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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번 버스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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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7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468쪽 | 135*200*30mm
ISBN13 9791192579870
ISBN10 1192579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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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류장에서 장장 열두 시간을 기다렸어. 흠뻑 젖은 생쥐 꼴로 덜덜 떨며. 하지만 끝내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어. 난 아주 지독한 감기에 걸렸고 그날 저녁 집으로 가서는 침대에 쓰러져 이틀을 꼬박 앓았지. 진심으로, 그녀 없는 내 인생은 끝이라 생각했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할아버지.”
“젊은이들은 극적인 일을 좋아하잖아. 안 그래? 내 인생도 끝이 나기는커녕 180도 바뀌었지. 그녀가 해준 말이 내 심금을 울려 그 전같이는 못 살겠더란 말이야. 일주일 뒤에 부모님께 가게 일은 그만두겠다고, 이제부턴 연기를 배우겠다고 폭탄선언을 했지.”
“부모님이 뭐라셨어요?”
“불같이 화를 내시더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길길이 날뛰고 고함을 지르고 위협적인 말을 내뱉으며 역정 내는 건 처음 봤어. 하지만 그녀가 말한 대로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밀고 나갔어. 몇 주 힘든 시간을 보내자 아버지도 진정이 되셨지. 그다음 날로 연기 학교에 지원했고.”
(…)
“진짜 대단하세요. 버스에서 만난 여자분은 어떻게 됐어요? 나중에 만났다고 말해주세요, 제발!”
프랭크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리비는 그때야 비로소 알아챈 듯 짧은 숨을 뱉었다.
“그래서 버스를 타시는 거군요.”
“60년 동안 찾고 있어. 그녀를.”
--- pp.72~73

요즘엔 옛날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나. 이것저것 생각하며 버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뭔가를 보거나 듣고는 50년이나 6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거지. 참 별일이야. 옛날 기억이 다시 떠오르다니. 우리 나이가 되면 다 이런가 봐. 불평하는 건 아니야. 지난번에 88번 버스에서 학생들이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나이 때 내가 어땠는지가 또렷하게 기억나더라고. 두려움, 희망, 바람.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고들 하지. 하지만 그 말이 맞는지 모르겠어. 예전 그 승리와 패배감 같은 거대한 감정이 다시 생긴다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거야. 지금은 버스에서 빳빳한 〈메트로〉 한 부 발견하는 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고의 흥분이니까.
--- p.81

“그쪽은 프랭크가 그 오랜 기간 애타게 첫사랑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일말의 감정도 없을지 모르지만 난 그게 세기의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난 프랭크의 딸이 프랭크를 요양원에 가두기 전에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릴 생각이에요.”
“일말의 감정도 없다고 한 적 없어요.” 딜런이 인상을 썼다.
“그럼 왜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예요? 그쪽이 프랭크를 아낀다면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난 프랭크를 진심으로 아껴요. 하지만 그쪽 생각보다 상황이 복잡해요.” 딜런이 뾰족하게 말했다.
“왜죠?”
딜런은 잠시 숨을 고르고 삭발한 부분을 손으로 더듬었다.
“프랭크는 치매에 걸렸어요.”
“뭐라고요?” 리비의 눈이 커졌다.
“작년에 진단받았는데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질 않아요. 그래서 따님이 날 고용해서 하루에 두 번 약 잘 챙겨 먹고 식사를 제때 하는지 확인해요. 근데 요즘 들어 정신을 놓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세상에. 그래서 클라라가 그 평가를 받게 하려는 거군요. 집에 혼자 있거나 버스 탔을 때 정신을 놓을까 봐요?”
리비는 프랭크가 깜빡깜빡한다는 건 알았지만 치매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여자분을 찾는 데 더 집착하는 거네요. 치매가 악화되기 전에요.”
“포스터 몇 장 붙인다고 900만 명이 사는 런던에서 여든 먹은 할머니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어요?”
--- pp.120~121

