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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리뷰 총점9.4 리뷰 13건 | 판매지수 3,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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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한국문화 90위 | 역사 top20 7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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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4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472g | 153*215*20mm
ISBN13 9788974836504
ISBN10 8974836505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현대사 최대의 비극
제주4·3 70주년 개정판
그것을 모르고서는 역사의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한다!

기억하라, 3만여 명의 애절한 통곡을!
되새겨라, 저항과 아픔의 역사를!


제주4·3 70주년
아직도 4·3을 모른다 하십니까?


입 막고 눈 감고 머리 숙이고 살아온 셀 수 없이 긴 시간. 부모형제 일가친척의 죽음에 눈물은커녕, 제사조차 숨어 지내야 했던 시간들. 영혼조차 자유를 얻지 못했던 그 긴 세월,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는 이제야 그 자리에서 통곡할 자유를 얻었다. 그렇다고 ‘4·3’이 침묵 속에 억울함과 슬픔을 넣어두었던 것만은 아니다. 1960년 4·19에서 시작된 ‘역사 바로 잡기’는 5·16쿠데타에 꺾이고 유신체제와 군사독재정권에 짓눌렸으나 결국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그 목소리를 높여갔다. 2000년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에 ‘국가에 의한 양민 학살’이라는 진상 보고서가 채택된다. 이에 국가를 대신한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66주기에 ‘국가 추념일’로 지정된 뒤, 또다시 찾아온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2018년 70주년을 맞으면서 다시금 통곡할 자유와 역사의 한 줄을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70주년을 맞아 제주4?3연구소 소장이자 시인인 저자 허영선 작가가 덧붙인 ‘자서’에 제주4?3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지금 섬의 가슴은 온통 붉은 동백입니다.
눈폭풍을 뚫고 나온 통곡 없는 통꽃, 통붉음이라
그해 겨울에서 봄까지 눈물 한 점, 곡소리 한 톨마저
죄였던 섬사람들의 운명을 대신합니다.
기억하라, 반드시 기억하라는 이 기억의 통꽃,
더 이상 피어날 수 없었던 어린 눈동자를 대신해
살아있는 눈동자들이 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아선 안 될 장면을 보았던 산 자들이
속눈물을 삼키며 또 한 번의 겨울을 보내고 봄을 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었으나 국민이 아니었던 그 시절,
수없는 꽃목숨들이 참혹하게 떠났습니다.
잊어라, 지워라, 속솜허라(조용히 해라)
강요당한 망각의 역사가
마침내 왜곡의 무덤을 뚫고 나와 파도처럼 솟구칩니다.
4·3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제주도의 70년 진실입니다.
이 땅의 분단을 원치 않던 마지막 목소리입니다.
이제 70년, 4·3은 반드시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나가야 할,
대한민국의 엄정한 역사입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제주 민중이
온몸으로 써내려간 ‘4·3’ 연대기


《제주4·3을 묻는 너에게》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어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인 지은이가 지극히 쉬운 문체로, 말하듯이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4·3이야기다. 하지만 한 자, 한 줄, 한 쪽을 허투루 지나치기가 어려운 깊이를 글의 안팎에 담고 있다. 지은이는 4·3의 발단과 전개, 그 끝나지 않은 역사를 섬 사람들에게 바짝 다가가 그들의 목소리, 몸짓 심지어 침묵까지도 담아냈다. 지은이 역시 그들 중 한 명이기에 독자는 더 가슴 저미는 생생함을 느낄 것이다.
저자는 8년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출간되어 일본과 중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제주4·3》에 더하여 집단 학살의 증언과, 특히 역사의 혼돈 속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아이들과 여성들이 당한 고통을 증언과 함께 깊이 있게 다루었다. 또한 강요배 화백의 ‘4ㆍ3 연작’ 가운데 여러 작품이 들어 있어, 그날의 참혹함과 억울함을 생생하게 더해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들의 목소리에만 의존해 쓰인 것은 아니다. 4·3은 역사이기에 해방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별면으로 붙이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더욱이 온 섬이 학살터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제주도의 4·3유적지를 자분자분 동행하며 ‘그날’을 설명해주는 부록도 책 뒤쪽에 있다. 이를 알지 못하면 우리들은 학살터 위에서 골프를 치고, 기업 수련회를 열고, 신혼여행·효도관광·걷기여행을 하는 셈이다.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그리 멀리 있는 남의 일이 아니다. ‘역사는 교과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게 하는 책. ‘내일’이 ‘오늘’, ‘어제’를 묻는다면, 우리는 주저함 없이 ‘4·3’을 들려줘야 한다. 《제주4·3을 묻는 너에게》는 그런 책이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제주4?3, 70주년에 다시 쓰는 자서
추천사
들어가기 전에_4·3을 묻는 너에게
들어가며_슬픔과 찬란함의 두 얼굴, 제주도

01 섬, 민중의 뿌리
해방의 첫발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
“우리 일은 우리가 한다”
대흉년, 넘기 힘든 보릿고개

02 폭풍 전야
관덕정 광장을 울린 총성
총파업!
탄압, 저항의 불꽃

03 폭풍 속으로
1948년 4월 3일!
‘메이데이’

04 잠 못 이루는 섬
거역하는 한라산
섬은 캄캄한 요새, 해안선을 봉쇄하라
포고령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미터!”
젊은 것이 죄

05 아, 슬픈 중산간
초토화 작전, 중산간 마을 휩쓸다0
계엄령!
동백꽃 목숨들
일본으로 떠나는 사람들
일본에서 돌아와 죽은 사람들, 떠난 사람들
영원처럼 길었던 겨울

