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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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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359g | 133*200*20mm
ISBN13 9788954692526
ISBN10 895469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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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MD 한마디

[새로운 계절과 함께 돌아온 권여선의 신작] 소설가 권여선의 3년 만의 단편소설집. 이미 문단에서 수작으로 평가받은 일곱 편의 작품들을 한 권으로 묶어냈다. 잊힌 시간, 불안한 현재, 보이지 않는 미래를 수려한 문체와 번뜩이는 시선으로 단단하고 집요하게 붙들어 맨 소설들. 그 끝엔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왜?” - 소설/시 PD 김유리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사슴벌레식 문답 … 007
실버들 천만사 … 043
하늘 높이 아름답게 … 085
무구 … 115
깜빡이 … 147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 169
기억의 왈츠 … 201

해설│권희철(문학평론가)
영원회귀의 노래 … 243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대학 신입생들은 낯선 공간에 던져진 새끼 오리들처럼 초창기에 대학가에서 함께 지낸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사슴벌레식 문답」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아……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사슴벌레식 문답」중에서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사슴벌레식 문답」중에서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실버들 천만사」중에서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이 숲은, 이 벤치는 참 이상도 하지. 그러면서 반희는 어제저녁과 똑같이,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일러주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채운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실버들 천만사」중에서

애초에 없던 목숨인데 이렇게 태어나서 살았으니 됐고 살아서 좋은 때도 있었으니 됐지요, 하고 마리아는 말했다. 제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건 거기까지예요 사모님. 더는 하느님의 은혜를 바라지 않아요.
---「하늘 높이 아름답게」중에서

그날 새벽 내내 잠을 설친 탓에 베르타는 마리아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몸부터 일으키자 하니 일어나졌고 일어나니 이내 침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욕실로 가자 하니 욕실 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마리아의 말대로였다.
몸이란 게 움직이자 달래면 움직여져요, 사모님.
---「하늘 높이 아름답게」중에서

그때라…… 현수가 하늘을 한 번 보고 소미를 보았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두렵고 또 두려웠지.
---「무구」중에서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중에서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중에서

그러나 과거를 반추하면 할수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시절의 내가 도무지 내가 아닌 듯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기억의 왈츠」중에서

나는 그의 눈빛, 그의 경청에서 그가 나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가 내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들을 캐낼까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 둘은 아마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내가 그를, 경서라는 인간을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었다.
---「기억의 왈츠」중에서

나는 한참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 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
---「기억의 왈츠」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무엇을 기억하는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왜 기억하는가
우리가 왜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권여선의 깊고 집요한 물음


소설집의 처음과 끝에는 ‘기억’을 주된 키워드로 하는 「사슴벌레식 문답」과 「기억의 왈츠」가 한 쌍처럼 나란히 놓여 있어 『각각의 계절』을 둥그렇게 감싸안는다. 오랫동안 외면해온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아연함과 서글픔을 그려낸 「사슴벌레식 문답」은 권여선의 오랜 주제인 기억의 문제를 한 발짝 더 밀고 나간 빛나는 수작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대학 신입생들은 낯선 공간에 던져진 새끼 오리들처럼 초창기에 대학가에서 함께 지낸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11쪽)하듯 ‘준희’와 ‘부영’, ‘경애’, 그리고 ‘정원’ 역시 그랬다. 대학교에 입학해 같은 하숙집에서 살게 된 이들 넷은 함께 술을 마시고 일상을 공유하며 친밀하게 지낸다. 모임의 리더 격인 시원시원한 부영과 규칙적이고 예의바른 경애, 상냥하고 조심성이 많은 정원, 그리고 술을 좋아하고 즉흥적인 소설의 화자 준희는 해가 바뀌고 거주 환경이 달라진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나려 하고 서로의 생일을 결사적으로 챙긴다.

