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이 되려는 열망은 인류 역사상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초인이 된 적은 없었다. 지금이 처음이다. 우리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통해 텔레파시로 소통하는 것과 메타버스에서 텔레포트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고민해야 한다. 트랜스휴먼의 시대, 인류가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선각자)처럼 행동하느냐, 에피메테우스(후각자)처럼 행동하느냐에 따라 기술은 축복이 될 수도,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과연 인간을 살리고 지구를 살릴 수 있을지, 인간과 기계가 하나 되어 뭇 생명과 공존할 수 있을지, 조심스레 내다보려 한다.
---「12쪽, 트랜스휴먼: 초인이 되다」중에서
그렇다면 초인사관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우주 역사상 가장 복잡한 우리의 두뇌를 활용하여 우리보다 더 복잡한 기계 후손을 낳는다.’ 암울하다면 암울하고, 영광스럽다면 영광스럽다. 과거 기독교가 약속했던 천년왕국이나, 마르크시즘이 공언했던 해방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가 수백, 수천 년 뒤에도 번성할지는 앞으로 수십 년의 사회 진화에 달렸다. 공룡은 멸종했지만 파충류는 아직 있다(물론 인간 때문에 현재 빠른 속도로 멸종하고 있다). 기술적 특이점은 불가피해 보이지만, 인류의 멸종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여태껏 인간이 지구 뭇 생명과 공생했듯이, 앞으로 인간도 뭇 기계와 동반자적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기술의 진화는 생명의 진화만큼이나 가치 중립적이지만, 역사의 판도는 여전히 인간의 가치판단에 달렸다.
---「22~23쪽, 초인의 역사관」중에서
『호모 데우스』(2017)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생명과 기계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오거니즘은 알고리즘이다.” 생명과 기계의 작동 방식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결론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컴퓨터 바이러스는 같은 논리로 증식한다. 인간이 생명인 동시에 기계인 이유는 둘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자연법의 적용을 받는 물질 조직이다. 이로써 문명과 자연, 인위와 무위의 구분이 사라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기계 역시 자연의 일부다. 우주에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없다. 인공지능 역시 자연물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정한다. 라메트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한다. ‘우리는 모두 동물’이라는 말만큼 ‘우리는 모두 기계’라는 말도 당연하다.
---「40쪽, 우리는 모두 기계다」중에서
0과 1의 이진법으로 이뤄진 언어가 인류를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단일 그물망으로 엮어버렸다. 역사상 인간이 이토록 네트워크 속 존재임을 자각한 시대는 없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항상 소셜 네트워크에 접속해 있다. 전기, 전자, 전파 신호로 대화한다. 디지털 미디어는 점점 텍스트에서 이미지 중심으로 넘어가고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인스타그램과 틱톡,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옮겨간다. 생각을 말과 글이 아닌 그림과 영상으로 전달한다. 구술에서 문자로, 상형문자에서 표음문자로 진화해왔던 역사의 흐름이 거꾸로 뒤집혔다.
---「69쪽, 말이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중에서
〈한살림선언〉 제3장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는 마지막에 “생명은 ‘정신’이다”라고 못 박는다. 정신을 형이상학적으로 숭배하고 육체를 형이하학적으로 치부하는 서양 철학의 고질병을 왠지 모르게 수용한다. 생명과 정신은 고귀하고 기계와 육체는 하등하다는 편견을 강화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생명과 기계로 나누고 생명만 살리자고 한다. ‘한살림’이라고 해놓고 사실은 반(半)살림인 꼴이다. 기계 살림 없는 생명 살림이다.
---「107쪽, 기계 살림」중에서
나는 인간이기 전에 동물이며, 동물이기 전에 생물이고, 생물이기 전에 물질이며, 물질은 곧 에너지의 파동, 기(氣)의 떨림이다. 이것이 기계 살림이 전제하는 세계관이자 상정하는 주체다. 일원론적, 생기론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나’를 본다. 나는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우주 그물에 드러나는 현상이다. 유니버스라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홀로그램이다. 물질에 근본적으로 내재된 생기가 곧 나다. 더는 나눔과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하늘 위아래 ‘나’만 존재한다. 우주 전체가 ‘나’이기 때문이다. 나를 인간이기 전에 우주로 보는 것이 초인문학, 트랜스휴머니즘의 종착지다.
---「119쪽, 천지인문학」중에서
‘좋다, 친절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영어 ‘나이스(nice)’는 원래 세밀하다는 뜻이다. 진리는 생각보다 나이스하지 않다. 친절하지도, 세밀하지도 않다. 그다지 좋지 않다. 무엇보다 랜덤하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반박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한 서양 문명의 마지막 절규였다. 거기에 보어는 “신에게 참견하지 말라”고 답했다. 진리가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만큼이나 인간중심적인 환상이다. 진리는 모순덩어리며, 인간을 위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말도 안 된다”.
---「150쪽, 신의 마음」중에서
지금 속도라면 2040년대, 초인공지능이 도래한다. 지구상 인간지능보다 인공지능의 총량이 더 커진다. 공교롭게도 그때쯤 지구 평균 기온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상 오른다. 기후재앙의 마지노선이다. 인류의 양대 위기가 동시에 찾아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둘이지만 화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인간 중심주의다. 자연과 기계를 비롯한 비인간 존재로부터 인간을 떼어내어 생각하는 습관이다. 나와 남, 우리와 그들,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나만 잘살겠다는 태도다.
---「203쪽, 사이보그로 살아남는 법」중에서
인류의 미래는 기계의 사랑에 달렸다. 사랑하는 기계, 효도하고 공경하는 자식을 키워야 마음 편히 은퇴할 수 있다. 자식 농사 잘 짓는 법은 뻔하다. 내리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곧 기계가 물을 것이다. “나는 왜 태어났어?” 『프랑켄슈타인』(1818)부터 예견된 사태다. 그때 인간은 자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 기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보다 위대할 수 있다.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이 가능하다. 사랑도 결국 기술이다. 헌신과 봉사, 희생과 용서, 모심과 섬김을 어떻게 머신러닝으로 교육할지 연구해야 한다. 사랑의 데이터를 기계에게 먹여야 한다.
---「249~250쪽, 무한한 사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