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南星)이라는 그의 호(號)와 남성당한약방이라는 상호의 뜻을 물었다.
“남성이 수를 맡은 별이라고. 목숨 수(壽)자. 남성이 비치는 곳에는 오래 산다는 그런 속설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건데, 남성당을 상호로 쓰고 남성을 아호로도 쓰라고 했어요. 남극노인성이란 별자리를 딴 거지.”
-손자가 오래 살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어주신 겁니까?
“약방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다들 오래 살라는 뜻이지. 또 그 별은 보일 듯 말듯하면서도 그러나 역할은 한다, 앞에 나서지 말고 항상 제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뜻이지요.”
-할아버지가 그런 깊은 뜻을 가지고 지어주셨구나.
“별빛처럼 빛이 아니지만 뭔가 공헌을 하고 있거든. 하지만 공헌했다는 표를 내지 말고 그렇게 살아라….”
---「취재의 시작」중에서
김장하는 8세에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20세에 사천 석거리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연 후 사실상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27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석거리에 모셔 부양했고, 29세에 자신을 길러준 계모의 장례를 치렀다. 30세에는 홀로 된 아버지를 위해 새어머니를 모셔왔고, 42세에 아버지를 보내고 남은 새어머니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팔아 노후를 보장해드렸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아래 동생들을 키우고 시집·장가 보내는 것도 장하의 몫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중에서
“장하는 딸과 아들 결혼식에 청첩장을 돌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수많은 사람이 하객으로 참석했는데, 축의금을 받는 창구 자체가 없었던 겁니다. 참석한 하객들은 최상의 음식을 대접받았지만, 일부 불쾌하게 여기는 이도 있었죠. 자신은 모든 지인의 경조사에 다 참석해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전달하고도 받지 않으니 ‘돈 있다고 유세하는 거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요.”
---「조용한 소년 김장하」중에서
김장하는 1992년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을 받게 되었는데 전수식 참석을 거부하여 경남교육청이 난리가 났다. 표면적인 거부 이유는 ‘약방을 비울 수 없어서’였다. 당시 관선 교육감이 ‘내 목이 날아간다’며 사정사정하는 통에 결국 참석은 했으나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화다. 2003년 1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부산에서 개최한 오찬간담회와 토론회에 1번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불참했다. 역시 같은 이유였다. 나도 사람들과 어울려 선생과 몇 번 점심을 먹은 적이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일정 시간이 되면 “손님이 기다린다”며 어김없이 일어섰다.
---「문전성시」중에서
“1987년 2월에 제1회 명신고등학교 졸업식이 열렸을 때였다. 키가 그리 크지 않으신 아주머니께서 운집한 학부형들의 뒤쪽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까치발로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한 교사의 눈에 띄었다. 이사장 부인이셨다. 살며시 다가가 단 위의 자리로 옮기실 것을 권하자 극구 사양하시면서 자기가 여기 온 것을 어디에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다. 이윽고 졸업식이 마치자 이사장 부인께서는 조용히 버스를 타러 학교 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남편의 필생 사업인 학교의 첫 졸업식에 와 보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겠지만, 행여 누가 보고 폐를 끼칠까 보아 조심하는 모습에서 그들 가족의 마음 씀이 참으로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중에서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고 하신 선생의 말씀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헌법재판관 문형배의 경우」중에서
개교 초기 잠시 있었기는 했다. 커다란 책상과 명패, 소파 등이 있는 교실 1개 크기의 이사장실이었다. 처음엔 으례히 그런가 보다 하고 거기서 집무를 봤는데, 한 달 정도 지나 보니 학교 시설이 부족한 데다 이사장이 자리를 차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장하는 교장에게 이사장실을 비우라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양호실로 쓰도록 했다. 특별한 행사나 회의가 있는 날 말고는 학교에 자주 가지도 않았다. 이사회도 교장실에서 열었고, 결재할 일이 있으면 서무실에서 했다. 학교에 갈 때도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갔다. 이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학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 있는데 이사장실만 없는 학교」중에서
“이사장 퇴임식에는 집사람도 같이 참석했거든.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놔버리니까 섭섭하제?’ 하고 물어요. 왜 안 그렇겠어요? 서운하지. 그런데 내가 그때 ‘섭섭할 것 하나도 없다. 우리 둘이 만날 때 빈손이었잖아. 지금 이거 내버려도 우리 먹고 살 만큼 남아 있고, 빚진 게 하나도 없는데 뭘 서운할 게 있나.’ 그랬지.”
-속으로는 서운했지만 사모님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죠?
“그렇지.”
---「100억대 학교를 무상헌납한 까닭」중에서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 묘역’이 있다. ‘백촌강상호지묘(栢村姜相鎬之墓)’라는 묘비 하나만 있었다.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묘비였는데, 뒷면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작은 시민이.”
‘작은 시민’이 과연 누굴까 궁금했다. 수소문 끝에 김경현(1966~)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이 1999년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왠지 이 ‘작은 시민’이 김장하 선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경현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걸 도대체 누구한테 듣고 나에게 확인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누구한테 들었는지 그 이야기부터 좀 해보세요.”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니고요. 그냥 내 느낌이 아무래도….”
끝내 그의 실토(?)를 받아냈다. 내 감이 맞았다. 김장하 선생이었던 것이다.
---「친일청산과 평등세상을 위하여」중에서
“상담소 이사회에 기금이 1억이 있고, 이 기금을 활용하여 여성들 피난시설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렇게 의논을 드렸죠.”