06 한국전쟁의 회오리
예비검속, 되살아난 광풍
수형인, 행방불명된 사람들
한라산의 빗장 열리다
두 얼굴의 미국

07 집단학살, 증언들
“차마 사람이 사람을 죽이랴”
광풍, 사라진 사람들
아! 북촌리, 통곡할 수 없는 슬픔

08 아동과 여성, 그 숨죽인 고통
아이들은 시든 꽃잎처럼
아이를 가슴에 묻은 여인들
지독한 슬픔
만삭의 여인들, 그 숨죽인 고통
생애 가장 길었던 날의 기억

09 4·3 그 후
끝나지 않은 4·3, 그 후유증
고문, 삶을 비틀다
그래도 희망의 얼굴은 있었다

다시 봄날에 글을 마치며
구덩이에 묻힌 진실
평화와 인권의 세기를 나가는 여정
마침내 국가가 답한 4·3희생자추념일
제주 섬, 평화의 근거지
다시 봄날에… 슬픔 뒤의 미소를 떠올리며

참고 문헌
제주 4·3 주요 일지
4·3 답사기_4·3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
지은이의 말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이제 알겠느냐. 슬픈 역사, 그날 이후 제주의 서정은 그냥 그대로의 서정이 아니었음을. 섬 사람들은 왜 해가 뜨고 지듯이 잊을 수 없는 내면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지를. 수많은 주검들이 떠다니는 바다,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휘몰아치던 폭설의 한라산, 우왕좌왕 살기 위한 발자국 딛지 않은 곳 없으며, 이 섬 어느 곳인들 안전한 곳 있었겠느냐는 말을….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지은이의 말 중에서

오로지 살고자 산으로만 다니다 보니 ‘산사람’이 되었다던 중산간 마을의 할머니도 세상을 떴다. 살기 위해 이 땅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이들, 그들은 떠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캄캄하고 불안한 항로, 똑딱선을 타고 가며 얼마나 떨었는가. 쓰는 내내 그 시국을 살아내야 했던 그해의 눈빛들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4·3은 미래 세대, 후손들을 위한 희망이어야 한다며 힘겨운 기억을 꺼내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제주4·3이 우리나라 역사의 여정 전체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찾아내고, 제주4·3이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미래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우리는 발견해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그 역사적 진실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3만여 명의 무고한 희생이 그냥 허공에서 사라지고 땅속에 파묻혀버리고 맙니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강우일 (주교, 천주교제주교구장, 천주교주교회의 의장)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4?3은 시인이 써야겠구나’ ‘시인이나 소설가, 화백이 가슴에 파고드는 진실을 정말 잘 그려내는구나’ 하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2만 5000에서 3만을 헤는 4?3 희생자들의 처절한 모습, 오로지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며 살아온, 죽음의 문턱에 있었거나 죽음을 지켜봤던 사람들의 심정과 삶은 시인의 마음을 통해야 온전히 그려질 것 같다. 가슴을 에는 고통과 슬픔, 불끈 치솟는 분노도 시인이 제대로 말해줄 것 같다.
서중석 (역사학자, 성균관대 명예교수)

회원리뷰 (13건) 리뷰 총점9.4

혜택 및 유의사항?
포토리뷰 간결하게 43사건 전체 맥락을 볼 수 있는 책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J**e | 2022.04.03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제주 43에 대해서 잘 정리한 책이다. 분량도 적당하고, 감정적으로 너무 들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고, 사건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용이 길지 않게 잘 요약되어 있다. 강요섭 화가의 작품이 삽화처럼 적재적소에 들어가 있다. 삽입자료가 강화백의 작품이 시각적으로 사건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여러 권의 43 관련;
리뷰제목

제주 43에 대해서 잘 정리한 책이다. 분량도 적당하고, 감정적으로 너무 들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고, 사건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용이 길지 않게 잘 요약되어 있다. 강요섭 화가의 작품이 삽화처럼 적재적소에 들어가 있다. 삽입자료가 강화백의 작품이 시각적으로 사건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여러 권의 43 관련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전체 개요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47년 3월 1일의 발포와 48년 4월 3일의 남로당 무장 봉기가 사건의 발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가혹한 토벌은 실제 아무 상관없는 무고한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처음에는 제주 주민들에 대한 무시와 타자화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도 해 보았고, 유력 정치인이나 관심 세력이 있었으면 그렇게 무시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오늘 책을 읽고 생각이 한번 더 바뀐다. 이것이 뒤에 있을 625 한국 전쟁의 프리뷰이며, 수많은 목숨을 가져간 보도연맹 사건과 자국민을 완전히 방치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바로 연결된다. 이어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도강파와 잔류파에서 잔류파가 받아야 한 억울한 시선과 다를 바가 없다. 

 

419 민주화 운동 이후 잠깐 나왔던 진상요구는 516 쿠데타에 의해서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갔으며, 겨우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에 다시 요구가 나오게 되고 그것이 문민 정부 이후에 진상이 밝혀지게 된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소설 “화산도” “순이 삼촌” 등으로 알려졌다. 현기영 소설가는 이 작품으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군사독재정권에서는 참 흔한 일이기도 했다.  

 

제주 43은 여러 성격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무고한 주민들이 양쪽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건이다. 그리고 수십년간 진상요구를 주장하지 못하고 묻힌 사건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사건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우리가 드디어 민주 국가로서 국가의 공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주 늦었지만 한발 나간 것으로 평가한다. 진보 진영뿐 아니라, 보수 진영에서도 추념식에 참여하고 추념사를 내는 것을 환영한다. 제주도가 빨간 섬으로 남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평화의 섬으로 꾸준하게 유지되었으면 한다. 

