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동의 집인 행성지구
착취와 빈곤과 폭력의 현장에 다가서는
동시대 미술실천, 그 떠도는 작은 빛을 향한 행성적 사유의 기록
언젠가부터 인류세나 자본세 같은 용어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인간 생활방식의 급변에 따른 지구 생태의 현재를 일컫는 새 말들이다. 하지만 이 말들이 지칭하는 현상은 그리 새로울 게 없다. 기후변화, 급격한 세계화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확산이 불러일으킨 영향과 폐해는 2000년대 이후 일상 대화에서, 뉴스 화면에서, 대담과 논고에서 수없이 다루어져 왔다. 다만 새 말은 현상을 새삼 비추어내며 눈앞에 반사광을 드리운다. 사고에 균열을 내고 의식과 행위의 전환을 요청하는 한 줄기 섬광. 이 섬광에 다시금 시선이 모여들고, 익숙한 문제가 낯선 표현 속에 재부상한다. 그러나 새 말들은 개념의 유희 속에 현학적으로 소비되다 퇴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인류세와 자본세의 운명은 어떠할까.
이 책 『동시대 미술의 파스카』는 인류세로 불리는 지금 여기의 행성지구,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생명의 현존 방식에 문제의식을 둔 동시대의 미술을 다룬다. 착취와 빈곤, 폭력이 만연한 오늘의 세계에서 미술과 미술가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선 미술이 지상과 괴리된 순수한 영역의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 삶의 다양한 양상, 인간을 감싸 안은 지구의 생태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말을 기꺼이 공유하면서도 그 섬광에 갇히지 않고, 고통의 현장에 다가가서 외면당한 자/것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떠도는 무수한 작은 빛(lucciole)”(조르주 디디 위베르만)과 같은 미술실천들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들의 태도와 행위를 깊이 생각하고 세심히 관찰하여 그 의미를 정연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전한다.
글로벌에서 행성으로, 창작에서 실천으로
동시대성의 3대전환─기후변화, 탈식민화, 반세계화에 관한
미술의 물음과 그 의미
동시대 미술을 다루려면 미술에서 ‘동시대’란 언제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 책의 기준점은 1989년이다. 이 해에 베를린 장벽 붕괴, 텐안먼 사건, 월드와이드웹의 등장 등 전 세계 정치사회문화의 흐름을 바꾼 일련의 일들이 일어났으며 미술계 역시 크게 영향받았다. 이 사건들은 역사적 코뮤니즘(현실사회주의)의 종말, 독립적인 좌파 정치문화의 와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승리와 연관되며, 전 세계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배체계 아래에서 획일화되는 현상을 불러왔다. 또 인터넷의 대중화에 따른 새로운 인간관계와 교환체계, 직접민주주의 확산에 기여하는 디지털 시대의 물꼬가 트였다. 미술계에서는 ‘변방’ 지역에서 미술이 급성장했고, 동유럽과 러시아 미술이 유럽으로 들어가 지형을 변화시켰다. 중국 미술가들은 서구의 미술평론과 작품 유통체계에 도전하는 미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아랍이 경제 성장에 힘입어 미술의 허브로 떠올랐다. 비엔날레와 개인 소장품으로 운영되는 사립 미술관이 다수 생겨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다만 저자는 동시대 미술을 하나의 시대구분으로 수용하기보다는 1989년의 사건들이 불러일으킨 동시대성의 3대 전환, 곧 세계화, 탈식민화, 기후변화로 수렴하는 독특한 미술 현상으로 이해한다. 동시대 미술 모델은 천부적 ‘재능’보다는 현실에 접근하는 ‘태도’에 무게를 두며, 꾸준히 ‘개념적인 것’을 창안하고 그 예술적 효과의 구축을 목표로 삼는다. 미술실천의 양상도 확연히 다르다. 저자의 관심 대상인 동시대 미술가들은 탈순수 미술의 흐름에 위치하며, 대부분은 메이저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와 대중매체의 관심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 독립연구자이기도 한 이들은 형식과 내용에서 기존 범주와 매체에 얽매이지 않고, 조사연구는 물론 현장으로 떠나 원주민들과 만나고 때로 시위에 동참하면서 작업의 외연을 미술의 지평으로 확대하며 학제적(interdisciplinary)으로 실천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행성적 연대와 사랑,
그 ‘가능한 불가능성’이자 ‘불가능의 리얼리즘’을 향하여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부록을 제외하고 총 다섯 장의 본문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에서는 구체적인 미술실천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전에, 동시대 미술의 시점과 특성을 정리하고 구체적인 방법론을 정립한다. 제2장부터 제4장에서는 각 일곱 꼭지에서 기후변화, 탈식민화, 반세계화라는 큰 주제 아래 서른두 팀의 미술가들을 탐색한다. 저자는 특히 제삼천년기(2001-3000) 초반에 심미적 자율성과 개인의 자유 개념을 뛰어넘어 사회정의와 생태적 번영을 추구하면서 ‘반란적 상상 실험실’을 마련한 이들에 집중한다.