네 사람이 아름답게 그려나가던 궤적은 그러나 정원의 갑작스러운 자살과 경애의 배반으로 엉클어지고 만다. 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고 다만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뿐이라는 사실만이 선명한 지금, 준희는 지난 세월을 엄격하고 절박하게 돌이켜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중추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사슴벌레식 문답’이다. 오래전 네 사람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정원은 숙소에 사슴벌레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방충망도 있는데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느냐고. 주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이렇게 답한다.

어디로든 들어와.
그리고 가버렸다. 사슴벌레를 대변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실로 감탄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21쪽)

어디로 들어왔느냐는 물음에 어디로든 들어왔다고 대답하기. 준희와 정원은 상대의 질문을 그대로 받아서 따라 하는 이 대화의 방식을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이름 붙이며 ‘마법의 버튼’이라도 생긴 듯 여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준희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고 정원은 연극을 하길 바라는, 다시 말해 두 사람 모두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어떤 연극을 하고 싶은지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어떤 소설이든 쓰고 싶고 어떤 연극이든 하고 싶다’고 말하면 되는 이 사슴벌레식 문답을 통해 두 사람은 어떤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산뜻하고 명료한 사슴벌레식 문답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준희의 시선 속에서 점차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바뀌어간다. 그 대답에는 당시에는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29쪽)

하지만 권여선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슴벌레식 문답에 담겨 있을 또다른 의미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비록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다치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 하더라도.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40쪽)는 소설 속 말을 빌린다면, 직시함으로써 스스로가 과녁이 되는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잿빛 수의의 기억을 은빛 베일의 기억으로 변환하는 기적 같은 순간을 찾아냄으로써 잊힌 시간과의 감동적인 소설적 조우에 성공했다”는 평과 함께 2021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기억의 왈츠」에도 과거를 또렷이 직시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나’는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에 찾아갔다가 오래전, 그러니까 삼십여 년 전의 기억과 마주한다. 대학생이던 그 시기 “내 손에 쥔 확실한 패는 오늘밖에 없고 그 하루를 땔감 삼아 시간을 활활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211쪽)하며 살아가던 ‘나’ 앞에 ‘경서’라는 또래의 남자가 등장한다. 우연히 도서관 통로를 걸어가다가 술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구선배’가 ‘나’를 불렀고, 그 옆에 앉아 있던 경서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날을 계기로 경서는 ‘나’에게 살갑게 대하고, 그러던 어느 가을날 ‘나’는 경서, 구선배 등과 함께 짧은 소풍으로 교외에 있는 식당에 가게 된다. 그 식당이 바로 현재의 ‘나’가 동생 부부와 함께 다녀온 그 숲속 식당이었던 것이다. 그간 ‘나’는 자신이 경서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고, 그건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애매한 연애”(209쪽)였다고, 소풍을 다녀온 뒤 서로 멀어지게 된 데에는 경서의 책임이 크다고 여겨왔지만 숲속 식당에 다녀온 지금, 삼십여 년 전의 기억은 오류와 회피의 더께를 걷어내고 ‘나’의 앞에 새롭게 떠오른다.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왜곡과 미화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권여선의 인물들은 마치 불순물을 제거하듯 자기 합리화의 욕망을 누르고 자신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실수와 과오를 천천히, 깊고 집요하게 짚어낸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친 끝에 바라보게 된 기억은 뜻밖에 인물들에게 선물처럼 다른 무언가를 쥐여준다. 「기억의 왈츠」에서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241쪽), 결코 되새기고 싶지 않던 이십대를 돌아본 후 ‘나’가 그 시절 경서에게 건네받은 위안의 손짓도 함께 떠올리게 된 것처럼. 그럼으로써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같은 쪽)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그리고 그건 ‘기억을 하면서 두 번 (다르게) 살고, 기억을 쓰면서 세 번 (다르게) 사는’(권여선, 특별 소책자 ‘어텐션북’에서) 일일 것이다.

