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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아니면 파기
리셋 받을 자격 고통과 이름 없는 전사 1호 팬 『팬이』 추천사 |
저김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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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5089, 오늘…….”
“난 로봇?5089가 아니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의 표정이 글자 ‘오?’처럼 변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부정하는 건 위험했다. 특히나 최근 로봇?5089의 행동을 볼 때 더더욱. 곧이어 로봇 심리학자가 아인사 회장에게 은밀하게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의미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말소리가 작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거울 너머의 소리에 집중하던 그는 인이어를 귀에서 빼버린 뒤, 로봇?5089에게 바짝 다가가 말했다. “넌 로봇?5089가 맞아. 내가 5,089번째로 만든 로봇이니까.” (…) 그는 돌덩이를 삼킨 듯 무거운 마음으로 로봇?5089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널 뭐라고 불렀으면 좋겠니?” “팬이.” 그건 모두가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로봇은 스스로 이름을 붙이면 안 돼.” “내가 나한테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리셋하려는 거야?” “그 이상한 이름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날 리셋할 거야?” 로봇?5089는 집요했다. 이건 업그레이드나 정기 점검 같은 게 아니니까. 로봇 엔지니어는 로봇?5089로부터 등을 돌린 채 분명하게 말했다. “오늘은 하지 않을 거야.” 로봇?5089는 말이 없었다. ‘오늘은’이란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 pp.11~13 아이가 스스로를 로봇이라고 주장한 건, 아홉 살 늦가을 즈음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부부는 학교도 휴학시키고 방법을 찾아 고심했지만, 아이는 처음부터 계속 로봇 심리학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정신과 상담도 여러 곳에서 받았지만, 그것이 역효과가 되어 그때부터 아이는 입을 꽉 닫아버렸다. 오늘에서야 남자는 아이가 지금껏 로봇 심리학자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를 알아냈다. 리셋 때문이었다. 로봇 심리학자의 결정으로 문제 로봇들이 자발적 리셋을 할지 파기를 할지 결정된다는 기사를 아이가 인터넷에서 본 게 아닐까, 남자는 추측했다. 요즘 남자는 대본도 없이 즉석에서 애드리브로 연기하는 것 같았다.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지만, 아이가 남자에게 요구하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로봇 개발자였다. --- p.42 “너 이름이 ‘패니’ 맞지?” “내 이름은 ‘팬?이’야.” “설마 그 ‘팬’이 그 ‘팬’이야? 그 ‘펜’이 아니라?” 로봇?5089는 사고가 정지된 듯 침묵 속에서 워리를 보았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펜으로 종이에 제 이름을 적어주었다. Fan?이 워리는 흠 소리를 길게 냈다. 유치원 때 영어를 뗐으니 Fan이 열성 팬 할 때 그 ‘팬’인 건 알았다. 하지만 도대체 작대기 옆에 붙은 것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몹시 수상쩍은 ‘?이’였다. 워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딱 가리키며 로봇?5089에게 물었다. “끝에 있는 이건 뭐야?”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이’ 중 사전에 나온 스물아홉 번째 중 세 번째 뜻이야. 예를 들면…….” “‘멍청이’ 할 때 그 ‘이’?” 로봇?5089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워리의 질문이 이어졌다. “왜 이름을 ‘팬?이’로 지은 거야?” “내 팬은 아무도 없으니까. 나라도 내 팬이 되려고.” --- pp.94~95 “난 그저 예술을 하고 싶은 것뿐인데, 왜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화를 낼까.” 로봇?5089는 주황색 지붕 위에 올라가 걸터앉아 혼잣말처럼 하소연했다. 워리는 로봇?5089를 위로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지만, 지붕 위에 앉을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워리는 지붕 위의 구멍을 뚫어지게 보며 사다리를 잡고 선 채 냉정하게 말했다. “예술을 하든지 사람들의 사랑을 택하든지 하나만 선택해. 두 마리 토끼는 욕심이야.” “누가 그래?” “친할머니가 그랬어. 아빠한테 가장 노릇을 하든, 예술 나부랭이를 하든 하나만 하라고.” “너희 아빠는 어떻게 했어?” 워리는 입을 다물었다. 로봇?5089는 워리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결국 제가 먼저 대답했다. “난 이미 오래전에 택했어. 근데 내가 계속 예술을 하면 난 사라져야 해. 어떤 식으로든.” 자발적 리셋이든 파기든 로봇?5089에겐 다를 바가 없었다. 워리는 위술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걸 빼먹었다. 그럼 자신이 왜 로봇?5089와 엮이게 됐는지까지 모두 이야기해야 하니까.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워리는 로봇?5089를 보았다. 이 로봇에겐 예술이 생존의 문제였다. --- pp.137~138 위술은 로봇?5089 옆에 앉아서 물었다. “로봇인 네가 예술을 꼭 해야 하는 이유가 뭐니?” “하고 싶으니까요.” “그럼 해. 하고 싶으면 해야지.” “하지만 해선 안 돼요. 계속하면 자발적 리셋 시킨대요. 아예 파기하거나. 내가 예술을 하려는 걸, 사람들이 안 좋아해요.” 도대체 이 말만 사람들에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로봇?5089는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걸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도 싫어해.” 위술의 말에 로봇?5089는 쿡쿡 웃었다. 괴짜와 불량은 세상으로부터 왕따였다. 하지만 둘은 친구였다. --- pp.150~151 |
인공지능 로봇이 보급화된 사회, ‘로봇-5089’는 인간의 표정을 가진 마지막 로봇이다. 인간계에서도 로봇계에서도 배신자 취급을 받는 로봇-5089는 금기를 어기고 스스로 ‘팬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며,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로봇의 금기를 어긴 팬이는 위기에 처했다. 자발적 리셋을 하지 않으면 파기된다는 것. 그러나 팬이는 리셋을 거부한다.
