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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글
1장 서론 ― 과학자, 군대, 사회운동 2장 과학과 군대의 연계 팽창과 비판, 1945~1970 3장 도덕적 개인으로서 과학자 퀘이커주의와 과학의사회적책임협회 4장 정보 제공과 정치적 중립성 자유주의 과학 운동과 시민핵정보위원회 5장 자유주의에 맞서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탄도탄 요격 미사일 논쟁, 1965~1969 6장 ‘민중을 위한 과학’의 실천 신좌파 과학 정치를 세우다 7장 결론 ― 과학의 사회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를 뒤흔들다 옮긴이의 말 주 참고 문헌 찾아보기 |
Kelly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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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20세기 중반에 자발적 조직화를 거쳐 ‘순수한 전문직’ 조직과 ‘순수한 정치’ 조직 사이에 걸친 사안들을 다루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런 일은 더 큰 선을 위한 희생을 촉구하는 집단적 자기비판에 참여한 정치 공동체이자 종교 공동체라는 맥락 속에서 일어났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민권 운동과 반핵 운동의 틈바구니에서 조직화된 미국의 평화주의자들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단기적으로는 이런 위험이 개인이나 집단에 해를 끼칠 수도 있지만 결국에 가면 더 큰 사회적 선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똑같은 생각을 신좌파 집단들도 받아들였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종종 ‘네오마르크스주의’, 특히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은 좌파 성향 정치 집단들은 자기들만의 이해관계와 의제에 비판적인 대신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덜 힘센 집단들의 이해관계에 일치시키는 방식을 추구했다. --- p.28~29
국방분석연구소가 추진한 과제 중에서 ‘제이슨(Jason)’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제이슨은 연방 정부가 과학자들을 상대로 군사적 쟁점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해 활용하던 하계 연구 그룹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여러 대학교에 있는 물리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지급한 뒤 여름에 불러모아 무기 개발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제안하게 했다. ‘여름 동안 국방 문제에 관해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똑똑한 젊은 물리학자들로 구성된 독립적이고 지속적인 그룹’을 구성한다는 발상이 기본 아이디어였다. --- p.57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자들은 군사상의 필요에 뿌리내리고 있는 재정 지원과 자문 시스템에 더 깊숙하게 얽매이는 동시에 대중들의 관점하고는 단절됐다. 이제 무대가 갖춰졌다. 과학자들은 매우 높은 위험 부담을 안게 됐다. 국가, 특히 군대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과학자들은 국가 안보에 관련된 자문과 의사 결정에 참여했고, 염려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 1962~1969년 사이에 과학 분야의 재정 지원과 자문 시스템은 지식인, 활동가,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폭넓은 비판을 받으면서 빠르게 변화했다. --- p.64 네이팜탄을 생산하는 다우 케미컬을 상대로 한 운동은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서 가장 크고 잘 조직된 기업 반대 운동이었다. …… 학생들은 자기가 다니는 대학과 다우 케미컬의 공모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운동을 조직했다. 활동가들은 다우 케미컬 공장에서 시위를 벌였고, 교수들에게 다우 케미컬이 진행하는 연구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으며, 때로는 ‘다우 케미컬이 어린 아기를 불태운다(Dow Burns Babies)’는 현수막을 내걸고 교내 채용 행사를 방해하기도 했다. 활동가들은 과학이 사회적 선을 위해 봉사하기는커녕 죽음의 대리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 p.92 과학의사회적책임협회는 20여 년에 이르는 활동 기간 동안 폐쇄된 협회보다는 일종의 포럼으로 기능했다. 이 단체는 노벨상 수상자, 현장 과학자, 학생, 과학 교사, 의사들을 끌어들였고, 이런 사람들은 각각 정치, 도덕, 공공, 개인 생활에서 과학자들이 자리할 적절한 위치에 관한 확장된 대화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런 집단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고, 도덕적 책임이 어떻게 발휘돼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다양한 이해관계와 다른 이해를 갖고 있었다. 1950년대 초반의 정치적 억압을 견뎌낸 작은 집단부터 과학자들이 누구이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무척이나 다양한 견해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논쟁하는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과학의사회적책임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마도 20세기에 과학자들을 군대에서 떼어내려 애쓴 그 어떤 과학자 집단보다도 더 폭넓은 가능성을 탐구한 이들일 것이다. --- p.156~157 시민핵정보위원회는 정부가 시민들에게 핵 낙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과학자, 법률가, 지역 주민, 의사, 치과 의사, 여성 활동가 등이 모여 1958년에 만들어졌다. 그 뒤 7년 동안 시민핵정보위원회는 과학자들을 위한 집단적 정치행동의 새로운 모델을 발전시켰다. 바로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건 집단적으로건 과학자들이 대중에게 다양한 쟁점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1950년대 후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를 풍미하던 자유주의적 견해에서는 여론과 군중 기반 정치가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봤다. 가장 좋은 지배 형태는 계몽된 행정부의 지도력과 이해집단 정치를 길들이는 힘이었다. 