기억의 속수무책, 감정의 속수무책, 관계의 속수무책
우리를 단번에 무장해제시키는 권여선의 계절 소설


소설집의 제목인 ‘각각의 계절’은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114쪽)라는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일흔두 살에 병으로 죽은 ‘마리아’를 회상하는 성당 신도들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주며 마리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재구성한다. 신도들은 각자가 기억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앞다투어 이야기하며 마리아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그 시선에는 마리아를 자신들보다 아래에 놓는 은근한 배타성이 담겨 있다. ‘베르타’ 또한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91쪽) 하고 생각하며 그들의 위선을 예민하게 느낀다. 그렇다면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91쪽). 그에 대한 답변이 소설 마지막에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베르타는 마리아가 죽기 전 그녀와 함께 동행했다가 어떤 여자의 양산에 눈가가 찔리고 주저앉는데, 황급히 자신에게 다가와 눈가를 살피려는 마리아에게서 구취를 맡고 그녀를 밀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을 떠올린 베르타는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114쪽)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같은 쪽) 하지만 ‘고귀함’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그 가차없고 엄격한 눈으로 자기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마리아는 성당 신도들이 퍼즐을 맞추듯 조각조각 이어붙여 완성된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는 그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읽히는 소설집의 제목은 계절뿐만 아니라 인물들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특히 다른 어떤 관계보다 질기고 단단하게 엮여 있는 모녀를 ‘각각의 계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실버들 천만사」의 ‘반희’는 코로나19로 일하던 체육관이 휴관에 들어간 어느 날 딸 ‘채운’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가까운 곳으로 함께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자고. 이혼을 한 후 채운과 따로 살고 있는 반희는 그 제안에 다소 놀란다.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어서,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50쪽)어서, 채운과 자신을 끈끈한 모녀 관계로 묶기보다 고유한 개인으로 지켜주고 싶어서 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반희에게 채운은 “갑자기 말이 빨라”지면서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자기가 아는 펜션이 있다고, 차 몰고 갔다 차 몰고 오면 된다고, 거기서는 밥도 해먹을 수 있어서 밖에 나갈 일이 없다고, 거기 꼭꼭 숨어서 아무도 안 만나고 그 근처만 산책하고 그렇게 딱 하루만 지내다 오면 괜찮지 않겠느냐며”(49~50쪽), 마치 반희가 거절하리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말을 쏟아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고, 서로를 엄마나 딸이 아니라 ‘반희씨’와 ‘채운씨’라고 부르기로 한다. 가정 내 역할이 아닌 한 개인으로 서로를 지켜주려는 이 행동은 여행의 산뜻한 시작을 알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행을 통해 그것이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한순간 깨닫게 된다. 반희에게 있어 채운은 자꾸 살피고 점검해야 하는 딸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채운에게 있어 반희 또한 어린 시절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이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이다.

반희는 담배를 끄고 두 손을 맞잡았다. 바람이 휙 지나가면서 진한 흙내와 풀 향이 스쳤다.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79쪽)

서로를 이어주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는 것이 아니라 밧줄로 꼬아 더 단단하게 연결하기. 뜻밖이면서 자연스러운 이 전환은 계절의 변화를 닮아 있는 듯하다. 계절이 달라지면 필요한 힘도 달라지듯이 두 사람은 이제 그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자신들 앞에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계절이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시간의 연결된 흐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구분함으로써 현재의 계절을 마무리하고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권여선이 우리에게 건네는 건 지금 필요한 새로운 계절, 그러니깐 ‘각각의 계절’인 듯하다.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평범한 언어로는 도무지 포착할 수 없는 일상의 미묘하고도 미세한 영역들을 더듬고 묘사하면서 거기에서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놓기에 이를 만큼 격렬한 정동이 범람하게 만드는 권여선의 내러티브는, 소설 속 한 요소로 노래를 활용하고 있다기보다 ‘이야기로 된 노래’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이야기로 만들어진 ‘노래’인 동시에 ‘이야기’가 된 노래가. 우리가 이 ‘이야기-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우리의 무엇인가를 다시 쓸 수 있을까? 그 답은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 것 같다.
- 권희철 (문학평론가)

