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불에 구워 배꼽에 얹고 자면
만사형통한다고
백 가지를 써봐도 돌이 최고였다고
아프지 말라고
약손처럼 얹어 주던 엄마가 꿈에 온다고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강에서 돌을 주웠다
평화하자, 너는 나를 그리고 나는 너를 쓰고
우주를 한다, 너와 내가 같은 칫솔로 이 닦고
춤과 노래가 사라진다 해도 피아에서
우리의 엄마가 올 때까지
돌과 물의 태도가 변한다 해도 피아에서
우리가 엄마가 될 때까지
--- 석민재 시 「피아(彼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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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으로 간신히 잡고 있는 밥줄을 놓치지 않으려면
남은 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식구들의 아슬한 앞섶을 가려 주거나
있는 힘을 다해 대롱거리는 순간을 삶 쪽으로 힘껏 당겨 앉혀 주는 일
아무나, 아무거나 가릴 것 없이 곁을 잡아야 할 때
간혹 그게 가족이라면 참 민망할 때도 있었다
균형을 잃으면 주인공이 된다
들썩이고 휘청이고 뒤집히는 동안
이렇게 처절하게 매달려 본 적이 있었던가
웃으며 박수치는 사람들을 위해 또 한 번 무대 가운데로 초대하는,
신이시여!
저에게 이 장르는 개그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음악이 멎으면 표정을 숨기며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
서로의 맨살이나 속옷 따윈 절대 기억하지 않는 원나잇의 한때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묵인한다
--- 권상진 시 「디스코 팡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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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은 내 친구
한 다발의 묶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해골바가지에 마시는 물은 당도가 적당해서 좋아
마음만 먹으면 해골을 들고 노래도 부를 수 있어
예를 들어 비 내리는 고모령에서 제주도의 푸른 밤까지 말이야
비 내리는 고모령은 곧 제주도의 푸른 밤이지
해골은 내 친구
항상 웃고 있어서 마음에 들어
105호 법정에서 너를 떠올렸지 참 잘했다 참 잘했어
진작 그랬어야지 해골은 웃어 주었어 해골은 튼튼한 바가지
주워 담을 수 없어야 제맛이지
주렁주렁 해골을 달고 아빠에게 갔지
와르르 쏟아버렸어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야
그래도 웃고 있는 해골바가지
--- 유승영 시 「너를 칭찬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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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가 정거장에 멈춰 설 때마다
으레 망자를 조문하고
축의금 몇 푼을 봉투에 넣고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앉은 승객들이
언제 사라진 줄도 모른 채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렸다
(……)
저마다 동승한 사연은 달라도
똑같은 처지에 놓인 똑같은 사람들끼리
목적지가 같은 줄도 모른 채
종착역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권수진 시 「마을버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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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에서 사람도 삼킬 만한 아가리로 스테이크를 물어뜯는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군주 같았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표정으로 스톱워치를 누르는 쇼호스트. 그러나 내 시간은 의지가 약해 전력 질주하는 귀를 따라잡지 못하고 맹수 앞에서 목숨을 포기한 초식동물처럼 눈을 감는다.
구덩이를 파고 개미를 노리는 개미귀신도 개미와 같은 꿈을 꾼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남의 생을 데려와 주연이 죽기 직전까지만 촬영하고 시놉시스를 지우는 꿈. 그러니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생을 요약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 서형국 시 「절반의 행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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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세요
내 마음의 깨진 유리창으로 우주가 한날한시에 털렸습니다
천국은 심심한 양털이불
주름을 밟고 우당탕탕 천사들이 뛰어가고
마지막 한 모금 담배 도넛을 만드는 동안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소매 뒤 감춘 꽁초가 저 멀리 던져질 때
아니. 별똥별보다 더 중독된 기분으로
물었습니다
내 동전만 한 우주는 어디로 굴러갔을까요?
--- 이필 시 「우주오락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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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할 거야? 씻을 거야, 시 쓸 거야? 응. 이렇게 대책없는 귀를 서로에게 들이밀어 시를 듣고 말을 하고. 그래도 팔딱팔딱 살아서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고 연탄 밑에 연탄처럼 밑불이 되자. 불을 선물하자. 한 줌의 빛이 되자. 우리는 지진계보다 감수성이 예민하지만 그림이 중요한지 대사가 중요한지 혹은 드라마가 중요한가보다는 입 안의 사탕이 아직 녹지 않음이 더 좋아서 화합이 잘되고 안녕한 것이지.
--- 석민재 산문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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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고 핵심은 ‘묵묵히’에 있음을 온밤을 함께 지새운 별들이 알려주었다. 귀 막고 입 닫고 관계를 단절한 고립무원의 세계에서 시만 파먹고 있으라는 얘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좋은 선후배를 가려 만나되 고요하고 정갈하고 겸손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낮추라는 뜻일 게다. 좀 가벼운 언어로 대신하자면 ‘나대지 말라’는 경고가 아닐까. 시인이 시를 쓰는 일보다 인적 네트워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품으로 평가받기보다 인맥을 이용해 이름을 알리려는 약은 행동을 경계하라는 것일 게다. 이미 별이 된 시인들은 시인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권상진 산문 「가짜시인 생존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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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의 내면을 외면한 것처럼, 낯선 공간을 구체적인 장소로 변화시켰던 것처럼 이곳으로, 변방으로의 장소 이동은 나에게 혁명이기도 하다. 나를 바꾸고자 하는 첫 번째 결단이었다. 이곳에서 문학의 자존을 세우고 싶다. 시다운 시를 쓰고 싶다. 스스로 개척하며 스스로 시의 원형이 될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인간관계가 아니다. 시인다운 시인들을 만나고 싶다. 시는 가르치는 일이 아니듯 시 쓰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자신의 무덤 속에서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다.
--- 유승영 산문 「나는 진보할 것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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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에 매료된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는 문학상을 주최하는 대부분의 공모 요강에 적혀 있는 ‘자격 제한 없음’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응시자에게 아무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실력만으로 당선자를 뽑겠다는 공표는 젊은 날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문학에 관심이 많고 등단을 꿈꾸는 습작생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불철주야 창작에 전념할진대 공정한 경쟁을 하는 곳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 점점 늘어나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 권수진 산문 「나는 시를 쓴다, 고로 존재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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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인간의 짧은 생애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현생에서의 누림을 초월한 창작이 목표이기에 스스로를 사회와 격리시켜 늘 고독하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표현의 조합을 찾아 유목해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다. 적어도 내가 아는 진짜시인들은 그러하다고 믿는다. 그러니 절실해 보지 않은 삶을 살아온 이들이 시를 쓴다는 것은 욕심일 수 있겠고, 실제로 이런 자들이 쓴 글에 나는 진정성을 느낀 적이 없다. 그러므로 고전이 목표인 수많은 가짜시인들에게 고한다.
당신들은 지금이 시에게 멀어질 순간이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자신이 써 내린 문장에게 무참히 학살당할 것이니……
--- 서형국 산문 「인간은 모든 기원의 실패작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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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시인-K 프로젝트에 나를 불러준 이는 서형국 시인이다. 그는 나를 소외된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외가 있다면 내가 세상으로부터 더 멀어졌다는 사실일 뿐, 그건 권력의 문제와는 무관했다. 시를 쓰는 세상만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문학 바깥에서 펼쳐지는 풍경에는 분명, ‘그들만의 리그’에서 삭제된 얼굴들이 있다. 수박을 먹고 웃음만 뱉어내듯 당신 앞의 수줍은 K이거나 수많은 우리의 K들일 것이다.
--- 이필 산문 「인간은 모든 기원의 실패작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