제2장 “기후변화: 동시대의 생태 전환”에서는 기후변화와 인권, 환경정의에 관련된 미술실천을 다룬다. 해양 플라스틱을 살아 있는 행위자로 바라보는 개념미술가 마텐 반덴 아인드, 바닷속 소리의 풍경을 수집하는 사운드 아티스트 야나 빈데른과 세계의 냄새를 채집하는 시셀 톨라스, 땅을 부동산으로만 생각하는 인식에 균열을 내며 토양의 초상을 선보이는 클레어 펜테코스트, 토양오염 문제를 다루는 멜친, ‘기후난민’ 문제에 집중하는 아르고스 콜렉티브를 만날 수 있다. 또 대기오염 문제를 주시하면서 온실가스배출권 거래제의 허점을 파고드는 에이미 발킨, 재난자본주의와 환경재난의 현실을 고발하는 이사벨 카보넬에 이어, 빙하 문제와 관련해서 타바레스 스트라챈, 올라퍼 엘리아슨, 플라토레지두, 세브랑 겔파, 오토 후데츠 등을 살핀다.
제3장 “세계화: 동시대성의 전 지구적 전환”에서는 세계화와 동시대 미술의 관계를 다룬다. 팔레스타인의 존재상황에 주목한 에밀리 자시르, 초국적 빅테크 기업의 지배 속에서 인간의 노동가치를 재평가하려는 마누엘 벨트란, 디지털 슬럼가인 딥웹을 실험장소로 삼은 !미디엔그루페비트닉, 동일본 대지진 사건과 원전 문제를 사유하는 오톨리스 그룹의 실천이 그러하다. 또 글로벌 종자 생산유통 시스템의 폐해를 다루는 마리아 테레자 알베스와, 식품생명공학의 배후를 들여다보는 크리티컬 아트 앙상블, 글로벌과 로컬 사이의 공간을 영상 설치작품으로 구현하는 에르긴 차부소울루도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미술시장의 세계화라는 측면에서 비엔날레를 하나의 유의미한 현상으로 탐색한다.
이어 제4장 “탈식민화: 동시대성의 탈식민적 전환”에서는 석유자본주의의 식민지배구조에 맞선 미술가들의 실천에 주목한다. 다중 정체성을 간직한 채 추방과 상실의 개인 경험을 역사에 연결하여 반(反)다큐멘터리로 구현하는 자리나 빔지, 빈곤포르노의 동작 방식을 폭로하는 렌조 마텐스,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사진들의 정오표를 만들고 박물관의 탈식민화를 시도하는 아리엘라 아이샤 아줄레, 국가 없는 민족의 현실을 다루는 조나스 스탈의 작업이 그러하다. 또 인종차별 문제와 아프로퓨처리즘의 미래를 고민하는 마틴 심스, 브라질 사회의 위태로운 삶에 주목한 베르나 헤알리, 오늘날 세계의 시중계급인 가사 및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시각화하는 라미로 고메스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제5장에서는 종합적 시도로서 우르술라 비이만의 영상작업들을 탐구한다. 본문 후에는 일백여 페이지의 부록을 통해 이 책의 서술과 관련된 논저와 각종 자료를 안내하고, 동시대 미술에서 주목할 만한 미술가 외의 인물들을 ‘인물열전’이라는 이름 아래 소개한다.
책 제목의 ‘파스카(pascha)’는 옛 히브리말의 그리스어 음역으로, 우리말로는 ‘지나가다, 건너가다’의 의미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동시대 미술가들은 눈에 띄는 것들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서서 기꺼이 가로지른다. 이들은 인간이 인간에게, 다른 생명에게, 행성지구에 가하는 착취와 빈곤과 폭력 앞에 멈추어 선 채로 현장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으며 속속들이 껴안고서 ‘건너간다.’ 저자가 표현하듯 행성적 연대와 사랑이라는 말로 아우를 수 있는, 이 미술가들의 뜨거운 실천을 마주한 독자들은 그저 글을 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더불어 현장을 겪고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될지 모른다. 국내 저자가 우리말로 지구미학(geoaesthetics)의 범주에서 동시대 미술을 다룬 첫 책이라는 점도 뜻깊다. 동시대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와 연구자, 미술과 삶의 문제 그리고 예술의 대항정치적 역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이 책의 독자
동시대 미술과 지구미학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 이상의 일반 독자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