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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밤 이야기 조개 무덤 평강이에게 헛된 슬픔 초콜릿과 어머니 방수를 하다 밤새 전자계산기 세탁기 땜빵 청개구리 기초의 순장 틈 소음에 대한 당신의 의도 태풍을 만나다 엄나무 모과나무 다시 엄나무 제2부 시 쓸 때와 씻을 때 귤을 까먹으면서 유산 낡은 생각이 주검으로 변해 있던 어느 날 고양이 냉이꽃 책 도둑 선운사 노을 지다 기시감 복고풍 그가 집에 없을 때 우리 동네 동장 아줌마 이사 가는 날 브랜드에 대하여 집으로 가는 길 극단적인 달 제3부 연필이 걸터앉았던 자리 이미지論 회전목마 새로운 질감 감각기관1 감각기관2 감각기관3 감각기관4 감각기관5 안개 걸린 미루나무 병정개미 대낮의 음모 어떤 눈동자 문패에 대하여 벽장 유감 밤의 도로 제4부 철학 강의 느려터진 문장 나쁜 예감 삶의 미로 결혼기념일 밀림 속의 골목 몹쓸 것들 생계의 적 둥둥…… 청춘을 거슬러 가는 우리는 불문율 거룩한 퇴폐 박물관에서 위험한 사유 당신을 읽다 저수지의 배후 해설__ 세계의 배후에 얼룩진 흔적을 이미지화하기 | 이성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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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슬픔
비닐봉지 안에 담긴 두부 한 모 물기 흥건한 두부 한 모가 달랑달랑 흔들린다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계집아이 수수꽃다리 담장 집 여섯 살 딸아이 오른손에 들린 부드런 두부처럼 새순을 닮은 아이가 대문을 통과한다 한 사내의 여자가 되고 친정집을 그리워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동안 셀 수 없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따뜻한 두부 조각들 정 가진 사람의 슬픔 한 모 --- p.18 조개 무덤 연탄불에 올린 석쇠 위에서 굳게 입을 다문 조개들 가끔 뜨거움은 단단히 가두고 있던 옹졸한 내부까지 열어주기도 한다는데 한없이 움츠러들며 연한 생살을 안으로만 끌어당기던 갯벌에서의 느긋하고 불성실한 소통 그러나 불꽃이라는 말을 알아버렸을 때 차갑기만 하던 몸 중심이 저절로 열리고 아, 이런 것이 끝이구나! 더운 파도를 밖으로 밀어내며 하나둘씩 쩍쩍 벌어진다 익은 살을 도려냈던 자리가 하나같이 매끈한 걸 보면 삶이란 들춰내고 보면 별것도 아니라는데 움막 내부를 이어주던 짧은 매듭 타닥, 불기둥에 끊어지고 울퉁불퉁한 껍데기를 벗어 던지며 하얀 속살을 보여준다 바닥과 지붕이 모호한 집터가 분리되어 탁자에 수북하다 오래전 어느 누추한 생이 이랬던가 조개 더미를 헤치면 오래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약해진 불꽃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기고 나는 다시 쓸쓸한 밤을 견뎌내기 위해 조개껍데기 안으로 들어가 불을 밝힌다 --- p.14 감각기관 4 ―물의 내부 발목이 잠긴다 허리가 잘려나간다 가슴통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 목까지 먹어치운다 입, 코, 눈을 차례로 파내고 정수리가 사라진다 아찔한 물의 수평 머리카락이 자라나고 눈, 코, 입이 선명하다 목을 지나 가슴이 드러난다 허리를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햇빛에 증발한다 하얀 발목이 모래 위에 발자국을 늘어뜨린다 검은 이빨이 찬란하다 윗집 홈통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 소리 몇 번을 고치고 또 고쳐도 불완전한 문장처럼 비의 양에 따라 홈통을 통과하는 속도를 가늠해보지만 물의 내부는 밀실하게 채워진 것이기에 섣불리 그 속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끔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방울이 바닥에 스며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순도가 가장 높고, 완벽한 원 정교한 만삭의 물방울이다 물의 부족이 주고받는 교신 물의 육체가 씨앗 속을 파고든다 --- p.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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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호 시인의 시는 두부 한 모처럼 젖어 있다. 두부 한 모처럼 부드럽게 각 잡혀 있다. 된장찌개용 두부 한 모처럼 구멍이 숭숭하다. 그 구멍에서 간기가 배어 나온다. 된장찌개용 두부 한 모처럼 자글자글 끓어올랐던 과거가 있고, 다시 한 번 끓어오를 미래가 있다.
