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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유명해지기 위해, 작품을 불태울 수 있습니까?] 한국 최초 대거상 수상작가 윤고은의 신작. 가난한 한 화가에게 내려온 축복이자 저주. 개의 후원을 받아 창작하되 그 중 최고의 작품은 소각해야하는, 달콤하고 살벌한 제안이 주어진다. 진짜 개가 등장하는 등 기묘한 설정 속에서도 자본주의 세계에서 예술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 - 소설/시 PD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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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 7
작가의 말 * 343 작품 해설 / 그러나 오아시스는 있다_정여울(문학평론가) * 347 |
윤고은의 다른 상품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한다. 소각할 작품은 로버트 재단에서 선택한다.
소각? 혹시 ‘구매’가 ‘소각’으로 잘못 번역된 것은 아닌지, 인쇄상의 오류가 아닌지 의심했는데 그건 정말 작품을 불태우는 행위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은유나 상징의 표현도 아니었다. 정말 불태운다고 했다. --- p.50 “괜찮아요? 옆으로 빠질까요?”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렇게 말했는데 로버트가 걷다 말고 나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랬다. 올려다보았다. 그 구도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구도에 놓인 적이 없었다. 로버트를 건물 안에서 만나든 밖에서 만나든 늘 그는 내 눈높이와 동일한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로버트를 내려다보게 된 셈이고, 그 구도 때문에 그간에 누적된 어떤 불쾌감이랄까 그런 게 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피로감이 가볍게 휘발되어버렸다. 이 작은 개가 뭘 어쩐단 말인가. --- p.233 어떻게 트리밍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표정을 갖게 된다. 빌의 경우에도 그랬다. 소각식을 의심한 적은 없었으나 유령 같은 작품으로 인해 그는 상하좌우, 프레임 밖의 세상을 더듬어보게 된 것이다. 빌의 말은 결국 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버트가 소각한 작품들이 어디로 가는가? 소각식 이후에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닌가. --- p.295 |
이제 모든 것은 로버트, 그 개가 설명할 겁니다
소설은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그랜드캐니언에서 젊은 남녀가 있었고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여자는 웨딩드레스, 남자는 한쪽 무릎을 반쯤 굽혔다. 프러포즈 중이었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감정은 대개 같았다. 감동적이다. 멋있다.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답고 멋있기 때문에 그 사진이 널리 퍼진 건 아니었다. 사진 속 젊은 남녀가 실종상태였기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이제 사진은 더 이상 화사하거나 따듯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미스터리 실종사건의 증거물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매일 밤 뉴스를 장식할 수는 없었다. 하나의 레이어가 더 있었다. 그 사진을 찍은 저작권자. 사진을 찍은 건 다름 아닌 개 ‘로버트’였다. 로버트가 바로 그 사진을 찍었다. 젊은 남녀의 아름다운 첫 시작과 젊은 남녀의 생의 마지막을 사진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중적인 감정, 즉 예술작품에서 파생되는 각기 다른 이미지를 그 사진에서 얻었다. 로버트는 바로 그 지점까지도 추측해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사진 속 젊은 여자의 아버지, 거대 사업가 발트만 회장은 이제는 죽어버린, 사라져버린 딸의 마지막 사진을 남긴, 사진작가 로버트를 찾아 나섰다. 발트만 회장은 오로지 그 로버트를 위해, 미술재단을 만든다. 움직임과 멈춤이 하나의 프레임에 갇힌 그 예술작품을 위해. 파괴되어야만 단 하나의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그 시스템을 위해. 일단 유명해져라, 작품을 불태워서라도 나(안이지)는 잠시 음식 배달 라이더의 삶을 산다. 잠시 ‘예술 하는’ 삶을 멈춘다. 팬데믹 시절에 나 같은 작가는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후원자들의 후원은 끊겼다. 지원도 축소되었다. ‘예술 하는’ 삶은 잠시 사라진 걸까? 집세 때문에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기분으로 살았던 그녀에게 지금 현재 소원은 ‘마당이 딸린 개’를 갖는 것이었다. 