시민핵정보위원회는 시민들에게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사회기술적 쟁점들에 대한 더 많은 공적 정치 참여를 촉진함으로써 이런 생각에 도전했다. --- p.163 정보 제공자 구실을 한 핵 실험 금지 운동하고 다르게,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서 과학자들은 무기에 관련된 정보의 원천이자 전쟁 반대자인 동시에 활동가들의 공격 대상이기도 했다. 공격 대상이 된 이유는 전쟁을 영속화하는 무기를 생산하고 자문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하는 구실 때문이었다. 1960년대 말이 되자 반전 운동은 좀더 급진화돼 직접 행동을 활용하는 한편 미국의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급진화의 한 축을 형성한 과학자들은 과학자, 시민, 정부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 도덕적 개인주의자 모델뿐 아니라 자유주의적 정보 제공과 자문 모델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 과학자들은 과학이 군사 국가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경제 엘리트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방식에 좀더 주목하라고 요구했다. --- p.212~213 1969년에 미국물리학회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자 실망한 물리학자 네 명이 새로운 과학자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1969년 2월에 열린 미국물리학회 연차 총회에서 300명이 넘는 물리학자가 한데 모여 새로운 단체의 출범을 논의했다. …… 민중을 위한 과학이라는 용어는 조직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이 조직을 뒷받침하는 일단의 관련된 아이디어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민중을 위한 과학은 무엇보다도 과학이 엘리트, 군대, 자본주의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민중’(말하는 사람에 따라 노동자 계급, 억압받는 사람들, 비엘리트층 등 다양한 대상을 가리켰다)에 봉사하는 형태로 만들어지고 쓰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 p.217 1947년에 견주면 1975년에는 과학자들이 도덕적 사안과 정치적 쟁점들에 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넓어졌다. 전문 학회 내부나 외부, 자기가 일하는 직장, 강의실 안이나 바깥 중 어디에서 활동할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시민, 정부, 이익 집단, 다른 지식인이나 과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었고, 과학은 정치에서 분리돼 있다는 생각에 도전할 수도 있었으며, 환경 오염처럼 공적인 정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신념에 기반해 연구 프로젝트를 선택할 수도 있었고, 특정한 종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 민중을위한과학의 견해와 행동은 정보 제공과 도덕적 개인주의 모델에 맞선 도전이었지만, 두 가지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다. 대신 민중을위한과학은 과학자들이 자기의 도덕적 신념과 정치적 신념에 맞춰 행동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들을 더해줬다. --- p.312~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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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에 맞선 전쟁 ― 미국 급진 과학 운동의 30년을 돌아보다
과학의 발전은 무기의 발전이었다. 레이더, 원자 폭탄, 페니실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과학자들은 돈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다. 과학이 군사 국가뿐 아니라 자본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면서, 과학과 군대의 관계를 끊고 절멸의 위기에 맞서려는 과학자들이 ‘전쟁’을 시작한다. 켈리 무어는 이런 시도를 도덕적 개인주의자 모델(과학의사회적책임협회), 자유주의적 정보 제공과 자문 모델(시민핵정보위원회), 급진적 과학 정치 모델(민중을위한과학)로 요약한다. 1장과 2장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30여 년에 걸친 과학-국가 체계의 변화를 탐구한 뒤 활동가와 지식인들이 과학을 비판하며 제기한 주요 주장을 개관한다. 이어서 3장부터 6장까지는 과학과 국가의 상호 의존성이 커지는 동시에 자유주의적이고 도덕적인 개인주의적 정치 전통이 과학 비판의 흐름을 형성한 결과로 과학과 운동의 접점에서 생겨난 역사적 일화 세 가지를 각각 다룬다. 3장은 평화주의 운동이 발흥하고 과학자들에 대한 감시와 정치적 통제가 증가하는 상황 아래 1949년에 만들어진 도덕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단체인 과학의사회적책임협회의 기원과 발전을 살핀다. 4장은 핵무기 폐지 운동과 정치적 억압의 완화라는 맥락에서 1958년에 창설된 시민핵정보위원회의 발전을 다룬다. 5장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과학자들이 군대 관련 쟁점에 공개적이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 논쟁적 시기에 초점을 맞춘다. 1968년에 생긴 학생 기반의 과학행동조직위원회와 1969년에 생긴 교수 집단인 염려하는과학자동맹, 그리고 민중을위한과학의 결성 과정을 분석하면서 급진 과학 운동의 발전 과정을 돌아본다. 이어서 6장은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 민중을위한과학의 지부 세 곳이 펼친 활동을 추적한다. 마지막 7장에서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과학자들이 벌인 정치 활동이 연구의 진실성과 공익성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지닌 권위를 ‘해리’하는 과정을 상세히 살핀다. 누구의 과학이고 어떤 과학자인가 ― 삶, 사회, 그리고 과학 과학자와 사회운동의 연속과 단절을 중심으로 2차 대전 뒤 현대 과학사를 개괄한 이 책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의 과학자 운동에는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지식인 과학자, 대항 전문가, 전투적 사회운동가로 각각 대표되는 과학자 모델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권위가 추락하지만 과학 지식의 권위는 오히려 상승하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제도, 권력, 네트워크 같은 개념에 초점을 맞춰 국가, 사회운동, 전문직 종사자, 일반 대중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살펴야 한다고 켈리 무어는 주장한다. 네티즌 수사대와 집단 지성의 시대, 과학자들의 삶과 민중의 삶이 다양하게 갈등하고 연결되는 지금, 과학의 의미와 과학자의 구실을 되묻는 이론적 실천은 여전히 절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