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자체는 굉장히 메이저한데 리그는 마이너한 그 간극 속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팀과 리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의 이름을 빌려 두들겨 맞는 일이 부지기수다. “K리그 그거 하나도 재미없잖아”, “그딴 걸 뭐 하러 봐”라고. 그러게, 내 말이 그 말이다. 왜 이딴 걸 보고 있을까. 하지만 이 질문 아닌 질문에서 경멸 혹은 자조의 뉘앙스를 걷어 내야 한다. 우리의 언어는 얄팍하고 생각은 거칠지만 “그냥”, “재밌으니까”, “어쩌다 보니”보다는 더 훌륭한 말을 찾아내서 사랑의 언어를 덧씌워야 한다. “나를 왜 사랑해”라는 애인의 질문에 “사랑하니까 사랑하지.”라는 대답 이외에는 다 사족이겠지만, 기어이 사족을 달려는 노력을 통해 그것을 더 사랑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배워 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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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깨닫는다. 어쩌면 이런 것 때문에 축구장에 오는지 모르겠다고. 모두의 염원이 모아지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가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는 시간과 공간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중독처럼 이곳을 찾는지도 모르겠다고.
괜히 눈두덩이 찌르르 떨려 오다가 마음속으로 괜한 타박을 한다. 님들, 어쩌다가 K리그를, 어쩌다가 성남FC를 만나 이 고생들이십니까. 사돈 남 말은 그만하자 싶어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내쉰다. 자세를 고쳐 앉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이렇게 짠한 우리끼리 마음을 모으고 또 모으는 것, 이게 바로 사람 사는 모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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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우리 팀 골키퍼가 찬 공이 저 멀리서부터 붕 떠서 가까워지더니 정점을 찍고서는 사뿐히 조명탑 불빛 속에 내려앉았다. 마치 개기일식처럼.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한 발자국씩 멀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내 그라운드에 떨어진 공을 차지하기 위해 선수들이 몸을 맞부딪쳤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선수들의 허슬 플레이도, 귓가에서 울리는 팬들의 허슬 응원소리도 아득한 곳에서 보이고 들리는 느낌이었다. 나 홀로 투명한 작은 구 속에 들어가 있고, 그 안이 점점 따스한 물로 차올라 나를 붕 띄워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구 또한 허공으로 부드럽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서히 이륙한 작은 우주선 안에서 기분 좋은 백색 소음을 들으며 점점 더 작아지는 지상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응원하는 자들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있다면 이런 걸까?
그때의 감각과 감정은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다. 조금 두려웠지만 많이 황홀했고, 그 황홀함이 어디까지 갈지 두려우면서도 웃으며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내 마음속 어느 공간과 나를 둘러싼 공간 모두가 꽉 찼는데 결코 그것이 위압으로 느껴지지 않는? 내가 체험자인 동시에 관람자이기도 한? 글쎄, 앞으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혼자만의 공간’을 느꼈지만 그 공간은 ‘고립의 공간’이 아닌 ‘합일의 공간’이자 ‘충만함의 공간’이었다는 사실, 팀을 떠나는 선수와 팬을 찾아온 선수와 그들을 응원하는 팬과 또 그 팬을 위해 이를 악물고 뛰는 선수들, 이 모두가 하나 되어 빚어낸 것이었다는 사실.
--- p.192~193
경기가 시작되자 “괜찮아, 하지만 포기하지 말자.” 걸개는 관중석 스탠드 앞쪽에 청테이프로 고정되었다. 난간 막대에 규칙적으로 가려진, 좌우가 뒤집힌 글자들에 어쩐지 자꾸 마음이 쓰여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던 찰나, 바람이 걸개를 밑에서부터 들어올리더니 관중석 쪽으로 훌쩍 넘겨 버리는 게 아닌가. 그러자 열심히 응원하던 서포터스 중 한 명이 총총 달려가서는 걸개를 다시 경기장 쪽으로 넘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드문 일은 아닌지라 그러려니 하고 말았는데, 문제는 이게 3분마다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자꾸만 되넘어오는 ‘포기하지 말자’ 걸개를 그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 되넘기는 모습이라니. 별것도 아닌 이 장면이 네 번째 반복될 때, 나는 얼른 눈을 비벼 흐를락말락 하는 눈물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부연 틈 사이로 걸개 속 ‘괜찮아’ 세 글자가 슥 들어왔다.
그래, 괜찮겠지. 괜찮을 것이다. 괜찮고자 한다. 내 팀이 아무리 부진해도, 사람들이 우리 리그를 아무리 폄하해도, 우리가 담대히 그것에 맞서고 서로를 소중히 지킨다면 분명 괜찮을 것이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는 싸구려 힐링 유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를 괜찮지 않게 만드는 것들과 싸워 가고, 상처받아 괜찮지 않은 친구들을 감싸 안을 때, K리그는 더욱 괜찮은 리그가 될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 정말로 괜찮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 p.347~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