 

제주 43의 여러 책이 있는데, 간결하고 건조하게 (한편으로는 시인의 감성으로) 전체 맥락을 쉽게 보고 싶으면 이 책은 괜찮은 선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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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피* | 2021.04.20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제주도, 그곳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 하나 없는 우리나라 남단에 있는 섬이다. 한때는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었고, 또 한때는 수학여행지로 각광받았으며, 지금은 언제 어느때든 힐링을 위해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본토와는 다른, 이국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 제주도가 70년 전, 경찰 눈에 띄었다 하면 그저 죽을 수 밖;
리뷰제목

제주도, 그곳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 하나 없는 우리나라 남단에 있는 섬이다. 한때는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었고, 또 한때는 수학여행지로 각광받았으며, 지금은 언제 어느때든 힐링을 위해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본토와는 다른, 이국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제주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 제주도가 70년 전, 경찰 눈에 띄었다 하면 그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섬 전체가 피비릿내 나는 학살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난 제주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제주 4.3 사건 유적지를 꼭 찾아다닌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건 아니었다. 시작은 그저 역사여행이었다. 원래 내 모든 여행의 목적은 역사여행이었기에, 역사유적지를 즐겨 찾아다녔던거다. 다만 내가 찾아다니는 시기의 역사는 대게 고대에서 중세까지. 근/현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는 어둡고 아프기만 한 역사였으니까. 근/현대 역사는 문자로만 봐도 분노에 치미는데, 그 장소를 찾아가게 된다면, 내 감정이 어떨지 두렵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 3년전쯤인가?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잡고 근/현대 역사유적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중 크게 나눈다면 일제강점기 관련 유적지, 광주 5.18 유적지, 제주 4.3 유적지 정도랄까. 그래서 그때부터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4.3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어떤 곳은 정비가 잘 되어있는 곳도 있었고, 또 어떤 곳은 차로는 진입하기가 어려운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찾아다녔다. 나 한사람이라도 그 장소를 기억하고, 그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그 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다.

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제주 4.3과 관련된 책을 읽어 보았다. 관련 역사 유적지에서 나눠준 책자나 안내판으로 짤막하게 읽었던 제주 4.3을,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제주 4.3 속으로

※책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제주 4.3의 역사는 본토의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해방 후, 미군정이 다스리던 시기의 미곡수집령은 제주와 본토가 동일했고, 남한 단독선거 반대를 했던 사람들은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로 이승만이 실시한 예비검속 역시 제주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도 자행되었습니다(본토 곳곳에도 예비검속 당시 학살터가 남아있습니다). 다만 제주는 고립된 섬이었기에, 본토보다 더 제제가 강했고, 그 결과과 섬 전반에 걸친 대 학살이었습니다.

제주 4.3의 시작

“쌀과 자유를 달라!” 식량 부족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생존의 늪에 빠진 도민들의 거친 숨결이 흘러나온다. 1946년이 저물고, 해가 바뀌어도 도민들의 삶은 무겁기만 하였다. 어떤 때는 배급 받은 밀가루가 질이 좋지 않는 데다 비료나 석유, 석탄분 등이 섞여 있어 이것을 식량으로 먹은 주민들이 구토를 하여 배급을 중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고개넘어 또다시 보릿고개, 밀기울까지도 구하기 힘들었다. 제주도는 이제 거의 빈사상태, 실오라기만 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p 040

1945년 해방이 찾아왔다. 일본에 끌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대거 조선땅으로 귀환했다. 제주도도 그랬다. 일본에 끌려갔던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로 돌아왔다. 드디어 일제가 물러간, 우리 땅에서 살아보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일제가 물러간 자리에는 미군정이 들어앉았다. 그래, 미군정이라고 하더라도, 일제처럼만 아니라면, 사람대우 해주고 먹고살길 마련해준다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그러지 않았다.

미군정은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경찰, 행정 그 모든 자리에, 일제시대에 일본에 충성했던 친일파들을 그대로 앉혔다. 거기다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시작했다. 일제의 쌀 공출과 다름없는 행태였다. 당시 제주는 일본에서 돌아온 도민들이 급증하여, 쌀 소모량이 급등하였는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미군정은 쌀, 보리를 공출하기 시작한 것이다(본토포함). 그렇게 제주에는 대기근이 돌았다. 제주도민들은 살기 위해 고구마를 먹고, 돼지사료를 먹었다.

※미곡수집령

미군정은 일제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모리꾼들이 쌀을 쟁여두는 바람에 식량난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한다며 1946년 봄 ‘미곡수집령’을 발표했다. 더구나 1946년 7,8월엔 보리와 밀처럼 여름에 거두는 곡식까지 내라는, 일제 때도 없던 ‘하곡수집령’까지 내렸다. 이는 농촌의 쌀을 강제로 징수하기 위한것이었고, 헐값으로 사들이는 것이어서 민중의 불만이 컸다. 더구나 일제 시기 공출을 경험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민의 원성은 드높았다. p067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대기근속에서 근근히 버텼다. 지금은 미군정이 우리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얼마 안있으면 제대로된 우리나라 정부가 들어설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때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이후로는 제대로된 우리나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힘쓴 김구가 있었고, 여운형이 있었다. 그렇기에 버틸수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역사적인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기념식에서 안세훈은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고 외쳤다. 이어 각계 대표들이 나와 발언을 하면서 대회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것이 이날 행사는 서울처럼 좌,우익 진영 두개로 나눠 진행되지 않고, 하나로 이뤄졌지. p 049

그때였다. 말을 탄 경관의 말발굽에 한 어린아이가 채어 쓰러진 것은. 그런데도 기마 경관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유히 가려했다. 성난 군중은 “저놈 잡아라” 쫒아갔고, 당황간 경관은 군중에 쫓기며 관덕정 옆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관덕정이 날아갈 듯한 총성과 함께 구경하던 6명의 주민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자리에 쓰러졌고, 8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제주 4.3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p 050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반도는 그 기쁨도 만끽할 틈도 없이 좌,우익이 나뉘어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오죽하면 3.1만세운동 기념행사를 좌,우익 진영이 각기 따로 진행을 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달랐다. 섬 주민이라는 공동체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제주도는 1947년 3.1 만세운동 기념행사도 좌,우익이 함께 진행한 것이다. 누가봐도 평화로운 그 행사장에 미군정은 경찰들을 배치했다. 이유는, 제주도민들이 외치는 한 목소리가 “외세타도” 였기 때문에.