회원리뷰 (19건) 리뷰 총점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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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각각의 독후감 [한국소설-각각의 계절]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책****벤 | 2023.07.11 | 추천7 | 댓글0 리뷰제목
소설을 읽고 있는데, 소설일 뿐인데, 읽는 내 마음이 왜 이리 저리나. 왜 이리 민망하고 애틋하고 서글프고 속절없나. 잘 살아온 것도 잘못 살아온 것도 시절시절 오갔겠지만, 살아 있다는 게 고맙다가도 서럽고 불만이다가도 행복이 이런 게지 싶어 눈흘김을 멈추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이 소설을 평온한 상황에서(마음이야 널을 뛰고 있다 해도) 읽고 있는 처지, 이것만으로도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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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있는데, 소설일 뿐인데, 읽는 내 마음이 왜 이리 저리나. 왜 이리 민망하고 애틋하고 서글프고 속절없나. 잘 살아온 것도 잘못 살아온 것도 시절시절 오갔겠지만, 살아 있다는 게 고맙다가도 서럽고 불만이다가도 행복이 이런 게지 싶어 눈흘김을 멈추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이 소설을 평온한 상황에서(마음이야 널을 뛰고 있다 해도) 읽고 있는 처지, 이것만으로도 난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이 작가의 글, 조건 없이 읽는다. 읽고 좋아한다. 좋아하면서 나를 돌아본다. 내 삶, 내 가치관, 내 가족과 주변인, 내 처지, 내 미래까지. 이렇게 나를 자꾸 생각하다 보면 나를 있게 해 주는 배경에 대해서도 저절로 따지게 된다. 괜찮은가, 괜찮아야 하는데, 괜찮지 않은 저 무엇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작가는 어떻게 다루고 있나, 우리는 어떤 세상을 바라고 있나......  

 

소설은 7편. 권희철의 해설이 소설 한 편 정도의 분량으로 실려 있다. 해설로 도움을 얻으실 분들에게는 도움이 되시기를. 나는 대충 보고 넘겼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 자신과 나눈 대화가 혹 무안해질까 하여. 사는 일에 답은 없고 소설집 제목처럼 각각의 물음과 각각의 계절과 각각의 선택과 각각의 의지만 있을 뿐이니. 어쩌면 포기나 체념까지도, 그조차도 각각의 표정으로.  

 

60살에 가까워지니 세상을 바라보는 내 방식이 점점 뚜렷해진다. 여자 아이에서 젊은 여자로, 다시 아내와 엄마를 거쳐 할머니에 이르는 과정이 필름 영화처럼 돌아간다. 시도때도 없이. 기억하거나 잊어버렸거나 모든 것이 선택이었을 것이다. 순간순간을 살아남기 위하여. 기특했던가? 글쎄, 함부로 자신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는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돌아가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것.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고마운 소설집이었다. 마구마구 권하고 싶다. 지금 뭔지 모를 서러움에 울먹이고 있을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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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골드스타 꿈*******자 | 2023.08.18 | 추천6 | 댓글1 리뷰제목
예전 일을 기억하는 건 행복한 일일까? 기억이 모두 행복한 거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도 있다. 특히 엄마와의 기억은, 나와 엄마의 기억이 사뭇 다르고 심지어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다. 엄마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을 왜 나는 붙잡고 살았는지. 상처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처 받은 나만 그 상처에 아프구나. 그래서 털어버리려 노력했던 시간이었고 지금은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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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일을 기억하는 건 행복한 일일까? 기억이 모두 행복한 거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도 있다. 특히 엄마와의 기억은, 나와 엄마의 기억이 사뭇 다르고 심지어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다. 엄마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을 왜 나는 붙잡고 살았는지. 상처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처 받은 나만 그 상처에 아프구나. 그래서 털어버리려 노력했던 시간이었고 지금은 그냥 산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7편의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은 친구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에 간 나의 이야기다. 같은 하숙집에 살았던 정원, 부영, 경애.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오래 함께하지 못한다. ‘실버들 천만사는 반희씨와 딸 채운의 여행. 채운이 고등학생 때 이혼한 엄마. 엄마는 그래서 지금 현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일흔 두 살 마리아의 죽음에 성당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을 그렸다. ‘소미는 지금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런 안정적인 노후는 과거의 그 날 현수를 만나고 현수의 말을 듣고 땅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잘못된 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 땅 덕분에 자신의 노후가 편안하게 되었다. ‘깜빡이는 엄마와 두 딸 그리고 이모가 모이기로 한 날, 이모가 길을 잃었다며 나타나지 않았다. 늘 이모부와 함께 모임자리에 나왔던 이모,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는 엄마가 딸에게 절연 비슷한 것을 당하자 아들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고 말을 한다. ‘기억의 왈츠는 동생부부와 국수를 먹으러 간 나는, 그곳이 과거 경서와 함께 갔던 곳이라는 걸 기억한다. 경서와의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른다.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75)