“아 좋다고, 시설을 하자, 아주 전폭적으로. 그동안 그런 생각하고 있었냐고, 자기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냐 그러면서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주셨어요. 다른 이사들이 불평 안 하도록 자기가 방패를 쳐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집을 짓기 힘들 거다. 그
래서 김장하 이사장님 아니었으면 이 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학대받는 여성을 구조하라」중에서
-이 사진도 그렇고, 저 사진에서도 그렇고 김장하 선생은 항상 끄트머리에 있네요?
“잘 보셨네요. 가운데 자리에 이사장님 자리라고 딱 놔두죠? 사양하세요. 여기서도 제일 끝에 앉아계시죠? ‘아유 나 그런데 안 간다’면서 스스로 구석진 자리에 항상 가세요. 사람들이 막 이렇게 모시는 걸 또 굉장히 싫어하세요.”
-그런 것 같네요. 본인이 돋보이는 걸 싫어하는.
“바로 이런 거에요. 참 지적을 잘 하셨는데, 우리한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시려면 가운데 앉으셔야 돼요 하고 자리를 마련해도 안 앉으셔.”
---「학대받는 여성을 구조하라」중에서
“버렸으면 미련없이 버려야지. 줬으면 그만이지. 감사패 그거 뭐하려고….”
9일 오후 5시 경상국립대 행사장. 원래 선생은 원치 않았던 자리였다. 하지만 받는 쪽에서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참석한 자리였다. 그래서일까? 행사 내내 선생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지만, 표정은 계속 불편해보였다. 그럼에도 예정된 인사말은 A4 용지 1.2매가량을 꼼꼼히 써오셨다. 그 마지막 대목은 이랬다.
“재단 설립 20여 년이 지난 오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뒤떨어진 지역문화를 발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고 남은 재산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해서 죄송합니다.”
---「수십억 남은 재산 기부하고 60년만에 은퇴」중에서
“정치인들은 다 옆에 누구를 배석해가지고 몇 시에 언제 어디서 다 이런 식으로 계획을 짜가지고 나오라고 안 하나? 그분은 절대로 거기 나가는 분이 아니고 정치인들 하고는 안 만나는 분이다. 그래서 만나고 싶다면 그냥 한약방으로 찾아가면 된다고 그랬지.”
당시 대통령 후보 보좌역이었던 김성진(1963~ ) 씨는 그런 사실을 보고했고, 노무현 후보는 건너편에 차를 세운 뒤 횡단보도를 건너 남성당한약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약 50분 간 만나고 나온 노무현 후보는 김성진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 좋은 분을 만났네. 정말 좋은 분이다. 정치인을 만나 훈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다.”
훗날 김장하 선생한테 “왜 훈수를 좀 하지 않으셨어요? 희망이나 바람을 이야기해줄 수도 있었잖아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정치 10단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라고 짧게 답했다.
---「권력과 정치를 멀리하는 이유」중에서
앞서 말했듯이 북한의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된 것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했을 때다. 적어도 김일성 종합대학은 북한에서 최고의 대학이요 세계 100대 대학에 든다니 교수진은 어떻고 시설은 어떠며, 학생들의 열심히 학문 탐구하는 모습이라도 볼 거라 생각했는데 본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안내한 곳은 김정일 위원장의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이야기로부터 재학생활 연구활동 및 졸업할 때까지의 전시실을 14실이나 돌고나니 김일성 종합대학의 방문은 끝이다. 서운하기가 말할 수 없다. 이번 방문에서 이북에 계시는 형님의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돌아가자니 마음 한 구석에 또 피가 맺히는 느낌이다. 그래도 이북에는 동토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형제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평양을 떠난다.
---「감시받고도 빨갱이 콤플렉스가 없는 노인」중에서
지청장은 굳은 얼굴로 그 잔을 자신이 마셔버렸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검사들이 수군거렸다.
“그래서 술판이 깨져버렸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자리를 피했어야 하는데….”
선생이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옆자리에서는 술 권하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선생과 마주 앉은 나도 술잔을 앞에 두고 있었다.
이처럼 김장하는 한 번 결심한 일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자기 절제력이 대단했다. 아무리 반가운 사람이 찾아와 점심을 먹더라도 약방 근무시간이 되면 딱 끊고 일어선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의 화내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김장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최관경 교수도 그랬고, 이용백 명성한약방 원장도 같은 말을 했다.
“김장하 선생이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화난 것이다.”
---「검사의 폭탄주를 거절한 지역유지」중에서
“요새 만 원 어치 봉사를 하면서 고아원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백만 원 어치 피알(PR)을 한다든지, 그 봉사의 가치를 되받으려 한다든지, 반대급부를 바라고 봉사를 한다든지, 이런 봉사의 개념에서는 정말 맞지 않는 이 스님의 이야기를 우리는 떠올려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실제 김장하의 삶과 나눔이 이런 걸 철저히 배격하며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라는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는 보시 이런 걸 실천해온 사람이 김장하였다.
---「진정한 보시의 삶이란」중에서
한 군데에 다 주지 말고 1억 원씩 나눠 서른네 곳에 나눠주면 어떨까? 모르겠다. 그 서른네 곳을 선정하는 과정은 더 큰 논란과 비판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싶다.
김장하 선생한테 자신에 대한 비방과 헛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나도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결과를 보면 알잖아.”
-세월이 증명해주는 거라고요?
“예. 그걸 다 증명하려고, 변명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화를 낼 필요도 없었고, 그냥 참고 견디는 거죠.”
---「비방과 험담, 그리고 비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