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옥 작가의 '싸가지 없는 점주로 남으리'와 김완 작가의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읽었다.
두 책 모두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싸가지 없는 점주로 남으리'는 산자를 만난다는 것이고 '죽은 자의 집 청소'는 죽은 자(정확히는 죽은자의 흔적)를 만난다는 것이다.
산자와 만남에는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화해가 있다. 자본이 만든 톱니바퀴를 최전선에서 돌리는 서비스 노동자의 애환을 유쾌하게 그려낸 게 '싸가지 없는 점주로 남으리'다. 고객과 불가근 불가원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점주가 아슬아슬하게 고객과 거리를 늘였다 좁혔다 하는(작가 표현으론 오지랖이다) 걸 보는 재미가 있다. 꼭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에서 돈까밀로 신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 '빼뽀네 읍장'은 누구냐고? 빼뽀네처럼 일관성은 없지만 모든 고객이 빼뽀네 읍장이다. 다양한 얼굴로 매일매일 등장하는 고객은 오늘은 어떤 사건으로 신부님과 얘기거릴 만들까 작전을 꾸미는 것 같다. 작가가 유쾌한 글을 쓰는 역량이 있어 재밌게 술술 읽힌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모든 갈등과 대립이 해소된 후, 마지막 남아있던 갈등의 흔적조차 지워버리는 일관된 노동을 얘기한다. 편의점의 서비스 노동자가 자본과 고객 사이에서 노동자의 자존감을 지키려 고군분투 한다면, 죽은 자의 집 청소에서 서비스 노동자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았던 자의 모든 흔적을 지우는 수행에 가까운 노동을 얘기한다. 부처의 말씀을 옮긴 반야심경이 '불구부정'을 말하지만 어찌 범인이 더럽고 깨끗함과 불쾌함과 산뜻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이러니 작가가 만난 현장은 청소용역에 가깝다가도 어느 순간 수행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20대 후반 어느 날 아침저녁 이를 닦을 때만이라도 내가 살다가 죽는 유한한 존재임을 기억하자라는 다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평범한 나는 안타깝게도 내가 그런 다짐을 했다는 걸 40대 후반 어느 술자리에서 다시 떠올렸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찌보면 작가는 힘들지만 노동이라는 신성한 옷을 입고 뚜벅뚜벅 무소의 뿔처럼 걷고 있는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작가는 살았던 이의 흔적을 치우기 전 늘 살았던 이를 떠올린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독백을 때로는 대화같은 편지를 쓴다.
"당신이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 있었겠지만 당신은 많은 사랑을 받고 간 사람입니다"
그의 편지가 그에게 일을 맡긴 집주인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고인은 잠시 동안이라도 그의 편지에 머물다 갔을 거라 믿는다. 독자 또한 그의 독백에 잠시 머물었을 것이다.
언젠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의 방을 비추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카메라 앵글에 잡힌 빈 방엔 아니러니하게도 모두 재벌의 제품으로 둘러쌓여 있다. TV, 냉장고, 노트북, 하물며 장판과 벽지까지도 말이다. 삶까지 버려야 했던 지독한 가난은 그렇게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편의점의 컵라면과 값싼 도시락이 작은 지하 셋방에 요금 독촉장이나 도시가스 차단 예고장으로 옮겨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연결이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는 증거를 작가가 만난 현장은 증명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우리도 이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듯이 '싸가지 없는 점주로 남으리'와 '죽은 자의 집 청소'도 맞닿아 있다. 두분 작가의 글을 읽으며 다시금 살아 있음과 그렇지 않음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난 몇 년 선택적으로 책읽기를 줄였었다. 무엇을 얻고 쌓기보다는 내 안의 조용함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그런 시간을 가지면 좀더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겸손은 가진 게 없으니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고, 내안을 들여다보는 동안 지혜는 따라오지 않았다. 다시 책을 읽으며 읽고 싶다는 욕심이 다시 기승을 부린다.
모두들 행복한 설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