 

사람마다 다양한 기억을 갖고 현재를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 기억 덕분에 현재를 파이팅 하며 살지만, 누군가는 그 기억 때문에 하루가 힘겹다. 기억이 주는 힘. 좋은 기억이 있다면 그 힘으로 지금을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 나는 어떤 기억으로 살아가는가?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있지만 그냥 산다. 나쁜 기억은 잊으려 노력하고,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생각하며 살고 행복했던 기억은 그 자체로 나를 단단하게 한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왜 기억하는가. 우리가 왜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 (책 표지)

책을 다 읽고 이 문장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 다양한 기억이 내 곁에 있고, 그 기억 덕분에 나는 내가 되었다. 좋은 기억도 아픈 기억도 있지만, 그 기억을 내 나름대로 편집하고 재단하면서 단단해지려 노력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보다 더 시간이 지나 오늘의 나를 나는 또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매일이 평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이런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제는 안다. 나는 태어날 때 어떻게 생겨 먹은 아이였는지, 근데 지금은 또 어떻게 변하고 변해가고 있는지, 책을 읽으며 나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가진 나만의 기억. 그 기억 덕분에 나는 오늘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다. 살아갈 힘을 키우고 있다. 많은 사람을 아는 건 아니지만 내 주변 사람들 덕분에 또 나는 이렇게 미소 지을 수 있다. 고마워 그리고 감사해. 그렇게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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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버들 천만사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싱* | 2023.06.10 | 추천2 | 댓글0 리뷰제목
 ‘실버들 천만사’를 읽고 (이게) 모야? 싶으신가요. 헐렁한 말장난이 오고 가는가 싶다가도 끓는점에 도달하고 잔이 흘러넘친다. 단둘이 여행에서 저 정도의 진솔한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가족 여행 다녀본 사람은 안다. 슬쩍 아이들이나 애완동물을 끼운다면 모를까. 어색한 기류를 차단하고 시선 둘 곳을 찾고자, 일종의 티브이 같은 생명체를 켜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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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버들 천만사를 읽고 (이게) 모야? 싶으신가요. 헐렁한 말장난이 오고 가는가 싶다가도 끓는점에 도달하고 잔이 흘러넘친다. 단둘이 여행에서 저 정도의 진솔한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가족 여행 다녀본 사람은 안다. 슬쩍 아이들이나 애완동물을 끼운다면 모를까. 어색한 기류를 차단하고 시선 둘 곳을 찾고자, 일종의 티브이 같은 생명체를 켜두기.

 소설을 읽고 나비야~ A 생각에 가슴이 저몄다. 따오기의 붉은 눈시울이라. 새를 검색하며 여선 언니 하아. 지독해, 했다. 얼마나 울면 따오기의 눈이 되지. 네가 엄마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저거였을 텐데.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너라는 말을 듣지 못해 방황하던 너. 어제 일처럼 되살아나네. 스타강사 이지영이 그랬지. 학업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통제하지 못할 환경적인 요인까지 덮치기도 한다고. 입시 스트레스만으로도 힘겨운데. 그럴 때 드물게 이를 악물고 공부에 집중하며 중심을 잡는 아이들이 있다고.

