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03월 18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60쪽 | 438g | 135*195*21mm |
ISBN13 | 9788954685597 |
ISBN10 | 8954685595 |
발행일 | 2022년 03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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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60쪽 | 438g | 135*195*21mm |
ISBN13 | 9788954685597 |
ISBN10 | 8954685595 |
아니 에르노는 허구가 아닌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만 쓴다고 했는데, <탐닉>을 읽으니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만 쓴다'는 말이 '경험한 일을 전부 쓴다'는 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탐닉>은 아니 에르노가 1991년 <단순한 열정>을 발표하고 10년 후인 2001년에 <단순한 열정>에 미처 담지 못한 일기문을 엮어 만든 책이다. <단순한 열정>에 담지 않은 일기문이 있다는 것부터가 그의 작품이 곧 그의 일기문은 아니라는 뜻이고, 같은 시기 같은 남성과의 연애 사건을 그렸지만 각각의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구체성이나 생생함이 전혀 다르다. (나중에 출간된 <탐닉>쪽이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탐닉>에는 S가 소련의 외교관이라고 나오지만 <단순한 열정>에는 동구권 출신의 외국인으로만 언급되는데, 이는 아마도 냉전 시대의 영향인 듯하다. <탐닉>은 1988년에 시작된 S라는 남자와의 연애를 그린다. S와의 연애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S가 소련의 외교관이었고, 아니 에르노보다 13살이 어렸으며,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니 에르노는 르도노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이자 대학 교수였던 반면, S는 소련의 외교관이라는 것 외에는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는 S를 숭배하듯이 사랑했고, 오직 S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을 사고 몸치장을 하고, 러시아어를 배우고, 가고 싶지 않았던 대통령과의 만찬에 참석하며, 그가 피우는 담배를 집에 쟁여뒀다.
두 사람은 주로 아니 에르노의 집에서 밀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시절에는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연락 수단은 오로지 전화뿐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 아니 에르노는 최대한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전화기만 보고 있었다는데,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무심해지는 S... 평소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입장인데, 이 책을 보면 정말 나을까 싶다. (서로 비슷하게 사랑하는 게 이상적인데, 그런 관계 쉽지 않아...) <단순한 열정>과 같은 인물,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도 또 다른 결의 '열정'을 느끼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일기처럼 기록한 1988년 가을부터 1990년 4월까지는 온통 그 남자가 작가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잠식한 기간이다.
마흔 여덟에 열 세살 연하의 유부남과의 불륜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작가는 남들의 시선이나 견해따위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작가의 표현처럼, 비록 불륜이지만 한 남자와의 육체적 열정을 글로 표현하기는 삶을, 혹은 삶에 가장 가까운 무엇을 허무에서 구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동일한 내용을 다룬 <단순한 열정>을 읽은 후에 보면 더욱 재미있는데, 앞에서 알 수 없었던 많은 정보가 이 책에 담겨있다.
정말 지독한 남녀간의 밀애와 육체적 탐닉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다.
나에 대한 그의 욕망만이 유일한 확신이었던, 어둠 속의 애인.
'그에게 걸려올 전화와 밤시간 외에는 다른 미래가 없다'고까지 했던 꺼지지 않는 격렬한 욕망과 감각의 지옥.
무섭도록 탐닉했던 대상이 마침내 나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공포와 절망감은 부모의 죽음을 통보받았을 때의 상실감이나 젖먹이 어린이가 엄마와 떨어질 때 느끼는 공포와 비슷할 수 있다고 작가는 표현했다.
한 남자에 대한 작가의 탐닉과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와의 만남을 지속하는 동안 기다림으로 인한 지독한 고통, 나른함과 욕정 사이를 쉼없이 오간 작가의 강박과 집착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밑바닥같은 절망과 광기, 더할 수 없는 쾌락과 끝없는 고통의 일기.
작가에게 지옥같던 그 1년을 견디게 해 준 건 오직 글쓰기뿐이었을 것이리라.
그 솔직함과 용기가 정말 대단하지만, 작가 스스로를 강박에 의한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내용이 반복되면서 이젠 좀 질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서 빨리 그 관계가 끝이 나고 작가가 그 모든 후유증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평안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책 후반부로 갈수록 더 간절해졌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그놈의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집요함은 작가의 삶의 어느 한 때 무척 유해한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생명은 온통 불안정, 불균형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충동이 끊임없이 폭발을 부른다. 그러나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충동은 진정되지 않는다.” - 조르주 바타유 著, 『에로티즘』2판 67쪽, 민음사刊
번역된 제목 ‘탐닉’은 드러난 욕망의 실현인 적나라한 섹스의 묘사, 다시 말해 비본질적인 표면에 불과하다. 어쩌면 원제인 ‘se perdre'(상실)이 이 책 집필의 진정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의 시작에 앞서 아니 에르노는 이 책은 “일종의 내적 필요에 의해 이 일기장을 공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13쪽)”고 밝히고 있으며, “아직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동일한 상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것을 진정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160쪽)”이라고 쓰고 있듯이 욕망을 향한 끊임없는 기다림, 그 공허의 불안과 고통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이 내적 필요에 의해 써진 일기, 즉 ‘이야기의 충동은 우리 존재가 육체와 시간 속에 있다는 인간적 진실에 대응하기 위한 본능적 시도’라는 ‘피터 브룩스’가 지적한 성애(性愛)와 앎을 향한 충동으로서 글쓰기의 전형적 실례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꿈을 꾸고, 욕망을 그대로 옮기며, 해석하여 자신을 인간 주체로 구성하여 인식의 변화와 확장을 통해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이 지극히 사적인 일기의 내용은 프랑스 주재 소련 외교관인 35세의 매끈한 남성 S와의 1년 4개월 남짓에 걸친 광적이기까지 한 성적 탐닉의 시간들과 이 기다림의 시간이 가져오는 질투와 불신을 오가는 고통, 그리고 관계 중단의 걱정, 욕망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게 될 때 다가올 예견된 열정의 단절에 대한 불안의 반복된 날것의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이 단순하고 지루하게 반복된 내용의 연속, 그 어떠한 조작도 보탬도 없는 일기는 인간의 적나라한 내적 삶, 욕구와 열정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종교적이기까지 한 양상을 발견케 한다.
