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그 찬란한 빛 속에 함께 하려고] 베를린 시골 오두막에서 읽고 쓰는 것만으로 가득한 생활을 담은 배수아 작가 신작 에세이. 그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읽고 씀으로 인해 더 자라난 자신이, 자아의 자유로움이 보이는 것 같다. 삶 자체가 책이 되는, 낯설지만 환상적인 그 순간들로 안내할 매혹적인 책. - 에세이 PD 이나영
|
프롤로그
연인 일곱번째 아이 낙엽을 헤치며 걷는 사람 WG, 그리고 개구리를 먹는 자 작별들 누가 우리에게 자연을 암시하는가 최초에 새를 가리킨 여인 내가 가진 넝마를 팔고 영혼의 서쪽 벽 9월의 황무지에서 고통 고요. 회색. 멀리 헝가리 화가의 그림 에필로그 |
저배수아
관심작가 알림신청裵琇亞
배수아의 다른 상품
세상의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아마 한 권의 책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일생을 맡기기로 한 그런 일들. --- p.237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이 말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의 파동을 이룬다.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의 ‘내면화하는 읽기’이다. 내용뿐 아니라 언어에서도. 언어뿐 아니라 비언어에서도. 한 소설의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소설 밖으로 걸어나간 다음 순간, 그녀는 다른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죽인다. --- pp.21~22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영영 완성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강해진다. 나는 체념하고, 포기하고, 굴복하고, 인정하고, 마침내 울 것이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마지막 문장을 쓸 것이다. 아니, 눈물이 곧 마지막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잘 울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마지막 문장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 --- p.94 상실을 겪거나 배반당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수치스러울 때면 나는 책상으로 가서 읽거나 쓰면서 마음을 달랠 것이다. 삶을 바꾸고 싶을 때, 다른 삶을 간절히 원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언젠가, 한 시간쯤 뒤에 혹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반드시 기분이 다시 좋아질 것이다. 나는 빛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섬을 갖는다. 하나의 오두막을, 하나의 정원을 갖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평화를 느낀다. 물이 나를 들어올리듯이 그것이 나를 들어올리고 있음을 느낀다. --- pp.110~111 오직 내면의 눈으로 보게 되는 비전. 물가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있다. 비록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을 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래전 그들을 알았고, 그들의 몸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몸과 모종의 관계에 의해 연결된 상태였으며 나는 몸으로 그것을 느낀다. 나는 두려움 없이 홀로 그들의 뒤를 따른다.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 내 최초의 언어였을 그 노래는 누구의 입에서 나왔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노래를, 언젠가 나도 부르게 될까. --- p.115 어린 시절, 세 살 네 살 다섯 살이 된 사람은 태어날 때 이 생을 위한 지참금처럼 지니고 온 이미지와 생각을 먹고 살게 된다. 그리하여 예순세 살 예순네 살 예순다섯 살이 된 어느 토요일 강가를 산책하던 한 사람은, 이 강이 북아메리카의 강이라고 단정 짓고 흔들리는 수면의 영롱한 색채를 인디언의 색채인 양 받아들인다. 그러자 그의 환각 속에서 강물을 흘러가는 카누 한 대가 보인다. 카누에는 머리에 오색의 깃털 장식을 두세 개 꽂은 최후의 모히칸족이 타고 있다. 그 광경을 마주한 사람은 시민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보낸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회상한다… --- p.90 |
“마침내는 아마도 일생이, 오직 하나의 문장이 반복되는 한 권의 책처럼
그렇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배수아식 읽기에 대하여 『작별들 순간들』은 ‘나’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 두 인물의 생활과 여행과 대화로 채워져 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는 “글 속의 대화체를 위한 장치이며 ‘듣는 사람’으로 위장한 ‘말하는 사람’의 역할이고, 실질적으로는 ‘말을 암시하는 사람’이자 ‘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249쪽)이다. 일평생 단 하나의 헌책방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 사람이며 방은 물론 욕실과 주방까지 책과 원고들, 편지와 쪽지, 스케치와 콜라주로 그득 채운 사람이다. 여름에는 글을 쓰다가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밤에는 작은 발코니 의자에 앉아 별을 올려다보는 사람이며, 무엇보다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다. 요컨대 상상의 인물이자 한 권의 책이자 문학 그 자체인 존재가 아닐지. 언젠가 배수아 작가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 문학과 사람을 꼽으며 종종 둘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말했다. 그것이 실체화된 것이 이번 산문집 속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라 짐작하는 것이 과한 해석은 아니리라. 