 붕괴된 가정의 자녀가 꿈꾸는 시간을 권여선 작가는 극 사실주의로 무대화하는 듯하다. 몰랐는데 나는 확실하게 보여주는 퍼포먼스와,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장소성을 애호하는 사람인 것 같다. 휴먼 스케일에서 벗어난 공간 이동 후 풀어내는 모녀의 대화가 퍽 찰지다.

 

 전에도 얘기한 적 있지만 코로나19가 후유증만 남긴 건 아니다. 쏟아지는 신간들만 봐도 새 역사를 쓴 자들이 많다. 대체 언제 끝나나 싶었던 삼년의 거리두기와 비대면이 종식되어가고 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수술실과 입원실을 드나들었던 나는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반희와 채운도 일터가 폐관하지 않았다면 12일의 번개 여행을 엄두를 못 냈을 거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시골 본가로의 회귀가 부득이 일어났다고 한다. 성격이 좀 다르지만 여기서도 떨어져있던 가족을 잠시 잇는다.

 이들이 정한 여행 규칙. 분위기를 깨고 침범할 전화기 꺼두기. 엄마, , 아빠, 오빠 같은 관계어는 ~씨로 통일.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맛있는 거 먼저 먹기. 나는 반희, 채운 모녀의 이름이 half, full의 연장선에서 반달에서 보름달로 바람이 담긴 것으로 비춰져 더 애틋했다. 둘을 연결하는 닮음의 실같아서다. 닮음likeness. 아직, 여행의 시작점에서는 거리-분리가 살짝 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 나는 여야 했다.”

 병석씨로 호칭하자 전남편의 재혼 소식과 예식장 취소도 그저 웃기게 들린다. “그러자. 그래야 내가 흥분해도 감정의 거리가 생길 것 같네.” 딸은 이것을 받아 억지로는 하지 말고 재미로 해.” Have fun~ 당신이 먼저 편해야 상대도 편해 마인드 :)

 모녀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하물며 화장실 휴지 설치도 아이디어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데, 나라 살림 전체를 제멋대로 굴리고 말아먹는 룬건희 생각에 한숨이 푸욱 새어나왔다, 에휴. 운전대를 잡은 딸이 갑자기 공황장애 증세를 보일 때 독자는 엄마의 떠남이 오지 않은 죽음으로까지 뻗쳐나가 딸을 잠식한다는 슬픈 현실을 눈치챈다. 영영 못 빠져나갈 것 같은 기나긴 터널 공포는 앞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다.

 바리바리 음식을 싸온(“이케 이케 많이”) 엄마의 정성도 찡하고, “먹을 것 놓고 대차게 한번 싸워보자. 서로 절대 덜어주거나 얹어주지 말고 짐승처럼 막 싸우면서 먹어보자고 할 때 아이고, 싶다. 그때까지 그렇게 맘 편한 사이는 아니라는 것일 수도 있고, 공백기로 인해 허기진 사이를 함축하는 말 같기도 하고.

 

 엄마에게 날아드는 지끈한 물음이 남의 얘기 같지 않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근래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살았다고 봤던 것이 원래 주변을 맴돈 수준이었다는 각성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 안 가는 아이로, 부모의 뜻을 눈치껏 따르다가 결국 자유해방을 찾아 가정을 버려야 했던 엄마의 선택이 첫 번째 소설 속 운명을 달리한 친구와 일정 부분 겹치는 모양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 의도치 않게 옥죔이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끊어냄이 엉킴이 되었다는 엄마의 고백을 곱씹게 된다.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공허한 허공의 물음.

 소설 속 스물다섯의 딸은 대견하게도 사랑의 그림자와 이면을 안다. 엄마가 영원히 가출할 거라는 것을, 미래완료형으로 내다보았던 소녀는 여전히 아픈 내면 아이를 간직하고 있지만 분명히 아는 바가, 통찰이 있다. 악몽 같은 사랑이 부모나 형제로 인해 주어질 수 있어도, 본인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가능성을 보이는 까닭이다. 사랑한다면 행복하고 떠올리면 살아갈 힘이 생겨야지 반대라면 글쎄지만. 사랑이 서약과 맹세 따라 연민과 정으로 옮아가는 거 좋다, 좋아.”