미군정은 어디까지나 외세였고, 그들 스스로도 그걸 잘 알았나보다. 행여나 제주도민들이 봉기라도 할까, 지레 겁먹고 대규모의 경찰들을 그 곳에 배치했다. 뭐든지 과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미군정이 배치한 대규모의 경찰들, 그들이 그곳에서 대형사고를 일으킨다. 그 곳에 있던 기마경찰이 기념행사를 잘 보고 있던 한 어린아이를 말발굽으로 치고, 그대로 뺑소니를 친 것이다. 이를 목격한 제주도민들이 항의하니, 오히려 그대로 경찰서로 도주.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미군정은 그 자리에서 제주도민들을 향해 총을 쏴댔고, 그자리에서 제주도민 5명이 죽었다. 그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미군정과 경찰들은 이 날의 사건을 본인들의 과실이 아니라했다. 제주도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굳게 입을 닫았다. 진상규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은 이 날의 사건을 제주도가 빨갱이 섬이라서,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라고 규정해버렸다. 그날 이후부터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 되었다.

3.1사건 직후부터 제주도에 내려오기 시작한 서북청년회. ‘서북’이라 쓰인 완장을 찬 이들은 자금 모금을 한다는 구실로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주민들에게 강매하기도 햇다. 1947년 말부터는 경찰과 행정기관, 교육계에 근무하는 서청 단원이 늘어났고, ‘좌익 척결’이란 이름 아래 서청에 의한 테러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p 061

제주를 빨갱이 섬이라 규정한 미군정. 그들은 본토에서 수 많은 인력들을 제주로 보냈다. 그 중에는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이라는 단체도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단체였다. 그들 뒤에는 당연히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이용해 좌익세력들을 탄압했는데, 제주 역시 그 좌익세력에 포함된 빨갱이 섬이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미군정 및 이승만 세력은 서청을 좌익세력 탄압에 이용했으나, 그들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는 않았다. 해서, 제주에 온 서청은 말 그대로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그에 응당하는 댓가를 얻기 위해, 본인들의 생활비를 얻어내기 위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렇게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서청단원들은 어느새 제주에서 하나, 둘 씩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이 불을 켜고 있었다. 어미 같은 한라가 품고 있었던 오름들, 볼록볼록 꾸물거리는 듯한 그 봉우리마다 일제히 벌건 불이 올라왔다. 타오르든 불들은 한참 후에야 서서히 사라졌다. 그들은 밤새 그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것은 소위 산으로 간 무장대가 피워 올리는 불, 봉화였다.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었다. 봉화신호가 떨어지자 무장대는 공격을 시작했다. 도내 24개 경찰 지서 가운데 12개 지서, 서북청년회 숙소 등 우익 단체 요인의 집과 사무실이 표적이었다. p 074

“탄압이면 항쟁이다!”,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반미구국투쟁에 나서자!” 이 것이 두 성명의 요지였다. ‘반쪽 조국은 안된다’는, 통일조국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깔고 있었다. 그러니까 통일 정부로 가야한다는 것이 4.3의 구호였다. 셋째는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미군정에 댛나 저항, ‘반미투쟁’이라는 정치적인 색채를 분명히 표출하고 있었다. p 076

제주4.3사건이라는 명칭을 얻게된, 바로 그날.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 있던 남로당 세력들이 한라산에 봉화를 피웠다. 서청이 극우세력이라면, 남로당은 좌익세력이었다. 이 소수의 ‘남로당’, 그들은 분명 우리가 혹은 책에서 흔히 말하는 빨갱이라 말하는 그런 세력이 맞다. 하지만, 잘 알아야 한다. 해방이전까지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좌익사상을 가진 분들도 있었고, 우익사상을 가진 분들도 있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좌익은, 지금의 북한 같은 독재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한반도 남쪽은 미국이 차지하고, 북쪽은 소련이 차지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상을 내세운 반면, 소련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세웠다. 양 국가 모두 한반도에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부가 세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저 남과 북이 통일된 정부를 원했을 뿐이다. 이건 남로당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뒷배를 믿는 이승만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김구 선생이나 김규식, 여운형 선생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이 통일 정부를 원했다. 하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두고 저울질을 했고, 그렇게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수순에 들어갔다.

본토와 제주 모두에서 단독정부를 반대했지만, 제주도는 유독 극명하게 단독정부를 반대했다. 그래서 5월 10일에 치뤄질 단독선거도 역시나 반대했다.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움직이던 미군정은 이런 제주도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마련한 대책이 바로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무장대가 제주도의 한 마을을 방화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경찰의 자작극이었던 그 사건 말이다. 이 자작극으로 미군정 이하 경찰들은 제주에 대한 탄압에 박차를 가한다.

아무튼 이 ‘오라리 방화사건(1948년 5월 1일)’에 대해 김익렬 연대장은 경찰의 후원아래 일어난 서청, 대청 등 우익청년 단체들이 저지른 방화라고 미군정에 보고했지. 그러나 김익렬의 보고는 철저히 묵살당한다. 경찰측에서는 무장대의 행위라고 주장했다. p 080

나중에 이 괴한들은 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경찰에선 이 사건을 경찰을 가장한 무장대의 기습 사건이라고 주장했지. 끝내 이날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협상은 깨졌다. 이후 제주도는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로 치닫게 된다. p 081

그렇게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5.10단독선거를 거부했다. 제주도는 전국 유일하게 단독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았다. 선거를 거부한 모든 제주도민들은 분단되지 않은 조국을 원했을 뿐이었고, 그걸 실행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단독선거를 거부한 제주도를 향하여 더 심한 탄압으로 맞섰다. 물론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단 하나, 무장대&빨갱이 색출.

