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의 발치는 해발고도 6,600미터다. 나는 비록 느리기는 했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올라갔다. 북벽 테두리의 갈라진 곳에 올라서자 나는 무릎까지 눈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그러나 지금 돌아가지는 않으련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빼냈다. 1미터, 1미터, 차근차근 올라가며 눈이 미끄러져 무너지지 않게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축축한 눈이 스패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합성수지로 만든 등산화 속까지 밀려들어온 눈 탓에 젖어서 쓸리는 소리가 난다. 신중을 기했음에도 눈이 조금씩 계속 무너져 내린다. 노스 콜 아래 대략 200미터 지점에서 나는 꼼짝없이 눈에 갇히고 말았다. 그야말로 진땀을 흘리며 이 사악한 눈과 씨름한 끝에 나는 겨우 빠져나왔다. 이런 조건 아래서 정상에 올라갈 가능성은 제로다. 왜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노스 콜에 오르려 하는 걸까? 간단하다. 올라가야만 한다! 매번 사투를 벌이며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나는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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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며 나에게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얻게 한 것 가운데 풍경, 광활한 풍경만 한 것은 따로 없다. 자연의 풍경은 곧 나의 스승이다. 풍경은 그만큼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번 등반만큼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깨달을 기회를 베푼 것도 없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이런 깨달음은 편협했던 나 자신을 벗어나 이 풍경과 혼연일체가 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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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명이 노스 콜을 밝힌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아침 7시 전이다. 얼마나 오래 나는 아래 갇혔던 걸까? 모르겠다. 크레바스 추락은 하산하자던 다짐이 멀리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내 의식 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다시 나는 오로지 정상에만 눈길을 맞추고 크레바스의 테두리를 따라 걸었다. 생사의 기로에 섰던 사고가 내 몸에는 충격을 안겼지만, 몇 주 동안 골몰했던 일, 곧 나 자신과 에베레스트의 혼연일체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크레바스 추락은 나를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각 상태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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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갈수록 더 짧은 간격을 두고 휴식을 취해야만 한다. 그러나 쉴 때마다 내 호흡은 빠르게 원래의 리듬을 회복한다. 나는 이내 회복된 기운을 느낀다. 가다 서다의 반복, 피로감과 에너지 회복의 반복이 내 걷는 속도를 결정한다. 이런 식으로 달팽이처럼 걷는데도 나는 30보마다 몇 분씩 쉬어야만 했다. 2시간이 지나자 휴식은 갈수록 더 길어졌다. 고도를 1미터 올라갈 때마다 걷는 것과 쉬는 휴식 사이의 간격은 어쩔 수 없이 더 짧아진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온몸의 힘을 쥐어짜야만 간신히 한 발자국씩 전진이 가능하다.
--- p.223
주변은 그야말로 적막함 그 자체다. 나는 뼈에 사무치도록 외로운 나머지 누구든 옆에만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등산가라 할지라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대체 언제쯤이나 나는 이런 목표 없이 살 수 있을까? 왜 나는 항상 야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런 미친 목표와 씨름하는 걸까? 나는 내 시도의 성공만을 믿어야만 한다고 몇 번이고 나 자신을 윽박질렀다. 나는 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말자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틈만 나면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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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의지만으로 나는 이제 더 갈 수 없다. 의식적으로 계속 가야만 한다고 다그치는 한,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빠르게 소진되고 만다. 나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힘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 긴장감을 풀어야만 한다. 빈손이 되어야 에너지가 다시 흘러드는 것을 잡을 수 있다. 잔뜩 힘주어 쥔 주먹이나 뻗은 손가락은 힘을 빼서 지치게 만들 뿐이다. 빈손이 되어야만 내 존재의 본질,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내 존재의 핵심을 이루는 에너지가 회복된다. 오르고 쉬는 리듬을 결정하는 것은 이 에너지다. 이 에너지가 나의 리듬을 만든다. 오르면서 중간에 갖는 휴식 시간은 매번 15보를 걷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길다. 이것이 나의 시간 리듬이다. 단계적으로 차분하게.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된다.
--- p.246
완전히 홀로 있으면서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일은 어렵다. 내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왜 이런 곳에 있어야만 하는지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자발적으로 택한 위험이기는 하지만 나는 윌슨처럼 온전히 신을 믿고 따를 수는 없다. 대체 어떤 신을 믿어야 하는가? 나는 우리 한 명 한 명 모든 개인을 돌봐주는 신이 존재한다고 납득할 수 없다. 내 바깥에, 우주의 바깥에 존재하는 창조주는 없다. 신을 바라보는 믿음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오로지 나를 둘러싼 세계다. 공기, 하늘, 땅, 서쪽에서 몰려오는 구름, 발걸음을 뗄 때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 마지막 두 발자국을 남겨놓았을 때의 설렘, 이런 것들이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심지어 나 자신의 의지도 이럴 때는 손에 잡힐 것처럼 구체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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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걸음 걸었는지 헤아리는 것은 포기했다. 사진 찍을 힘도 없다.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의 여유도 없다. 균일한 리듬으로 걷고, 쉬고, 걷기를 반복하며 나는 달팽이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오로지 이렇게 앞으로 나아갈 때에만 나는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는 리듬을 지킬 수 있게 해준다. 눈이 쌓인 노턴 걸리까지의 구간은 짧아 보였다. 나와 비박 자리로 점찍어둔 곳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골이 있는지 의문을 품을 사이도 없이 굳건히 위로 올랐다. 자신감이 커진다. 나는 혼자 있다는 것을 더는 고립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풀려남으로 느꼈다. 집착으로부터의 풀려남, 모든 욕심으로부터의 풀려남.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홀로 있다는 의식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다.
--- p.250
지금부터는 오로지 나의 한계와 벌이는 싸움이다. 이 한계는 매 걸음마다 확연해진다. 나로 하여금 무릎 꿇게 강제하는 것은 무기력함이다. 날씨가 더 나빠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은 내 힘을 더욱 소비시킨다. 그리고 늘 그놈의 하산이 걱정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갈수록 짙어지는 이 안개 속에서 일종의 희망, 이 시간과 공간의 피안으로 건너왔다는 호기심으로 벅찬 희망을 체험한다. 시야에 들어오면서도 갈수록 멀게만 느껴지는 정상이 안겨주는 절망, 힘을 빼는 절망을 이 희망이 눌러준다. 나는 이미 프로그래밍된 길을 간다. 나를 가로막는 모든 저항을 무릅쓰며 나는 고통의 채찍으로 올라가자고 다짐한다. 배낭에 이어 두 번째 친구인 피켈, 우리는 서로 버팀목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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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간다는 것은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 상실감, 느린 전진 속도와 함께 커져만 가는 고독과 맞물린다. 이제 마치 내가 나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것만 같다. 행동하는 사람과 관찰자를 전제로 하는 이런 상상은 세상의 꼭대기 끝에서 겪는 극한의 상실감을 한때나마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의식분열을 일으킨다. 이 상상은 악몽과 공포를, 심지어 죽음의 공포를 막아준다.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간 나, 갖은 고통과 씨름하는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 p.277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에 서서 나는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경험했다. 이번 등반처럼 내 존재를 뒤흔든 경험은 없다. 아마도 이번에 나는 경계를 뛰어넘는 도약을 한 게 아닐까? 물론 이 도약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이 도약의 의미를 나는 차분히 새겨야만 한다.
--- p.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