 함께함 끝에, 반희씨는 딸의 악몽을 같이 나누기로 한다. 딸이 미래완료 증상에 시달리며 삶을 갉아먹게 혼자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땅콩 껍질 속 땅콩들처럼 흔들리면 같이~ 흔들림 속에서도 아득하고 편안하게 졸면 그만. 멀미나더라도 동행할 결심. 그리고 모녀의 티카타카 정점 찍기. 여자의 일생 gogo 폐경 땡. 완경 땡. 종경 딩동댕~ 오줌 땡. 소변 땡. 배뇨 딩동댕~ 서로 멋있어추임새를 넣어가며 짝짝꿍~~~

 

 

[밑줄]

 아직도 미워해 

 미워하지는 않고, 관심을 안 가지려고 할 뿐이야. 병석씨도 나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고. 아니, 병석씨만이 아니라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좋겠어. 난 세상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눈에 안 띄고 싶어...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난 뭘 주장하고 누구랑 싸우고 뭘 얻어내고 그런 걸 못했어. 그러다보니 힘이 들었겠지. 아무것도 못 바꾸고 아무것도 안 바뀌니까 도망치고 싶었겠지. 그냥 도망치면 될 걸 결혼으로 도망친 게 실수였어...

 그래도 이혼한 거 보면 내가 이기적인 게 맞긴 맞는가봐.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죽기 전에 나를 조금이라도 회복해놓고 싶어서. (75-76)

 

 엄마, 나는 미래완료라는 말이 그렇게 슬퍼. 언제부턴가 난 알았던 것 같아. 엄마가 집을 나갈 거라는 걸. 엄마가 나간 다음에 나 혼자 엄마 없이 살 거라는 걸. 나 고2 때 엄마가 진짜 이혼하고 나갔잖아? 내가 상상한 그대로 미래완료가 된 거야. 나 혼자 집에 있고 엄마는 집에 없고, 그렇게 될 줄 다 알면서 모른 척 살아온 거 같았어.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더 나쁜 미래완료가 생겨난 거야. 아직 안 일어났지만 일어난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미치겠어. (77)

 

 알아. 엄마 보면 날 사랑하는 거 맞아. 날 사랑해서 힘든 게 보여. 나도 엄마 사랑해. 그래서 힘들어.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이 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 눈물도 안 나오고 숨도 못 쉬겠는, 왜 이런 사랑을 하냐고. (77-78)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생각했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것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담배를 끄고 두 손을 맞잡았다. 바람이 휙 지나가면서 진한 흙내와 풀 향이 스쳤다.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79)

 

 그렇지. 넌 고아도 아니고 다 커서 부모가 이혼한 건데 왜 그런 나쁜 생각을 해서 몸을 괴롭혀? (80)

 

 뭐가 그렇게 쩔었어 

 음, 내 딸을 좀더 잘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82)

 

 차가 이쪽저쪽으로 기울고 심하게 쿨렁거렸지만 반희는 마치 땅콩 껍데기 속에서 구르는 땅콩처럼 아늑하고 편안했다... 우리 둘이 언제 땅콩 모양의 타투나 하러 갈까, 했는데 생각만 한 건지 말로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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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25건) 한줄평 총점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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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평점5점
이 계절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글. 작가님의 따스한 시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5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5
YES마니아 : 골드 리* | 2023.05.21
구매 평점5점
아껴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호평. 오랜 팬이라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이 계절에 읽으시길!
1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1
YES마니아 : 로얄 p*****s | 2023.05.19
구매 평점3점
단편집인데 어렵다 소설을 부록의 문학평론가의 조금은 지루한 해설을 읽어야 하다니
1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1
YES마니아 : 플래티넘 g******d |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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