5.6월 보리농사를 짓던 조천리 한 여인은 토벌대가 올라오는 것에 겁이 나 보리밭에 숨다가 경찰에 들켜 총을 맞아 죽었고, 짚신 삼던 어떤 농부는 총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도망가려다 붙잡혀 희상당하는 등 까닭 없이 애꿎은 죽음이 이어졌다. p 092

제주는 단독선거를 거부한 대가로 더 잔혹한 탄압, 학살을 당했다. 그저 밭에 일하러 나갔을 뿐인데, 어린 아이를 데리러 갔을 뿐인데,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인데…. 모두 경찰과 군인, 토벌대의 손에 죽었다. 빨갱이라고 죽였고, 무장대를 도와줄 것 같다고 죽였고, 그저 거슬린다고 죽였다. 쉽게 말하면 그냥 아무 이유없이 죽인 것이다.

이 기간에 정부는 보도 금지, 언론의 입을 막아버렸다. 군인과 경찰에 의한 학살을 절대 보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공보부는 언론사에 무장대의 행위에 대한 논평이나 민간인 무차별 학살에 대한 동정어린 표현도 쓸수 없도록 했다. p 124

하지만 본토에서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중요한 5.10 총선거를 앞두고, 이런 대 학살극이 본토에 알려지면 안되었다. 본토는 그렇게 보지도, 듣지도 못한채 단독선거가 진행되었고,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그렇게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뭐, 분단이든 뭐든 말그대로 우리나라 정부가 들어섰으니, 제주도에는 평화가 찾아왔을까?

1948년 10월 경비대총사령부는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신설, 토벌작전을더욱 강화했다. 사령관에는 제5여단장인 김상겸 대령.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이 붙들려 갔고, 사람들이 사라졌다. 섬은 학살터, 비명의 공간으로 휘청대고 있었다. p 098

낮에는 토벌대 세상, 밤엔 무장대 세상, 무장대가 습격했다 가면, 토벌대가 들이닥치고, 토벌대가 가고 난 마을에 무장대가 들이닥쳤으니 오도 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죽고 죽임의 사태가 끝나기만을 가슴졸이며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마을에서는 어머니가 토벌대에게 죽음을 당한 사흘 후 아들이 무장대에게 희생당하는 비극도 생겨났다. 어느 마을에서는 아버지가 토벌대에게, 아들은 무장대에게 희생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희생을 가져온 때는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6개월간.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 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p 111

중산간 마을인 중문면 영남마을. 땅이 좋아 조 이삭이 어린아이 팔뚝만 하고, 고구마를 심어도 사람 머리만큼 자란다던 이 마을엔 16가구에 90여 명이 살았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한 50여 명이 희생당했다. 마을은 사라졌다. p 115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되었지만, 제주에는 여전히 학살이 지속되고 있었다. 더 강하게, 더 잔혹하게. 제주도는 대한민국에 속한 땅이며, 제주도민들은 대한민국이 지켜야할 국민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게 제주는 빨갱이 섬이었다. 제주에는 학살 광풍이 계속 계속 불어닥치고 있었다.

※1948년 10월 17일, 전과에 열을 올리던 송요찬의 포고문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죵료 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 미터 이외의 지역 통제. 즉 해안 마을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해당된다. 이 때부터 제주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전개한 초토화 작전 방법은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진 작전.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중국을 상대로 써먹던 그 작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해야할까.

모든 중산간 마을이 불탔다. 그럼 해안가 마을은 안전할까?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제주 해안가 마을 중 곤을동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곳은 제주4.3사건때 유일하게 사라진 해안가 마을이다. 한 군인이 무장대가 곤을동으로 숨어들은 것을 보았다고 하여, 곤을동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곤을동의 흔적은, 제주 북쪽 화북동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다. 제주 사람들에게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부는 일제강점기 보다 더 악독하고 지독하고 참혹한 짐승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주 초토화 작전을 앞두고 제9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제주로 출동 명령을 받은 제 14연대가 돌연 여수에서 총부리를 돌려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 것이다. 이른바 10월 19일의 여순사건 이다. p 100

초대 대통령이라던 사람, 이승만. 그는 제주 초토화 작전을 위해 더더더 군대를 제주에 보낸다. 그렇제 제주로 보내지던 군인들중, 제주 학살에 반대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이 지켜야할 사람들은 자국민인데, 그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댄다는 것은 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바로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4.3진압을 명령받았으나, 그 명령을 거부한 여수 제 14연대 군인들. 그들은 여수와 순천, 광양, 구례 등 남부 지역을 잇달아 장악하며, 주요 정부기관 및 건물을 접수했다. 하지만 정부의 진압작전이 본격화되었고, 이승만은 이른바 공산분자, 불순분자를 철저히 숙청할 것을 지시한다. 이후 사회 각계 모든 분야에서 불순분차 색출 및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후 약 2개월 뒤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이승만은 명령을 거역한 여수 제14연대를 악랄하게 진압하였다. 이후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그 유명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이승만은 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칼을 휘두르며, 본인만의 독재정권을 만들어갔다. 이승만 사후에도 이 법은 군사정권의 칼이 된다.

