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大韓의 希望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 (續) 大我와 小我 文法을 宜統一 浪客의 新年 漫筆 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선언 국한문의 경즁 오?날 대한국민의 목뎍디 근일 국문 쇼셜을 져슐?? 쟈의 주의? 일 한국과 만쥬 가족 ?샹을 타파? 동양쥬의에 ?? 평론 한국과 일본을 합병? 의론을 ?? 쟈에게 고?노라 문화와 무력 뎨국쥬의와 민족쥬의 만쥬와 일본 이십셰긔 ? 국민 일본의 큰 츙노 세 사? 유교 동포에게 경고? 승려 동포에게 권고? 愛國 二 字? 仇視?? 敎育家여 엇던 거시 츙신이라 ?을 의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
申采浩
신채호의 다른 상품
Ha, Sangil,河相一
하상일의 다른 상품
|
“四十 以上은 다 죽이여야 되겟다”는 소리가 新靑年의 입에 올으나린 지 오래이다 멧 마듸 條理 업는 演說로 一時에 先生의 尊稱을 어든 二十 年 前의 舊靑年 四十 以上들은 마치 價値 업는 物件이 意外의 時勢로 暴騰하다가 그 時勢가 지나가면 다시 暴落하듯시 아조 時勢를 일코 죽은 사람들이니 더 죽일 것도 업거니와 三十 以下의 新靑年들은 산 것이 무엇이냐? 過去를 否認하지만 玉塔도 부시며 寶塔도 부시여라 하는 露國 虛無黨 時代의 否認이 아니라 다만 消極的 否認?이며 時代에 落伍者가 되지 말자 불우지짓만 熱血과 勇氣가 업슴으로 다만 時代에 阿容하는 奴?가 될 ?이며 西間島의 十萬 名 養兵과 美國의 一億萬 元 借?을 壯談하던 舊靑年의 誇大妄想도 밉지만 二三百 名 留學生의 社會에서 每朔 三四 元의 費用을 듸리어 ?行하는 十餘 張의 速刷版 雜誌는 더욱 可憐하며 新舊 書籍 間 一 卷의 冊子도 보지 안코 다만 禮拜堂의 讚美와 무쇠 주먹 돌 근육의 狂歌로 生活하던 舊靑年의 擧動도 讚許할 수 업지만 政治的 經濟的 現實의 苦痛에서 逃脫하야 新詩 新小說의 避亂 生涯로 一生을 마주랴는 新靑年의 心理야 참말 哀惜할 만하다 이 가튼 頹敗한 志氣로는 設或 學業을 成就할지라도 學校의 敎師가 되거나 或 外國人의 會社의 職員이나 되야 自己의 糊口나 할 ?이오 設或 海軍 陸軍 飛行隊의 將校가 될지라도 그 所得의 月俸으로써 自家의 ?飽나 經營하며 貧窮의 同胞나 傲視하리니 ? 업는 者의 知識이 쓸데 잇스랴 마치 閔泳徽 민영휘(閔泳徽, 1852∼1935) : 조선 고종 때의 문신. 초명은 영준(泳駿).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 갑신정변을 진압했고, 국권 강탈 후 일본 정부의 자작(子爵)이 되었으며, 천일 은행(天一銀行)과 휘문 학교를 설립했다.
의 金錢이 公共 運動에 쓸데업슴과 一般일 것이다 아아 크로포트킨의 ≪靑年에게 告하노라≫란 論文의 洗禮를 밧자 이 글이 가장 病에 맛는 藥方이 될가 한다 ---「浪客의 新年 漫筆」중에서 |
|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단재 신채호의 사상적 궤적은 한 가지로 명명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식민지 시기 주체적 민족관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의식의 정립을 강조한 역사학자이면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 잡지 등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정론을 펼친 언론인이고,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작품을 쓴 문인이기도 했다. 또한 신민회, 상해 임시 정부 등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면서,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이처럼 신채호의 삶과 사상적 흐름은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은 채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 주체의 정립을 위한 시대와 역사의 소명에 따르는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 결과 그의 말과 글은 언제나 주저 없는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의 저술은 여느 지식인들의 탁상공론과는 다르게 과감한 실천을 요구하는 촌철살인의 언어로 빛을 발했다. 따라서 신채호의 사상과 글쓰기를 ‘수필’이라는 장르적 범주 안에 국한해서 논의를 하는 것은 사실상 처음부터 무리가 따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저술 가운데 역사와 전기를 다룬 글을 제외하고라도 신문, 잡지에 발표된 논설 등은 어느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역사적 안목과 비판적 세계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붓 가는 대로 쓴다는 식으로 정의되는 수필의 세계를 뛰어넘어 모순된 역사에 맞서는 저항적 지식인의 정론이라는 점에서 엄숙하고 강한 어조로 일관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글쓰기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민족 구성원들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깨우치는 것에서부터 한글, 소설, 종교 등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세계를 보여 주고 있어서 그의 산문 전반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구체화한 글쓰기의 양상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면, 애국 계몽주의자로서 자주적 근대화론에 입각한 글, 민족주의자로서의 민족 해방 운동을 천명한 글,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과 관련한 글이다. 그는 계몽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그리고 다시 아나키스트로 사상적 변신을 거듭했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와 시대를 정확하게 읽어 내고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고자 했던 지사적 결기에서 비롯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역사와 이념이 고루한 지식의 영역에 갇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탁상공론식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현실 타협론자들의 안이한 현실 인식에 대해서도 무엇보다도 단호했다. 이 때문에 그가 참여했던 여러 단체나 조직에서 중심에 있지 못하고 늘 비판적 아웃사이더로 살아야만 했다. 그에게 실천이 결여된 이념은 한낱 관념일 뿐이었고, 직접적 독립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 실력 양성은 허울 좋은 이상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세상 어느 한 곳에 절대 머무르지 않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이러한 자유는 일신의 안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유를 위한 희생이었으며, 민족정신을 올곧게 세우려는 의지적 선택이었다. 그의 글쓰기가 애국 계몽에서 민족주의로 그리고 아나키즘으로 진화해 간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 궤적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