넌 분명 ‘내가 뭐랬니’라고 하겠지. 그도 그럴 것이 친구야, 넌 언제나 내게 재능이 있다고 말해줬으니까. 그치만 내가 그걸 알지 못했어. 어떤 면에선 우리 아버지 때문이기도 하지. 나한테 시간 낭비라고 귀가 닳도록 얘기하는 사람 밑에서 자라다 보면 그 말을 무시하기가 어려운 법이거든. 하지만 반면에, 내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야 미술을 그만두는 게 덜 고통스러웠을 거란 생각은 해. 만일 내가 진심으로 재능이 있다고, 인생에서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만둬야 했을 때 뒤돌아서기 버거웠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게다가 나한테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데이비드를 임신한 순간 내 부질없는 꿈을 좇을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졌으니까. 요즘엔 여자들이 애 키우면서도 온갖 직업을 다 갖더라고. 우리 메이시만 봐도 그래. 우리 때랑은 아주 딴판이야. 네가 누구보다 잘 알겠지만, 난 내가 엄마라는 게 좋아. 할머니, 증조할머니 되는 일도 신나고. 우리 손주들이 지구 반대편에 있다 해도 말이야.
--- pp.130~131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이제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는 신경 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딜런이 조언했다. 리비는 딜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무슨 말이에요?”
“가족이 실망했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던걸요. 하지만 이제 다 큰 어른이잖아요. 왜 그렇게 신경을 써요?”
“말이 쉽죠, 무정부주의자 펑크 씨.”
“무정부주의자 아니에요. 그저 다른 이들이 내 인생의 선택을 두고 뭐라 생각하든, 우리 아버지가 뭐라 생각하든 절대로 개의치 않을 뿐이죠.”
“가족 말이 틀렸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썼겠어요? 솔직히, 내 인생이 성공작은 아니잖아요? 대학은 중퇴했지, 나한테 질렸다는 남자한테 미련이 철철 넘치고, 현시점 백수, 곧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될 몸이라고요. 내가 이런 삶을 계획했겠어요?”
“성공작이 아니라고 누가 그래요? 그 ‘학위다운 학위를 따고, 가정을 꾸리고, 애를 2.4명 낳는’ 인생은 다 헛소리라고요. 이 중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해버린 순간, 나는 사는 게 훨씬 쉬워졌어요.”
--- pp.168~169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은 정말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에요.”
딜런이 독백을 이어나갔다.
“프랭크를 도우려고 공들여 포스터 붙이는 계획을 짜는 모습, 임신을 대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전부 다요. 홀로 아이 키우기 불안한 거 알지만 당신은 정말 좋은 엄마가 될 테니까 아이는 당신 같은 엄마를 만나 복이 터진 거죠. 누가 곁에서 도울 필요 없이 아이 키우는 일을 혼자 척척 해낼 수 있다는 거 알아요.”
딜런은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쉬려고 말을 멈췄다. 눈은 여전히 선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혼자 하고 싶지 않다면요. 난 아기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그래서 내가 의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난,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당신만 좋다면. 친구로든 아니면…….”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리비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이제 딜런은 시선을 우주복에서 리비의 얼굴로 옮겼다. 어느새 딜런의 표정에 담긴 긴장은 사라지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리비의 심장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아니면 친구 이상으로요.”
--- pp.274~275

리비는 더 말대꾸하기도 신물이 나 한숨만 쉬었다. 말싸움을 포기하고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가족의 참견에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하지만 딜런이 한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족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신경 쓰지 않아야 해요.
“엄마, 나 이제 곧 서른이고 애 엄마가 될 거예요.”
차분하게 말하려고 애쓰며 리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매사 말썽이나 피워 부모님 실망하게 하는 애 취급은 그만하세요.”
“내가 정말 못살아, 너 정말 계속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래?”
폴린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리비의 말을 받아쳤다.
“방금도 딱 그렇게 얘기했잖아요.”
리비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답을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도 않고 내가 뭘 원하는지 관심도 없잖아요. 내가 스스로 앞날을 결정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버리고 꼴통 취급하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요.”
“난 네가 스스로 앞날을 결정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적 없어. 엄마는 그냥 네 걱정을 하는 거야. 그 잘난 네 변덕 때문에 앞날 창창한 의대를 그만뒀잖니. 사이먼이랑도 같은 실수를 하게 두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앞날 창창한 의대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의대 공부가 적성에 전혀 안 맞았다고요! 엄마랑 아빠가 의사 얘길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해서 그만큼이라도 버틴 것뿐이었어요. 엄마가 원한다고 해서 다시 사이먼네 집으로 들어가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진 않을 거예요.”
--- pp.33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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