1948년 12월, 제주읍에 살던 이**은 집에 있다가 “도망치려고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발이 묶인 채 돼지처럼 매달렸다. 등뼈가 튀어나올정도로 고문이 가해졌다. 그렇게 닷새를 살고 나오자 살아남기 위해 1949년 일본으로 도피했다. 2005년 고향에 돌아와 정착한 그는 그때 고문으로 튀어나온 척추뼈 때문에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산다. 그때의 일을 말하면 고향의 친족에게 누가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아예 입을 닫고 유족 신고를 하지 않은 이도 부지기수다. p 128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끌려갔던 수 많은 제주도민들. 해방 후 내 나라 내 땅, 제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들의 눈 앞에 나타난건, 일제강점기보다 더 지독하게 내 이웃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들이었다. 그렇게 제주도민들은 꿈에서조차 치를 떨던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모르는 제주가 아닌, 적어도 내 한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일본으로 말이다. 그렇게 일본으로 밀항하는 제주도민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밀항도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밀항하다 걸리면,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일본에 정착하여 살다가, 잠시 가족을 만나러 제주도에 들렀던 사람들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심지어는 일본인이었으나, 일본으로 건너온 제주도 사람과 결혼하여, 시댁을 방문하기 위에 제주도에 왔을 뿐인, 조선어 조차 못하는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 누구는 행방불명 되었고, 누구는 빨갱이 낙인이 찍혀 죽었다.

1949년 1월경 해변 마을 주민들과 중산간 마을에서 해변 마을로 소개당해 온 사람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빙 둘러가면서 성담 쌓는 일에 나가야 했다. 청년들이 없는 마을, 성담 샇는 일엔 고사리손부터 여인들, 노인들의 주름진 손까지 동원되었다. 제주 읍내 어떤 여인은 성담을 쌓다가 남편의 시체를 보고 놀랐으나 비명조차 삼켜버려야 했다. 눈물을 흘릴 자유란 없었다. p 122

토벌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토벌대에 감시하에 생활을 해야했다. 토벌대는 그들에게 무장대 침입을 막기 위한 성곽을 쌓게 했고, 그 성곽안에서 가건물(함바집)을 지어, 모두 그 곳에서 살게 했다. 난 그 성곽(낙선동)과 함바집을 직접 가서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공간은 이름없는 또 다른 수용소였다는 것을.

토벌대, 그들이 저지른 짓은 학살 뿐만 아니라, 성폭력도 자행했다.

허벅 지고 물 길러 갔다 오다가 붙잡혀 강제 결혼당하기도 했다.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경우, ‘순경각시’가 되어야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여인들도 있었다.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지독한 고문이 이어졌고, 임산부에 대한 고문도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법이 없던 시절, 여인들은 위험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때때로 술자리에 불려나갔고, 겁간을 당하기도 했다. p 196

(생략) 남편은 거리에서 붙잡혔고, 산파 대신 와다닥 집으로 들이닥친건 4며의 순경. 다짜고짜 온갖 발길질이 가해졌다.그 피범벅 속에서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끝내 후유증을 앓는다. p 199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여성이라고 했던가. 제주 4.3사건 때도 여성들은 죽임보다 더 한 고통을 받았다. 토벌대를 만났을 때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해 죽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토벌대들은 수시로 여성들을 유린했다. 옷을 다 벗게 하는 건 기본이고, 그 상태에서 고문을 가하거나, 강간, 죽음에 달하는 폭행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떤 마을에선 주민들을 전부 모은 뒤 굳이 젊고 이쁜 처자들만 빨갱이라고 대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끌려간 여성들은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임산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삭인 임산부를 죽기 직전까지 폭행하기도 하고, 배를 과녁으로 총질을 하기도 했다.

이게 바로 토벌대가 제주 여성들을 향해 한 짓이다. 일제는 대놓고 ‘위안소’와 ‘위안부’를 만들어 대외적으로 활용했다면, 제주 토벌대는 겉으로 들어내지만 않았을뿐, 일제와 하는 짓이 다를 바가 없었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및 유족들 중에는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 유공자가 많다.

제주 청년들의 (한국전쟁)군 입대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양태병은 한국전쟁이 나자 입대를 자원했으나 신체가 약하다고 세 번이나 떨어지자 애원하다시피 해 겨우 군대에 갔다 올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 자원입대했던 한 주민은 “어느 날 갑자기 불려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죽는 것 보다 전쟁터가 훨씬 안전했다”고 회고했다. p 146

이로써 4.3은 끝난는가. 그랬으면 했다. 그런데도 4.3의 유혈 광풍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유족들에겐 또 다른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사상을 묻는 죄, ‘연좌제’라는 그물이었다. p 210

제주도에 있는 제주 4.3 평화공원, 그 안에는 기념관이 있다. 그 기념관을 보면서 놀랐던 점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유독 제주4.3 유족들 중엔 한국전쟁 유공자가 많다는 점. 대체 왜 그랬을까?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은 정부였는데, 왜 그정부를 위해서 전쟁터로 자원해서 나섰던걸까? 하고 말이다. 알고보니 그들이 자원해서 전쟁터러 나갔던 이유도, 단 하나였다. 제주라는 섬에 있으면 언제 토벌대에게 학살당할지 모르니,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를 지키며 죽는게 낫겠다고. 혹은 이미 빨갱이라는 도장이 찍혀있는 가족들, 내 자식들이라도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기 빨갱이와 싸우는 전쟁터로 나선것이었다.

누군가는 전쟁터로 가는 것이 또 다른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제주 4.3으로 인해 죽는다면 그 집안은 영원히 빨갱이 집안이지만, 한국전쟁에서 전사한다면 그 집안은 원수 빨갱이와 싸우다 죽은 국가유공자 집안이 될 수 있다. 제주에서 한국전쟁은 빨갱이 딱지를 땔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제주 4.3 학살은

제주도 전체에서 일어났다.

제주도의 유명 관광지, 그 곳은 제주 4.3사건 당시 학살터였다.

