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소설? 나도 완전 좋아해. 요즘엔 통 못 읽었네. 재밌게 읽은 거 있어?”
쏭이 즉시 휴대폰을 꺼내 SNS 앱을 켰다. 책 표지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 주며 주인공과 사건을 읊어 대는 동안 나는 쏭의 프로필 사진만 뚫어져라 봤다.
잠시 후 쏭이 “언니, 안녕.” 하고 중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쏭이 나더러 언니라고 했다. 좋은 징조였다.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학교 담에 붙어서 SNS를 열었다. 쏭의 학교와 관심사와 프로필 사진까지 알았으니 SNS에서 박송주를 찾는 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빨간 텐트를 찾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러느라 학교에 조금 늦었다.
어제 올린 글이 있었다.
-저랑요? 왜요?
물음표와 숫자 3을 반반씩 닮은 라면 면발 세 가닥을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무심한 듯 일상을 담은 사진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나와의 일을 간접적으로 SNS에 남겼다는 건, 그것도 첫 만남을 기록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이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내가 오길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절친한 친구로 삼은 적은 없지만 이번엔 새로울 것 같은 기대감이 퐁퐁 샘솟았다. 당장 친구 신청을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예전의 누군가처럼 쏭이 나의 열정을 달려드는 미친개의 광기로 오해하면 안 된다.
--- p. 14~15
붕대를 감은 강아지 사진 때문인지 언니가 돌아왔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열어 보니 언니가 양쪽 손목에 비닐봉지를 매달고 커다란 봉지까지 품에 안고 서 있었다. 두 달하고도 열흘 만이었지만 오전에 나가서 장을 봐 온 것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벗었다.
“용구야~.”
언니가 솔 음으로 처음 듣는 이름을 불렀다. 안방에서 기척이 들렸다. 방으로 들어간 언니를 따라가서 얼른 방문을 닫았다.
“어휴, 우리 용구 실물이 더 예쁘당!”
갑자기 용구가 된 강아지는 언니 발치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슬쩍슬쩍 꼬리를 흔들었다.
“무슨 이름이 그래?”
“용구가 어때서. 내 남친 이름이야.”
“얘, 암컷이야.”
“뭐 어때?”
언니는 용구를 달랑 들어 품에 안고 아기처럼 얼렀다.
아빠가 벌컥 문을 열었다.
“개새끼 내려놔!”
“용구 때리면 동물 학대로 신고할 거야.”
툭 던지는 가벼운 언니 말투에 ‘신고’가 흔히 있는 일상인 것처럼 들렸다.
“아빠를 협박하는 거야? 어디서 뭘 하다가 와서는…….”
--- p. 54~55
나는 친구들에게 상담사로 통했다. 우정, 연애, 가족 등등 고민을 털어놓으면 생각나는 대로 말해 준다. 민규는 나더러 ‘극단적’이라고 했다. 조언이 허황된 판타지이거나 헌법만큼이나 교과서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조언은 제법 먹혀든다. 나중에 찾아와서 “네 말대로 할 걸 그랬어.”라고 하는 아이가 꽤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게 다 수년 간 도장을 드나들며 쌓아 온 경험 덕분이었다.
주리에게 조언한 것도 경험에서 나온 것이냐고? 친구의 남자 친구를 곁눈질하기는커녕 슬프게도 이성과 꽁냥꽁냥 사귀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친구들은 남자들이 득실대는 도장에 터를 잡은 나의 연애 경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가 미루어 짐작하고 믿어 버렸다. 내가 모태 솔로라는 건 민규만 아는 비밀이었다. 연애에 관한 건 웹툰, 영화, 드라마, 책에서 배웠다. 스토리 속 인물들 간의 관계와 사연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친구들의 연애 수준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톨스토이 할아버지가 행복한 집은 그래 봤자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집은 사연마다 각양각색 구구절절하다고 했다는데, 열일곱 인생에서 이성과 만나는 사연은 고만고만하고, 헤어지는 이유 또한 거기서 거기다. 설령 누군가 특별한 인연이라고 우겨도 알고 보면 ‘사연 53’에 지나지 않는다. 설레고 잠 못 이루는 건 당사자뿐이었다. 주리처럼 웃고 울고 혼자서만 애틋해하다가 끝나 버린다. 친구들의 어설픈 연애 사연을 들을 때마다 다짐하고 기대했다. 나는 완벽한 인연을 만들 거라고. 나에게 꼭 맞는 남자를 잡을 거라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내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 p.74~75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자꾸만 싸우는 것도, 결국 두 사람이 이혼을 한 것도, 식탁에 늘 약 봉투가 있는 것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잘하고 싶었지만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고, 엄마에게 고분고분하고 싶은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빠를 만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건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원하는 일이었다.
미래는 매일 구만 구천 원을 읊었고, 지원이는 학원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아빠와 아줌마 앞에서 까르르 웃어 대다가 방에서는 몰래 울었다. 사실 몰래도 아니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괴상한 소리로 코를 풀고, 휴지통을 툭툭 건드리고, 스탠드 불을 켰다가 껐다가 했다.
사흘째 되는 날, 결국 참지 못하고 발딱 일어났다.
“왜 나 때문이야?”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원이가 또 웅얼거렸다.
“알아듣게 말해!”
“엉니는 아빠한테 왔잖아. 나도 아빠한테 가고 싶다고.”
순간, 멍해졌다.
이 집에 있는 아빠는 나의 아빠다. 지원이의 엄마가 나에게 아줌마인 것처럼, 아빠도 지원이에게는 아저씨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 p. 118~119
교실로 오자 앞자리에 있던 남자애가 알은체를 했다. 전학 온 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말을 거는 유일한 아이였다.
“이제 너냐?”
무슨 뜻이냐고 묻는 나를 향해 남자애가 돌아앉았다.
“이거 K가 줬지? 좀만 있어 봐. 편의점, 식당, 나중엔 비싼 맛집에 가서 사 줄걸. 3년 동안 꾸준히 퍼 주는데도 쟤, 친구가 없다, 없어.”
더 이상 다가갈 애가 없으니 이제 전학생인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미 나도 어제 로제 떡볶이를 얻어먹었다.
“왜?”
같은 반이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K가 무리를 만들어 몰려다니거나 나서서 아이들의 괜한 미움을 사는 부류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답 노트니 학습 계획이니 하는 걸 보면 공부에도 충실한 것 같았다.
남자애가 내 표정을 보고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며 키득거렸다.
“착하고 친절하지? 맞아, 그런데 그게 사람을 질리게 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남자애는 책상을 치며 웃었다.
--- p.14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