갑자기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과 마주한다. 때는 반유대주의적 인종법 시행을 앞둔 1937년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체제가 들어선 1921년 이후 위기를 예감하기는커녕 파시즘에 동조하며 안일하게 살아가던 유대인 공동체는 갑작스레 배신감과 당혹감에 휩싸인다.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워지는 과정과 동성애자 의사에 대한 잠복해 있던 경멸감이 폭발하는 과정이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기묘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종국에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로 치닫게 되는 일상 속 파시즘의 징후는 동성애자에 대한 위선적 태도에 이미 나타나 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 공간은 소설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데, 이는 바사니 문학 전반의 특징이다. 페라라와 볼로냐를 오가다가 아드리아 해안의 리초네로, 마지막에 다시 페라라로 돌아오는 장소 변화는 이야기 전개의 전환점이 된다. 평온한 일상에서 시작해 페라라-볼로냐 왕복 기차에서 서서히 긴장이 고조되고, 해변 휴양지 리초네에서 갈등이 폭발한다. 그러다 다시 페라라로 돌아왔을 때, 두 타자에게 이 도시는 낯설고 혹독한 곳으로 변해 있다. 광장과 거리, 성당과 영화관 등 지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실적인 묘사는 도시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하며, 길 잃은 개와 함께 거니는 어두운 밤거리, 파디가티에게 유일한 위안인 아드리아 해의 검푸른 바다는 비극적 운명을 암시한다.

하지만 바사니의 문체는 결코 음울하지 않다. 격정도 눈물도 없다. 오히려 차분하고 담담하다. 이 작품의 주조음은 슬픔과 절망이 아니라 고독과 침묵이다. 정교한 플롯과 영화적 미장센, 격조 높은 심미적 묘사를 통해 바사니는 파시즘 시대의 일상을, 부르주아사회의 속물적 이면을, 그 안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는 소외된 자의 고독한 내면을 서정적이고 애상적으로 그려낸다. 주인공이 바라보는 검푸른 아드리아 해처럼, 아름다움 속에 죽음이 있고 그 죽음 속에 자유가 있다는 점에서 『금테 안경』은 바사니 문학 가운데 가장 탐미적인 작품이다.

※ 『금테 안경』은 1987년 줄리아노 몬탈도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진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음악과 영화 〈시네마 천국〉 〈일 포스티노〉로 유명한 프랑스 국민배우 필리프 누아레의 애상적인 연기가 인상적인 영화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문학의 이념적 잔해를 넘어 문학의 순수성을 지켜낸 현대소설의 백미

W. G. 제발트, 알베르토 모라비아, 이탈로 칼비노 등 문학의 대가들이 극찬한 작가이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데시카, 파솔리니 등 영화 거장들이 사랑한 이탈리아 현대소설계의 대부, ‘기억의 작가’ ‘페라라의 작가’로 불리는 20세기 후반 이탈리아 문학의 숨은 거장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의 대표 걸작이자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 『핀치콘티니가의 정원』(1962)은, 소설집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경장편 『금테 안경』과 함께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바사니의 장편소설이다. 1962년 비아레조 상을 받은데다 출간 당시 이십만 부가 팔리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작품은, 1970년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이 영화화해 이듬해에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더욱 유명해졌다.

소설의 큰 줄거리는 1938년 반대유주의 인종법 공표에서 시작해 이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까지 무솔리니 내각의 파시즘 광풍이 불어닥친 페라라를 무대로, 부유한 유대인 가문 핀치콘티니의 몰락과 질풍노도의 청춘기를 겪는 그 가문의 딸 ‘미콜’과 ‘나’의 일그러진 사랑의 기억이다. 볼로냐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년기를 페라라에서 보낸 유대인 작가 바사니는, 이차대전 파시즘 체제하의 인종법과 유대인 박해라는 역사적 체험과 기억을 문학적으로 가장 잘 구현해낸 작가로서 페라라 유대인 공동체 전체의 증인이자 기록자로 평가받는 작가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가 바사니는 아우슈비츠 이후 더이상 서정시는 쓸 수 없다고 한 아도르노에 맞서 문학의 진정한 힘인 시적 순수성으로 네오리얼리즘의 역사적 이념성과 증언문학이 지닌 교훈적 기록성의 한계를 극복해내고자 했다. 그는 거대 역사가 한 개인을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걸 알기에, 한결같이 문학 안에서, 삶이 지닌 본래의 고독과 한 인간 내면에 깃든 고유한 삶의 격정과 고뇌를 포착하고자 했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은 ‘기억의 작가’답게 오늘날 이탈리아 현대문학사에서 전쟁 희생자, 죽음, 유대인, 동성애, 노동자계층 등 단절/소외/차별의 분열지대에 놓인 역사적 개인을, 개인의 역사를 바사니 자신이 겪은 자전적 체험과 더불어 녹여낸, 그의 문학세계의 완숙미와 절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 말미에 부록으로 자세한 작가 연보와 페라라 지도를 실어, 작가와 함께 격랑 속에 있었던 페라라의 신화적 장소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여로를 면밀히 따라가볼 수 있도록 했다. 유대교 회당과 무덤, 마치니 거리와 조베카 대로, 에르콜레프리모데스테 대로와 성벽이 있는 공원 등 페라라 곳곳을 문학작품 안에서 기념비적으로 눈부시게 조명했던 바사니는, 이제 페라라의 역사적 인물이 되어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생겼을 정도다.