또 다른 아이, ‘워리(지동운)’는 자신이 로봇이라고 주장하는 열 살 소년이다. 현실이 고통스러운 아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리셋이다. 로봇 심리학자 수젼을 만나 리셋을 시켜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팬이를 만나 함께 자발적 리셋을 받도록 설득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운다. 팬이와 워리, 그들은 ‘햄버거와 감자튀김’처럼 세트가 되어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찮은 기회로 행위예술가 ‘위술’을 만난다. 관객들의 호응을 바라는 대신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위술의 모습에, 팬이는 진짜 예술이란 ‘고통’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로봇인 자신이 고통을 느낄 수는 없어, 고민 끝에 워리와 함께 예술가들에게 성공을 위한 고통을 주는 ‘고통과’로 활동하게 된다. 몇 차례의 실패 끝에 ‘고통과 직원’으로 위술과 재회한 팬이와 워리는 서로 자주 부딪히기도 하지만, 조금씩 가까워지며 마음의 문을 연다. 팬이는 리셋과 파기 대신 자신이 원하는 ‘진짜 예술’을 할 수 있을까? 워리는 고통을 잊기 위한 리셋에 성공할 수 있을까? 세 사람이 만나 각자의 방향으로 성장해가는, 묘하게 따뜻한 이야기. |
“우리는 ‘진짜 나’로 살아가야 해.”
‘예술’을 하기 위해 ‘고통’을 느끼려는 로봇, ‘고통’을 잊기 위해 ‘로봇’이 되려는 아이 두 괴짜들의 예측 불가 성장기!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로봇과 소년의 우정,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압도적 몰입감! 코앞으로 다가온 4차 산업혁명 시대. 머지않은 미래에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진 로봇, 그중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로봇이 있다면 어떨까? 고통을 꿈꾸는 로봇과 고통을 잊고자 하는 소년,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두 인물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친구가 되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간다. 참신한 상상력이 빚어낸 『팬이』는 마치 한 편의 웹툰, 영화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빼어난 이야기성과 압도적 몰입감을 선사하는 『팬이』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로봇-5089는 결심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더는 숨어서 하지 않기로. ‘진짜’로 살기로. -본문에서 ‘꿈을 포기하고 리셋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파기된다’는 대기업 아인사 회장의 일방적인 통보와 강요에도 팬이는 자신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만든 로봇 개발자가 회유해도, 슬럼프에 빠져서 더 이상 노래를 만들 수 없어도, 팬이는 주저앉지 않고 마지막까지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근미래 시대 로봇이라는 다소 ‘독특한’ 주인공임에도 어쩐지 자꾸 그에게 마음이 가고, 응원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의 청소년들과 같이 자신의 목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팬이와 함께하며 고통을 잊기 위해 리셋을 바라던 워리가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내면적 성장을 한 뼘 더 이루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팬이』가 전해주는 감동에 젖어든다. 서로 다른 모습이어도, 각자 목표가 달라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친구의 상처를 보듬고, 타인을 위한 마음을 가지며 나 자신도 성장하게 된다. 세상에 겉도는 친구들의 예측 불가 성장기, 『팬이』를 지켜보는 독자들 역시 책을 덮으며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이미 바둑과 체스 게임에서 인간 두뇌를 앞선 AI는 소설 창작과 음악 작곡이라는 문학 예술 분야까지 진출할 정도로 초지능(Superintelligenc) AI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초지능 AI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으며, 어떤 모습과 기능을 띨 수 있을지’는 과학의 영역이며, ‘미래 인간과 사회 사이의 관계와 미칠 영향’은 철학·윤리학·사회학의 영역, ‘운용에 대한 규율과 법칙’은 정치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한 물음’은 태생적으로 소설의 영역이다.
과학기술 문명이 미래 인류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에 대해 1932년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끔찍한’ 상상력을 펼친 이래로, 문학에서는 공상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이라는 장르문학으로 자리매김돼 내려온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로봇 문제를 다루고 있는 김영리 『팬이』를 SF 장르소설로 묶으면 될까. 그러기에는 『팬이』가 제기하는 물음은 매우 실제(존)적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팬이』의 주인공인 로봇(로봇-5089, 팬이)과 소년(워리, 지동운)이 자신의 실존에 관해 던지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소설, 서사)문학이 탄생한 이래로 물어왔고, 존재하는 한 물어야 할 본질적인 물음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 로봇이 되고 싶은 소년과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고통을 느끼고 싶은 로봇.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 로봇이라는 가면을 쓴 소년과 컴퓨터 기억장치를 영혼으로 여기며 인간이라는 가면을 쓴 로봇. 두 페르소나 사이의 갈등과 우정 그리고 성장. 그 과정 중에 제기되는 과학기술 문명 발달이 가져올지 모를 미래 인류에 대한 물음들이 『팬이』 안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잠시 일손을 놓고 『팬이』 곁에 앉아 귀 기울여보시라. 당신은 분명히 “단 하루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다”고 ‘또 다른 나’를 노래하는 ‘팬이’의 진정한 팬이 될 것이다 - 박경장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