1948년 12월 18일, 무차별 학살극을 피해 중산간에 은신해 있던 사람들이 대거 희생당한 날이다. (생략) 웅장한 물소리를 내며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국민 관광지 서귀포 정방폭포, 동굴 속에서 숨어 지내던 동광리 마을 주민 등 많은 사람이 굴비 엮이듯 손 묶인 채 아득한 폭포 아래로 갔다. 폭포는 비명을 삼켜버렸다. p 176

1949년 1월,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성산포 지역 주민들이 고문당하고 취조를 당하다 희생당한다. 성산일출봉 앞 터진목은 성산면 온평, 난산, 수산, 고성 등 인근 망르 주민 수백명이 집단 학살당해 흘린 피로 흘러넘쳤다. p 177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의적인 판단 아래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사람들을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잡아들였다.(생략) 예비검속, 그 회오리 바람은 너무나 큰 학살을 불러왔다. 1950년 7월 말부터 8월 말, 예비검속자에 대한 군 당국의 집단학살이 대대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예비검속자들은 정뜨르비행장(現제주국제공항)과 알뜨르비행장(모슬포비행장) 등지에서 처형되거나 바다에 수장당하기도 했다. p 147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제주국제공항 남북 활주로 동/서쪽에서 있었던 유해 발굴 작업. 여기서는 385구의 유해를 발굴 할 수 있었다. 유해는 커다란 구덩이 속에서 조각난 뼈와 뼈끼리 뒤엉키고, 팔과 다리가 뒤섞인 채 겹겹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p 225

제주도 여행 필수 코스 제주국제공항, 꼭 한번 씩은 방문하는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그리고 수 많은 오름들. 지금은 그저 아름다운 제주 풍광을 보여주는 장소지만, 70여년 전만해도 그 곳은 수십, 수백, 수천명의 제주도민들이 비명에 죽어간 학살터였다. 제주에 처음 갔을 땐 이 모든 곳이 나에겐 아름다운 관광지였다. 하지만 그 다음에 갔을 때, 이 아름다운 곳들은 내 눈엔 그저 ‘학살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뜨르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및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김수열, 정뜨르비행장 中

제주를 방문하는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그 곳엔 아직도 수백, 수천의 실종자의 유해가 묻혀있다. 폭포수가 아름다운 정방폭포 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성산일출봉을 시작으로 터진목 해안까지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사살당했다. 탁트인 풍광이 보이는 서우봉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제주 수 많은 오름들에서도 동네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제주의 대부분 해안이 학살터였고, 제주의 대부분의 오름이 매장지였으며, 제주에는 학살터가 아닌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제주를 관광지로 볼 뿐이다. 그렇게 제주 4.3은 계속 잊혀져간다.

제주 4.3 사건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희생자의 80퍼센트 이상이 토벌대의 손에 희생되었다. 이것은 1949년 미군 정보 보고서가 80퍼센트가 토벌군에 사살됐다는 기록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무장대에 의한 살상 행위는 얼마나 되는가. 4.3 무장봉기 초기, 무장대는 경찰, 서북청년회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원, 그리고 군경에 협조하는 우익 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지목해 살해했다. 보복살해였다. 이런저런 형태로 무장대에게 희생된 사람은 전체 사망자의 약 10분의 1에 해당된다. p 140

미국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사상가 노암 촘스키도 “1945년부터 1949년 6월까지 미군이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지휘 통제했기 때문에 제주 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과 잔혹 행위에 대해 미국은 윤리적인 책임 뿐 아니라 실제적이고도 법적인 책임이 있다”라고 했다. p 160

먹고 사는게 전부였던 삶, 공권력은 글도 배우지 못한 자신을 ‘빨갱이’라고 매도해 재판을 했다. p 216

국가보안법과 연좌제를 들고 나온 군사정권은 제주 사람들을 반공의 이름 아래 족쇄를 채웠고, 4.3을 남로당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 사건으로 왜곡, 국정교과서에 그렇게 가르치도록 했다. p 229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중에는 분명 무장대의 손에 죽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체 희생자 중 10%정도밖에 안되었고, 이 희생자들 중 대부분은 토벌대의 학살에 대한 보복살해가 많았다. 그러니까 무장대가 살해한 사람들중 대게는 우익세력이나, 그들의 가족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물론 우익세력이라고 하더라도 무차별 학살은 잘못된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무장대가 살해한 10%의 희생자를 제외한 90%, 제주 4.3사건 희생자의 대부분은 누가 죽였는가? 바로 국가 공권력인 군인, 경찰, 서청, 토벌대가 죽였다.

모름지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 때, 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 남한의 치안을 책임진다던 미군정은 정말 우리의 치안을 책임진게 맞는건가? 과연 제주 4.3의 책임은 어디에 있고, 누구에게 있는가. 정말 미군정은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수 있는건가?

그 미군정을 뒷배로 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또 어떤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어디로 버렸을까. 권력이 그렇게나 달콤했을까? 어째서 자신의 권력유지, 독재를 위해 일제보다 더 잔혹하게 국민을 탄압하는 괴물이 되었을까.

이승만 이후의 군사정권은 또 어떠한가. 그들 역시 제주 4.3을 빨갱이, 폭도로 몰아갔고, 연좌제로 그들의 자녀들은 공직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아주 나중에, 故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여 사과하기 전까지, 제주 4.3은 그저 빨갱이가 일으킨 사건에 불과했다. 이게 바로 국민을 지켜야할 국가가 한 짓이었다.