어느 날 예술가들을 향한 파격적인 제안으로 유명한 로버트 재단이 안이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의 작품활동을 전폭적으로 후원해주기로 했다는 것. 놀랍게도 안이지의 작품을 선택하고 가치를 인정해준 후원자가 바로 로버트라 불리는 ‘개’였다는 게 더 놀라웠다. 소원이 반쯤 이뤄진 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로버트 재단의 후원이 거절하기 어려울 만큼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 로버트가 ‘개’라는 사실이 영 어색하고 당황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그 제안을 뿌리칠 수 없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안이지는 예술을 포기할 뻔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로버트 재단에게 감사한 마음 한편으로 정말 그 재단의 권위자가 ‘개’인 로버트가 맞을까 싶은 의구심, 정말 후원이 되긴 하는 걸까 싶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든다. 드디어 도착한 로버트 재단. 그곳에서의 생활은 꽤 규칙적이고 절차적이다. 로버트가 원하는 시간에 저녁을 먹고, 로버트가 원하는 시간에 대화를 나누고, 로버트가 원하는 시간에 산책을 해야 한다. 은유와 상징이 아니라 정말 작품을 보는 눈을 가진 걸까? 로버트 재단이 지금까지 승승장구해온 비결은 바로 로버트가 유망한 화가와 뛰어난 작품을 선택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 그럼에도 막상 눈앞에 ‘개’인 로버트를 대하고 보니 자기인식을 가졌을지, 통역사가 로버트의 말을 옮겨오는 것에도 의구심만 든다. 그럼에도 나는 ‘로버트’와 후원 ‘재단’을 분리해서 생각하기로 한다. 재단의 후원 능력만을 믿기에 이른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제안 하나.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해 소각해야 된다는 조건. 불태워져 사라지는 단 하나의 원본 예술가와 작품은 어떤 관계일까? 소설에서 중심축으로 설정된 ‘작품을 불태워야 한다’라는 명제는 창작자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을 불태우는 그 화려한 퍼포먼스는 작품의 희귀성을 최상의 자리로 위치시킨다. 훌륭한 작품으로 선택된 작품이 불타 사라지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한때 존재했으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의미로 작용된다. 가시적인 물성에서 비가시적인 관념으로 몸을 바꿔두는 것. 예술의 표면적인 형상의 이미지에서 관념적인 이미지로 둔갑되는 그 순간인 셈이다. 작품을 태움으로써 물적 가치는 상승하고 그 작품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화가의 값어치 또한 상승한다. 하지만 이 행위는 예술가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작품이 불태워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창작자의 심정은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작품만을 위한 퍼포먼스인 것이다. 내 작품을 불태웠다, 라는 창작자의 선택. 작품을 스스로 폐기했다는 훼손된 자존감. 또한 온전히 작품이 자본가난 후원자에게 귀속된다는 것. 그럼으로 이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창작자는 자신의 존엄과 독립성을 작품의 가치와 맞바꾸게 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러한 지점, 태워야 하는 작품을 그려야 하는 작가의 마음과 작품을 태울 수 없게 되는 작가의 예술적 존엄이 충돌하는 걸 보여준다. |
독자의 상상력 빈곤을 자책하게 만드는 기묘한 설정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 전개로 유명한 윤고은이 이번에도 윤고은했다. 오즈 나라의 노란 벽돌길을 걷는 도로시가 되어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 를 여행하다 보면 소통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이 다 무슨 소용이랴. 한마디로 기상천외하고 흥미진진하다. 이 책이야말로 바로 윤고은의 불타는 작품이다. - 김상욱 (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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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보이스의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를 친절한 언어로 제시한다면 이러하지 않았을까? 변기가 예술이 된 후, 깡통 속 대변이 작품으로 인정받고, 벽에 붙은 바나나에 열광하는 현대미술계의 질문을 특유의 호기심 넘치는 시선으로 풀어낸 관점이 즐거웠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로버트의 모습은 뱅크시와 같았고, 얕은 욕망과 불안 속에 허덕이는 안이지는 이 시대를 견뎌내기 위해 삶을 불태우고 있는 수많은 작가들의 고민처럼 타올랐다. - 김찬용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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