그들의 대화가 주로 책과 글, 유년의 기억과 행복에 대한 것이기도 하기에. 세 계절에 걸쳐 쓰인 산문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 배수아 작가는 ‘읽기에 대하여’ 쓰고 있다 말한다. 그것은 ‘읽은 책’에 대해 쓰는 것과는 다르다고. “왜냐하면 나에게 독서란 한 권의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동시성의 또다른 사건이지 책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 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읽기에 대한 글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250쪽)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W. G. 제발트를 비롯해 이니셜로만 표기된 여러 작가와 그들의 작품이 다수 언급되지만 배수아식 읽기란 그 내용을 기억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감상을 정리하는 것과는 다르단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그녀의 책을 읽는 방식은 물리적으로 읽거나 읽지 않는 모든 상태를 포함한다. 이미 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꾸만 같은 페이지를 되풀이해서 읽게 될까봐 무의식적으로 모든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그으면서, 하지만 읽은 것으로부터 빠르게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사로잡히면서. 어떤 문장은 읽기를 통해 불현듯 무한대로 확장되었고, 마치 거대한 날개에 실린 듯, 나는 읽는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심지어 망각하는 읽기를 계속한다. 어휘들의 래디컬한 배치. 혁명과 형이상학. 문장과 어휘 단위의 해체. 사랑의 해체. (…) 한 권의 책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나는 그 책에 담긴 모든 것을 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위하여. (30~31쪽) 자신의 몸으로 한 권의 책을 통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자신을 어떻게 확장시키는지, 어떤 자유가 그곳에 있는지, 배수아 작가의 강렬하고 인상적인 문장들을 따라 읽다보면 문학에 대한 애정과 고양된 마음들이 찬란한 빛으로 그의 땅을 감싼 것이 느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 작별하는 자”(188쪽)가 되는 여정이 여기 펼쳐진다. “우리가 일생을 맡기기로 한 그런 일들” 배수아식 쓰기에 대하여 산문 전반에 배음으로 드리워진 이국의 정취는 작가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꾸려가는 시골생활의 구체적인 묘사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펌프로 물을 긷고 장작불을 피우고 소박하게 빵을 구워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한다. 계절에 맞게 핀 꽃과 열매로 시럽이나 잼을 만들고,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낙엽송 숲과 밀밭을 거닐며 도시의 그것과는 다른 고독에 자연스레 침잠한다. 우리는 서로 읽거나 쓰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가장 적절한 장소이다. 잠시 동안 빛이 넘실대는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우리는 밤의 정원에 있다. 밤새도록 나이팅게일이 운다. 잠 속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잠시 동안 나이팅게일의 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우리는 수많은 세월을 늙어버린 다음일 것이다. 그것이 환희라면. (37~38쪽) 그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통과해 걸어서 두 시간 거리의 이웃마을로 바흐 연주를 들으러 간다. 정원 낭독회를 열기도 한다. 친구들, 작가들과 교류하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투야나무 울타리 쳐진 정원 오두막에서의 고요함을 소중히 하며 그곳을 어느 곳보다 더 ‘집’ 같은 장소라 여긴다. 비밀스러운 기쁨의 순간들로 충만한 장소. 작가가 은둔에 가까운 생활방식을 취한 곳에서 밝히는 ‘작가로서 내가 원하는 글쓰기’에 대한 긴 고백은 그러므로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름답거나 감동적이거나 스며들거나 지적이거나 훌륭하거나 압도적인 글을 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좋은 글이나 기억에 남는 글을 쓰기를 원하지 않으며 심지어 매혹적이거나 독특하거나 소름 끼치거나 아찔한 글도 아니라고, 문장 단위로 이루어지는 글을 쓰고 싶지 않으며, 개념과 철학으로 쓰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체와 통일과 조화의 글도 원하지 않는다고, 나는 연속성과 이야기의 문법을 피해 가기를 원하며, 구조와 플롯의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나는 그 무엇도, 심지어 내용이나 아름다움조차도 완성하거나 구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은 파편이었다, 단지 속삭임, 몸에서 울려나오는 숨과 같은 속삭임, 물처럼 들어올리는 속삭임, 글이 호흡하는 속삭임, 글을 해체하는 속삭임, 몸 없이 환하고 불완전한 사물과 같은, 하지만 속삭이는 사물인, 혹은 모순되고 파편적인 몸을 가진 소리… (134쪽) 배수아 작가는 자신이 읽고 쓰는 자로서 잘 아는 어느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종종 ‘몽환적’이라는 불충분한 말로 표현되는 그의 문장들이 실은 불충분한 말로밖에 다 말해지지 못하는 그 세계를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작별들 순간들』을 함께 읽을 우리. “고요. 회색. 숲에서, 우리는 비밀의 책을 가질 것이다. 우리, 깊이 매혹당했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20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