48세의 여자는 S와의 섹스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S와 격렬한 육체적 결합의 시간은 오직 S가 '아니(Annie)'를 찾을 때 이루어진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하는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그의 방문을 예고하는 전화를 기다리는 공허한 시간만이 지속된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여자에게 끔찍함, 심리적으로 텅비고 울고 싶을 정도의 충족되지 않는 열정이 가져오는 고통이다. 이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는 자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 그가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방황한다.
여자의 모든 행위는 S로 하여금 계속하여 자신을 욕망케 하기 위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고급 원피스, 명품 백, 화장과 미장원 그리고 남자를 위한 고가의 선물, 그가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 대통령과의 만찬 참여와 같은 자신의 명예를 통한 S의 허영심 충족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모든 몸짓은 “다른 육체와의 결합 속에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굉장한 어떤 것에 대한 복종(또는 추구)(203쪽)”이다. 그러나 이 충동과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진정되지 않는다. 다시금 반복되는 불안정과 불균형의 시달림, 이 열병은 그저 휩쓸리고 짓밟히는 것 이외에 어떠한 대안도 불가능하게 한다.
극도의 괴로움도 무릅쓰는 낭비,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괴로움을 무릅쓴 극한 상황에서의 낭비를 간절히 욕구하는 일기 주인공의 행위들은 마치 죽음의 충동과도 닮아있다. “나의 경이롭고도 무서운 욕망과 죽음, 그리고 글쓰기의 근원이었다는 사실(13쪽)”이었음을 자신에게 확인하는 문장은 이러한 생각을 확신시켜준다. 남자가 언제 자신을 찾을지를, 즉 욕망이 유예된 시간에 일기를 쓰며 여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다시 기다림과 열망이 가득 넘친다. 글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112쪽)”고. 즉 글쓰기는 지체된 육체의 욕망을 대체하는 욕망의 실현이다.
이 욕망은 S와의 섹스에서 보다 완벽한 육체의 결합, 쾌락의 경계를 넓혀나가려는 시도들로 나타난다. 포르노 영화를 보고 사랑의 기교를 말하는 책을 읽으며 다양한 체위와 침대, 소파, 서재라는 장소에 이르기까지 에로티즘의 완벽 추구를 위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오직 육체의 탐닉, 쾌락 추구이외에는 여자에게 아무런 의미조차도 지니지 못한다. S와 몸을 섞던 기억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유지하는 혼신을 기울인 노력만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사라져버릴 열정. 이 정체된 삶에서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160쪽)”라는 문장처럼 글쓰기는 욕망의 열정을 내면에 가두는 작업이다.
S의 프랑스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이것은 일기의 주인공에게 절박한 공포의 다름 아니다. 그녀의 욕망 추구를 가능케 하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가 오고 무거운 날씨. 이곳, 피렌체에서 죽을까봐 두려워진다. 더 이상 S를 보지 못할까봐 두렵고, 갑자기 모스크바로 떠났을지도 모른다.(234쪽)” 이 불안은 번민과 눈물이 목구멍에 차오를 만큼의 절망과 광적인 고통을 야기한다. 여자는 이러한 번민의 순간에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한 불안으로 갈등하는 ‘안나 카레니나’에 자신을 대입한다.
‘조르주 바타유’가 말했던가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불균형’이며, 필연적으로 자신의 상실을 요구한다고 했듯이 이것은 이중의 의미로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린다. S의 상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버리는 쾌락(욕망), 즉 욕망의 부재인 죽음으로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열정적이고 격렬한 사랑의 시간에 대한 기록은 ‘죽음이 있는 것처럼 사랑하고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결코 천박하고 음란한 노출의 뻔뻔한 기록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도록 하는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탐구의 글쓰기라 할 것이다.
아마 화자로써 써내려갔던 자신의 일기를 이렇게 출간한 것은 자신이 청자(독자)가 되어 화자의 욕망을 들여다 보려는 전이(轉移)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의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육체적 충동에 대한 이야기가 문학적 걸작으로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감정의 진솔한 드러냄, 그 표현의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불연속적 개체인 인간은 항시 연속적 합일을 희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지배하는 이 연속적 합일을 향한 충동에 시달리는 것이 또한 인간의 불가피한 삶의 형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