한 개인의 체험과 기억이 살려내는 생존자들의 다성성과 독특한 문체미의 결합
-‘무덤’에서 시작해 이끼가 덮어버린 ‘입’으로 끝나는 이야기

2015년 파트릭 모디아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그해, 이탈리아 북부 도시 페라라 언론에서는 모디아노를 가리켜 ‘프랑스의 바사니’라고 했다.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바사니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두 작가를 관통하는 연결점은 ‘기억’이라고 하는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층위와 개인사의 긴장에서 나온 문학의 주요 화두 때문이기도 하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첫머리 「프롤로그」는 25세기도 더 된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무덤 방문에서 시작한다. 화자 ‘나’는 우연히 들른 무덤 탐방에서 자신의 청춘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던 핀치콘티니 가문에 대한 기억으로 넘어간다. 제1부에서 제4부로 이어지는 서사는, 바로 그 기억의 푸르른 절정 속에서 회고되는 질풍노도의 개인사와 페라라를 무대로 한 유대인 공동체 이야기다. “철없는 사랑의 푸르른 낙원”(보들레르)으로 묘사되는 그 대저택의 정원에서 ‘나’는 한때의 잃어버린 낙원과 사랑을 기억해내고, 오늘의 폐허 속에서 이름도 무덤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불러들인다. 이 소설에서 생존자는 주인공 ‘나’뿐이며, 나의 기억에서 불려나온 모든 타자의 목소리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다. 작가는 “기억 속에서 그들을 불러냈기에, 그들 모두가 죽은 자들이기에, 이 사실을 부디 잊지 말라고 나의 목소리는 죽은 자들과 그토록 자주 겹쳐졌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리하여 바사니 특유의 문체미가 묘를 발휘하는데, 요컨대 ‘반직접화법’ 또는 ‘자유직접화법’이라고 불리는 화법으로 나와 타자의 목소리를 분간할 수 없게 뒤섞어버림으로써, 죽은 자들 앞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자문해보게끔 한다. 이차대전 이후 역사의 광기와 폭력이 가신 다음에 남은 황망한 자리에서, ‘나’는 「에필로그」에서 “순결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운 오늘”(말라르메)을 그 어떤 미래보다 사랑했던 죽은 연인, 절망적이고 기만적인 말이 흘러나오던 상처의 장소였던 그 입을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으로서만 막을 수 있기에, 죽은 그이의 입에 자신이 아낀 몇 마디 진실의 말로 기억을 봉인하면서 이 대서사의 문을 닫는다. 시인 로베르토 파치는 바사니를 가리켜 “무덤 하나 없던 유대 민족을 위해 글말로써 무덤을 지어 바친 작가”라고 했다. 이 작품이야말로 바사니가 문학의 본령으로 쌓아올린 페라라와 유대 민족에 바치는 순수 기념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소용돌이 역사 한가운데서 고요한 낙원처럼, 폐허의 성채처럼, 전설적인 무덤처럼 버티고 선 이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담벼락을 넘어갔다 나오면, 오늘날 독자의 가슴에 이 작품도 또하나의 기억으로 자리하리라.

“나란히 묘지에서, 둘이 친족처럼
한밤에 만나
우리는 이야기했네. 우리의 이름을, 우리의 입을
이끼가 덮어버릴 때까지.”
-본문 188쪽에 인용된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해외 언론 리뷰]

바사니는 이탈리아 부르주아 의식의 혼란상을 파헤치는, 전후 최고의 작가 중 하나다.
-이탈로 칼비노

높은 문학적 기대에 마땅히 부응하는 생동감 넘치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소설.
-W. G. 제발트

무덤 하나 없던 유대 민족을 위해 글말로써 무덤을 지어 바친 작가, 바사니 문학은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경건한 오마주다.
-로베르토 파치

매번 주제도 관심사도 정치상황도 다르나 바사니 작품들에서 명쾌히 묻고 있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살았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팀 파크스

바사니 작품 가운데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논쟁적인, 독특한 문체를 뽐내는 소설.
-안젤라 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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