―이정록 시인 시인은 세계의 내부로 들어가 그 배후에 얼룩져 있는 흔적들을 이미지화한다는 저 위험한 통행을 각오하는 것일 터. 그러니 시인의 이 어려운 작업에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이성혁 문학평론가 박순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헛된 슬픔』은 ‘뜨거운 불꽃에 쩍쩍 벌어지는 조개’처럼 삶의 내밀한 속살들을 하나씩 드러낸다. 그 틈새 안에 숨 쉬고 있는 속살은 비린내를 풍기며 살아 꿈틀댄다. 어느 순간 매립된 생살은 구획된 도시와 콘크리트 구조물, 그 사이에서 자란 공포와 우울증에 병들어 있다. 시인이 세계의 이면을 파헤치는 족족 너무나 충격적인 현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또한 그 현실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이해서 더욱 공포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고집스럽게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끝끝내 펼쳐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건축현장 기사이기도 한 박순호 시인은 펄펄 끓는 더운 속살을 드러내기 위해, 불꽃과 같은 시어로 틈을 벌리며, 자꾸만 부수고 있는 사람이다. “두부 한 모처럼” 부드러운 삶의 속살들 박순호 시인의 세계는 딱딱한 껍데기로 둘러싸여 어둠 속에 갇혀 있다. 시인은 유적을 발굴하듯 조심스레 그 안에 숨 쉬고 살아가는 존재자들을 들춰낸다. 그것들은 세계의 속살을 구성하고 있는 장기들이며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동력들이다. “두부 한 모”를 들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계집아이”(「헛된 슬픔」)나 “지하주차장 콘크리트 벽” 그 “거대한 북”을 두드리는 “청개구리”(「청개구리」),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푸른 깃대처럼” 서 있는 “동물성의 냉이”(「냉이꽃」)처럼 작고 사소한 것들이 그것이다. 또한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여리고 순한 초콜릿 한 조각”(「초콜릿과 어머니」) 같은 것들이다. 시인이 타인의 상처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딱딱하고 “예리한 정”으로 쪼아내는 것이 아닌 “나라는 액체가 당신이라는 벽에 녹아내”리는 것이다.(「방수를 하다」) 더운 파도를 밖으로 밀어내며 하나둘씩 쩍쩍 벌어진다 익은 살을 도려냈던 자리가 하나같이 매끈한 걸 보면 삶이란 들춰내고 보면 별것도 아니라는데 움막 내부를 이어주던 짧은 매듭 타닥, 불기둥에 끊어지고 울퉁불퉁한 껍데기를 벗어 던지며 하얀 속살을 보여준다 ―「조개 무덤」 부분 재건축 현장 흙을 파헤치는 곳마다 도난당했던 내 기억의 늑골이 발굴된다 매립되었던 꿈의 모서리가 노출되고 뾰족한 기억으로부터 물길이 치솟는다 (…중략…) 거대한 뿌리가 햇빛에 조명되는 시간은 짧다 ―「기초의 순장」 부분 패총으로 쌓이기 전의 조개와 매립되기 전의 기억들은 모두 연한 속살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애써 그 내밀한 곳을 들춰낸다. 그것이 사물들의 본령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뿌리가” “조명되는 시간은 짧”기만 하다. 세계의 배후를 기록하는 시 쓰기 박순호 시인의 시적 주체는 이토록 갇혀 있다. 또 “가슴에는 상처였다가 증오로 번진 얼룩이 지워지지 않”고 찍혀 있다. 때로는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썩고 있으며, “검은 얼룩이 져 있다. 시인은 그 “갇혀 있는 것들을”(「이미지論」) 꺼내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렇게 해방시킨 다음 현실의 세계로 방출하는 작업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주술을 행했던 흔적처럼 음산하다 어둠을 모시고 있던 자리는 왜 하나같이 검은 얼룩이 득실거리는 걸까 잊고 지냈던 물건들 옆구리마다 오래된 지문이 묻어나온다 내 몸 안에도 벽장 하나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어둡고 무거울 리 없다 반 쪼가리 생각들이 출렁거리는 밀실이다 ―「벽장 유감」 부분 시인이 주목하는 세계의 속살은 그것을 둘러싼 껍데기와 무관할 수 없으므로,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벽장 안에” 모셔져 있는 “유품”처럼 “음산”하고 “검은 얼룩이 득실”거린다. 하지만 해방의 전초 작업으로, 시인은 사물이나 사태의 내부로 파고드는 모험을 감행한다. 박순호 시인의 지난한 시 쓰기 행위는 사물의 배후에 얼룩져 있는 흔적을 읽어내는 일이다. 이런 시적 모험은 “구덩이에 빠지는 위험한” 밤길을 기어이 “통행”(「밤의 도로」)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한 통행을 각오하는 것은 껍질 속에 갇혀 있는 삶의 실재를 리얼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 드러난 실재를 인식할 때 삶을 해방시킬 수 있는 방도도 조금씩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