노대통령이 사과를 한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주 4.3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고,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답은 각자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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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 온 몸으로 읽어야 하는 제주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삶* | 2021.04.18 | 추천3 | 댓글0 리뷰제목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인 박수근의 화법은 남들과 다른 데가 있다. 유화 물감을 조금씩 덜어 칠하고 말렸다가, 다시 그 위에 또 칠하고 말리는 평면화 작업을 통해 최종적으로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질감을 완성시킨다. 나에게는 제주, 그리고 4.3 사건 역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심적으로 형상화되어 결국 시꺼멓고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과 같은 느낌이 되어가고 있다. 서른 살이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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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인 박수근의 화법은 남들과 다른 데가 있다. 유화 물감을 조금씩 덜어 칠하고 말렸다가, 다시 그 위에 또 칠하고 말리는 평면화 작업을 통해 최종적으로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질감을 완성시킨다. 나에게는 제주, 그리고 4.3 사건 역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심적으로 형상화되어 결국 시꺼멓고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과 같은 느낌이 되어가고 있다.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는 이름만 알았던 4.3 사건이, 그 아름다운 제주에 다녀오길 거듭하면서 그 흔적을 만나고, 관련된 책을 읽고, 현재 진행형인 사건들을 접하며 계속 덧칠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멍이 숭숭 나서 쉽게 부서질 것 같은 현무암들을 직접 만졌을 때 느껴지는 의외의 단단함과 날카로움에 놀라듯 말이다. 

 

4.3은 알면 알수록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다. 간접적으로 접하는 이도 이러한데, '살암시민 살아진다'고 말하며 아픔과 눈물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수십 년을 살아와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대체 어찌 달래야 할지 방도를 찾기 힘들다. "강요받은 망각의 역사가 마침내 왜곡의 무덤을 뚫고 나와 파도처럼 솟구치(책머리에)'기에 '아직도 4.3이 무엇인지를 묻는 수많은 이들을 위한 새로운 대중서가 필요하다(지은이의 말)'는 이유로 쓰인 이 책은 '생의 찬란한 시절, 흑백사진 한 장 거둘 수 없이 떠난 젊은 남편을 평생 아릿하게 그리는 여인들, 꽃봉오리 애기 무덤을 쓰다듬는 시린 상처를 대면해야 하는 여인들, 열여섯 소년이 죄인 아닌 죄인으로 옥살이한 것도 모자라 연좌제에 걸려 자식들의 생마저 걸림돌이 됐다고 자책하는 늙은 가장', 뼈로도 돌아오지 못한 넋들, 후유장애를 짊어진 이들, 국가 공권력이 저지른 무차별 학살의 희생자들의 이야기다. 그 시절 그 섬에 살았다는 이유로 영영 봄날은 맞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상처는 드러내고 피고름을 짜내고 소독하고 약을 발라야 낫는다. 그 다음에야 흉터가 생길지 어떨지, 생기면 어떻게 할지 말할 수 있다. 당장 아프다고 덮어 놓으면 곪고 또 터지게 되어 있다. 잊는 것은, 맞고 당한 자의 몫이다. 그 마음을 있는 대로 풀어놓은 적도 없는 이들에게 지겹다, 그만하면 됐다, 잊어라, 힘내라고 말하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할 말이 결코 아니다. 적으나마 도움이 되려면, 물어봐주고 들어주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계속 끄집어 내는 일이다. 실체를 명확히 하고,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넘어가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책임감으로 올 2월 갔던 제주 여행에서 운 좋게 만난 우도의 숨겨진 보석같은 독립서점, '밤수지 맨드라미 - 산호의 한 이름이라고 한다 - '의 서가에서 이 책을 데려왔다. 그리고 매년 4월이면 읽는 4.3 관련 서적으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단지, 이 섬에 살았다는 이유로 이유도 모른채 살육의 광풍을 온몸으로 맞았던 그 이야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읽을 수 없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끝까지 읽어내기 힘들 정도로 유독 참혹하게 느껴졌다. 특히, 다음의 이야기를 읽고는 내가 애비가 되어살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 먹먹한, 참혹한 마음이 며칠이나 계속되어 무척 견디기 힘들었다. 

"거의 아기 엄마들이야. 부녀자들, 애기를 안아 있는 사람,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한 분 있어요. 촐왓에 전부 나오라고 해서 앉았어요. 그래놓고 신분 파악을 하였어요. 우리는 빙 둘러서 그것을 봤거든요. 한 젊은 엄마가 갈중이 적삼 입고 얼굴은 시꺼멓고. 애기를 안고 있었어. 애기 안은 사람은 그분밖에 없었어. 거기서 전부 쏘아버렸는데. 아직 젖먹인데 물애기, 그 아기를 양다리를 두 손으로 잡아가지고 생돌에 몇 차례 메쳤을 거야. 순경이 그렇게 했어요. 다섯 살 아이 하나는 총살할 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했지요. 그래도 쏘았어요.(p193)"

 

그럼에도 끝까지 참고 읽어낸 것은, 이 무고한 희생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4월 3일은 수업이 없는 날이었기 때문에 마침 문학 시간에 공부하고 있는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과 연관지어 4.3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피도 눈물도 더이상 나지 않을 정돌 바짝 말라버린, 입술도 표정도 없이 망각을 강요당한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내 자식들, 내 학생들 그 다음에도 이 땅에 살아갈 이들이 결코 이 같은 험한 일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말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4.3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답사 지도와 함께 각각의 사연과 추천 코스까지 실려 있다. 4월을 몸으로 함께하고 싶은 이들은, 답사 자료로도 너무도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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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15건) 한줄평 총점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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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평점5점
부모님이 제주도분들이라 꼭 궁금해했던 내용을 알려주어 감사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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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 2021.10.17
구매 평점5점
아이가 역사에 관심은 많았는데 정작 제주 4.3에 대해선 자세히 몰랐던것 같다며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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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럽 | 2021.08.31
구매 평점3점
자세하고 서정적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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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p*********a | 2021.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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