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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n H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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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에 젖은 길을 천천히 거닐며 자신의 삶의 실타래를 거꾸로 추적해서 확실하게 풀어 보려고 했다. 그 단순한 직물을 그는 결코 명료하고 만족스럽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이 삶의 길을 맹목적으로 걸어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지만 분노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니?" 쉬는 동안 알베르트가 물었다. 그러자 피에르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곧 조용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형의 질문 속엣 피에르는 모종의 어투를 느꼈다. 소년의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쓰는 말투였다. 거짓된 진실과 거만함이 풍기는 말투여서 피에르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큰형이 온 것은 기쁜 일이었다. 피에르는 큰형을 손꼽아 기다렸고, 저 아래 역에서도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런 말투로 자기를 대할 줄은 전혀 몰랐다. "아주 간단하지. 개나 고양이, 그 밖의 영리한 동물들은 모두 꼬리를 갖고 있어. 생각하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동요하는 마음에 따라, 또 생활감정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수시로 꼬리를 흔들어 표현하는 거야. 놀랍고 완벽한 아라베스크식 언어를 가지고 있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그런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제법 활기찬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해. 그래서 그들은 붓이니 피아노니 바이올린 따위를 만들어 내는 거야..." 천장이 높은 작업실의 고요하고 희미한 햇빛 속에 그의 그림이 세워져 있었다. 조그마한 들꽃이 몇 송이 피어 있는 풀밭 위에 세 인물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 있다. 여자는 사라진 기쁨에 실망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이다. 아이는 명랑하고 천진난만하게 꽃 속에서 놀고 있다. 이들 세 사람 위로 강렬한 햇빛이 넘실거린다. 햇빛은 의기양양하게 온 공간에 가득 넘쳐흐른다. 만발한 꽃잎 속에서도, 소년의 머리카락 속에서도, 그리고 우울한 여인의 목에 걸린 조그만 금장식에서도 마찬가지로 담담하고 정겹게 빛나고 있다. 여기에 그의 아들이 누워 있었다. 1시간 전만 해도 그 미소가 태양처럼 빛났고, 칭얼거리던 귀여운 목소리가 여전히 그의 가슴 깊은 곳까지 흔들어 놓던 그 아이가 말이다. 그 아이가 여기 누워 있었다. 그 아이는 이제 기계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육체에 지나지 않았고, 고통과 비탄의 절망적인 꾸러미에 불과했다. 그는 바로 일어나, 로스할데에서 하려고 했던 마지막 일에 착수했다. 우선 피에르의 침실로 들어가 커튼을 열어젖히고 서늘한 가을 햇살이 귀여운 아이의 작고 하얀 얼굴과 굳어 버린 두 손 위를 비추도록 했다. 그런 다음 침대 곁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쳐 들고,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그렸다. 그가 그렇게도 자주 관찰해 왔고, 갓난아이 때부터 성장하는 내내 익히 잘 알아 왔고 사랑했던 얼굴, 이제는 죽어서 성숙하고 단순해진 얼굴,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괴로움이 넘쳐흐르는 얼굴, 그 얼굴을 그렸던 것이다. 페라구트는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아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마지막으로 피에르가 만들어 놓은 모래성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집어넣었다. 축축한 모래의 습기 때문에 양손이 시려 왔다. 그는 모래 속에서 나무로 된 물건을 더듬어 잡고서 들어 올렸다. 그 물건이 피에르의 조그마한 모래삽임을 알아보자, 그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무서웠던 사흘이 지난 후 처음으로 목을 놓아 통곡할 수 있었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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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대저택 로스할데에 칩거하는 주인공 요한 페라구트는 저명한 화가로서, 두 아들과 아내를 둔 가장이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하며, 외롭고 낭만적인 사람이다. 부인 아델레는 착실하지만 유머 감각이 결여된 여인으로 자기중심적이다. 페라구트는 7년 동안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간 부부 간의 불화가 심해지자 큰아들 알베르트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의 학교를 다니게 하는 한편, 본채는 부인에게 내주고 자기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따로 자신이 지낼 방 두 개를 지은 다음, 그곳에서 그림 작업을 하며 독신자처럼 생활하고 있다. 소원해진 두 부부를 맺어주는 유일한 끈은 일곱 살짜리 아들 피에르이다. 그는 부모의 귀여움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고, 안채와 아틀리에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화가인 남편이 안채에서 하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부인은 언제나 남편을 손님 대하듯 한다. 어린 피에르는 이러한 가정의 균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얼어붙은 부부의 감정을 녹이는 꼬마 천사의 역할을 한다. 큰아들이 성장하면서 점차로 어머니의 편을 들며 자신과는 소원해지면서 화가 페라구트에겐 그림과 더불어 피에르야말로 삶의 희망이자 이유라 할 수 있다.
인도에 사는 화가의 죽마고우 오토 부르크하르트가 페라구트를 방문해 냉랭한 집안의 분위기에는 일시적으로 온기가 감돈다. 하지만 오토는 며칠 묵으면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친구 가정의 불화를 몇 차례 목격하고 페라구트도 그런 꼴불견을 친구한테 보인 것에 대해 참담한 심정이 된다. 오토는 요한에게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나자고 권유하고 요한은 친구의 제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림에 사랑을 쏟는 그 이상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가 없는 페라구트는 자식을 가운데 두고 결말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부부 관계의 괴로움 속에서, 새들이 주고받는 언어를 알아듣고 꽃들에게 상상의 이름을 붙여주는 천진난만한 피에르를 보며 심혈을 기울여 부부와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가족 그림을 그려 나간다. 어느 날 피에르가 갑자기 이상한 징후를 보이고, 아이의 상태는 점차 악화되어 간다. 의사의 진단 결과 뇌막염으로 판정이 나고 회복의 가능성이 극히 작은 가운데서 페라구트 부부는 아이의 회복을 위해 열성적으로 간호한다. 부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허무하게 숨을 거두고 요한은 피에르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결혼 생활도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을 직감한다. 요한은 절망적인 힘을 한데 모아 로스할데에서의 마지막 대작인 가족의 그림을 완성하고 아내에게 자신은 오토를 방문하러 인도로 가겠다고 통보하고 로스할데는 알아서 처분하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