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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시선-457이동
김승희 | 창비 | 2021년 04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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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04쪽 | 234g | 126*200*11mm
ISBN13 9788936424572
ISBN10 8936424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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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사람
꼭 나를 속이는 것만 같아
친절한 사람은 피하고만 싶다
진실한 사람
내가 들킬 것만 같아
진실한 사람 앞에선 늘 불안하다

나는 친절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하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본심을 모르는 사람은 무섭고
진심으로 오는 사람은 진실의 무게만큼 무겁다
변심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고 변심이 너무 없는 사람도
박제…… 아니다, 아니다, 다 아니다

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
진심은 복잡하고 입체적인데
진심을 감당하기엔 내내 모가지가 꺾이는 아픔이 있다
내장과 자궁을 발라내고
단무지나 베이컨은 온몸이 조용한 진심이라고 한다면
진심은 한낱 고결한 사치다
말하자면 본심의 배신이자 돼지머리처럼 눌러놓은 꽃이다

(…)

무엇을 바라는가
내일이 없는 지 오래되었는데
무엇을 바라는가
진심이 바래 섬망의 하얀 전류가 냉장고 속에 가득 차 있는데
무엇을 바라는가

단무지와 베이컨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무엇을 무엇을 무엇을 더 바라는가
---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중에서
――――――――――――――――――――――――――――

괜찮아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
꿈꾸는 것은 아픈 것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틀꿈틀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 「꿈틀거리다」 중에서
――――――――――――――――――――――――――――

밭 귀퉁이에 뿌리를 둔 토마토 줄기가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줄기줄기 땅을 기어가고 있었고
토실토실한 토마토들이 주렁주렁
땀을 흘리며 빨갛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아깝게도 땅에 닿은 토마토의 뺨은 욕창이 나서 썩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가족을 부르고 싶었으나
그가 오려면 앰뷸런스가 와야 하기 때문에
혼자 토마토의 넘실거리는 화려한 생애를 보고 있었다
토마토는 물결, 무리 지어 흔들리는 하나의 붉은 물결
퇴원을 해서 이리 와야지, 토마토밭으로 입원해야지
토마토 어금니를 꽉 물고서
우리 함께……
--- 「토마토 씨앗을 심고서」 중에서
――――――――――――――――――――――――――――

어떻게 보면 진주와 산호를 키우는 세상
모래밭에 일그러진 진주도 섞여 있는
세상, 세계
내가 그런 것들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다 알 수도 없지만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 이 세계
하루 종일 땀 흘리고 수고하고
뺨도 때리고 뺨도 맞고
저녁에 해 떨어지는 시간에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지금, 여기는, 지상이라고
--- 「지상의 짧은 시」 중에서
――――――――――――――――――――――――――――

난 정말 시간이 없어,
글씨 쓰는 인간
허공에서 강하고 급한 바람이 휙 몰아칠 때
외출하기 직전 옷소매에 한쪽 팔을 집어넣다가
포스트잇에 글씨를 쓰네
격한 호흡
달려오는 이인칭
작고 사소한 우리의 약속, 다급한 처방전,
숨찬 짝사랑의 흘려 쓴 기록

(...)

포스트잇 한장이 냉장고 문에서 굴러떨어질 때
우리의 약속이 굴러떨어지네
난 정말 시간이 없고
바람도 없는데 낙엽처럼 가벼이 날리네
쓸 때면 늘 둘이 되는 포스트잇에
급하게 쓴 짝사랑의 격한 숨결
흘려 쓴 글씨들의 희망이 굴러떨어지네
텅 빈 우주 속으로 쪽지 하나가 굴러떨어지네
--- 「절벽의 포스트잇」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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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죽어가는 것보다 살아가는 게 더 무섭고 어려움을 김승희 시인의 시에서 배웠다지. “아픈데 정녕 낫고 싶지 않은 사람”(「못 박힌 사람」)처럼 세상 더 아픈 데만 찾아 못질하듯 시를 쓰니 그러했지. “지상의 모든 어두운 걱정을 담당”(「세상의 걱정 인형」)하니 말 못할 파란 심장으로 가득한 꽃병처럼 시인은 오도카니 앉아 오늘은 또 이렇게 말하는 거지. “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라나.
나는 단무지 마니아라지. 나는 베이컨 마니아라지. 나는 진실의 마니아가 꿈이라지. 나는 사람의 마니아를 꿈꾼다지. 진실의 마니아가 되고 싶고 사람의 마니아가 되고 싶어 나는 뼛속까지 노란 단무지를 씹고 하양 분홍 줄무늬가 앞뒤로 같은 베이컨을 굽는다지. 순간, 꿈틀거린다지.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꿈틀거리다」). 왜지. 왜 이 말이 이리 좋지. “토마토 어금니를 꽉 물고서”(「토마토 씨앗을 심고서」) 포스트잇에 옮겨 적는데 냉장고에 덕지덕지 붙어가는 배고픈 글씨들. 이를테면 소금, 식 초, 참외, 파, 사과, 무, 감자, 콩나물, 고구마, 시금치, 앵두, 마늘, 두부 두모라 할 적에 소소한 이 불림은 얼마나 소중한지. 포스트잇을 쓸 때면 혼자 있는 게 아니라지. 순간 둘이 있는 거라지. 작고도 사소한 둘의 약속이 “잠깐 손을 맞잡은 두개의 물방울”(「절벽의 포스트잇」)처럼 맺히는 거라지. 하고많은 것 가운데 왜 하필 나는 “만세는 함께 부르는 것 같지만 실은 혼자씩 부르는 것”(「맨드라미의 심연」)이라는 구절을 포스트잇에 베껴 쓰고 앉았는지 말이야 막걸리야, 혼잣소리하니 말 속에 막걸리 있고 막걸리 속에 말 있는 그것이 시라 시인이 메아리쳐주니 시 읽다 말고 나 어디 가냐고? 막걸리 사러 가지!
-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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