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1부(1장-6장)에서는 과학지식의 본질에 대한 일반론을 다루고, 과학철학계의 거장들이 내놓았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소개합니다. ‘도대체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지식의 기반은 관측이라고들 하는데 인간이 하는 관측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또 그관측을 가지고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가? 과학지식은 꾸준히 축적되는가, 아니면 혁명적으로 개편되기도 하는가? 과학적 진리란 무엇이고, 우리가 과연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과학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진보하는 것인가?’ 등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조금 추상적인 뼈대 위에 2부(7장-10장)에서는 과학사의 기초적인 내용으로 살을 붙입니다. ‘산소는 어떻게 발견했으며 왜 산소라고 하는가? 물은 1기압일 때 항상 100도에서 끓는가? 물분자가 H2O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항상 쓰는 건전지는 어떻게 발명했으며, 거기서 어떻게 전기가 발생되는가?’를 알아볼 것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정답에 의지하지 않고, 정말 옛날 과학자들이 탐구했던 길을 따라가며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 나름의 생각도 커질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탐구의 경험을 제공한 뒤, 3부(11장-12장)에서 모든 내용을 종합합니다. 과학지식을 창조하는 과정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 이야기, 그리고 과학에서 왜 다원주의가 필요하고 유용한지에 대한 논의를 펼칩니다.
철학과 역사를 통해 보는 흥미진진한 과학의 마당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서문」중에서
포퍼는 그런 식의 믿음이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이지는 못하다고 본 것입니다. 과학은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이론을 포기하고 더 좋은 새로운 이론을 얻는 것은 중요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반면 종교적 교리는 불변하며, 신앙이란 어떤 일이 있어도 (정말 죽인다고 해도) 믿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포퍼는 그런 경건하고 독단적인 태도를 과학적 태도의 정반대로 보았습니다.---「1장 과학이란 무엇인가」중에서
관측이 이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과학철학계의 전문용어로는 ‘관측의 이론적재성’이라고 합니다. 선박이나 화물차가 물건을 적재하고 다니듯이, 관측이 이론을 항상 싣고 다닌다는 비유를 사용한 용어입니다. 더 직설적으로 ‘이론의존성’이라고도 하는데 왠지 적재성이라는 용어가 더 굳어져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론적재성을 논의하기 전에 더 일반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인간의 지각 자체가 우리가 처한 상황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코앞에 있는 것은 제쳐놓고 자기 코도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오른쪽 눈을 감으면 시야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이상한 것이 보이는 데 그것이 자기 코입니다. 또 왼쪽 눈을 감으면 시야 왼쪽 아랫부분에 그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코가 항상 시야에 들어와 있기는 한데, 그것이 계속 보이면 유용하지도 않고 걸리적거리니까 뇌에서 알아서 편집해서 우리 의식에는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안경을 오래 쓴 사람은 시야에 안경테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이것도 신경 써서 둘러보면 사실은 항상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경을 처음 쓴 사람은 테가 보이기 때문에 불편해합니다. 후각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어서, 어떤 한 가지 냄새를 한참 맡으면 더 이상 그 냄새를 느끼지 못합니다. ---「2장 지식의 한계」중에서
측정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기준을 만들어내려면 순환논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는 걱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기준이 아예 없는 데서 과학적 탐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경험을 토대로 지식을 쌓아갈 때 처음에는 감각에 의존해 시작합니다. 일단 감각이 옳다고 가정하고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감각을 기반으로 얻은 지식으로 측정기구를 만들고 나서는, 그 기구를 사용해서 감각 자체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온도의 예로 돌아가봅시다. 겨울에 추운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집 안이 아주 덥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온도계를 보면 실내온도는 내가 나가기 전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면 나의 체감이 왜곡되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래 왜 온도계를 믿고 사용하게 되었나를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체감과 대강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날이 확실히 더워지는데 온도계에 넣은 액체가 팽창하지 않는다면, 그런 ‘온도계’는 엉터리라고 판단해서 아예 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체감과 대부분 일치하면서 더 정밀하게 온도를 나타내주는 온도계가 있어서 채택을 하고 나면, 그것을 체감보다 더 신용합니다. 가끔씩은 온도계를 믿으며 체감을 무시하고 수정합니다. 예를 들어서 날은 정말 춥지 않은데 내가 열이 나기 때문에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때 날이 정말 춥지 않다는 것은 온도계에 의지해서 판단하고, 내가 열이 난다는 것도 온도계(체온계)를 써서 판단합니다. 이것이 역설적이면서 아주 중요한 인식과정입니다. 처음에 어떤 기준을 기반으로 탐구를 시작하여, 그 탐구의 결과를 기반으로 원래 채택했던 기준 자체를 수정하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3장 지식의 수량화」중에서
쿤이 과학적 패러다임을 객관적으로 선택하기 힘들다고 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제 그에 대해 자세한 논의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한마디로 하자면, 패러다임이란 이론뿐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관측내용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똑같은 업적도 아주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2장에 나왔던 ‘오리-토끼’ 그림이 도움이 됩니다. 누가 쭉 이 그림을 오리로 보다가 갑자기 토끼라고 깨닫는다든지, 아니면 이제부터 토끼로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전에 알고 있던 일까지 모든 것이 새로 보입니다. 토끼로 보다가 오리로 보게 되면 그 그림에 들어 있는 모든 선의 해석이 갑자기 달라져버립니다. 토끼 귀였던 부분은 오리 부리가 되고, 토끼의 입은 오리의 뒤통수가 되고, 그렇게 부분 부분의 의미가 다 변합니다. 눈은 여전히 눈이지만, 토끼 눈에서 오리 눈으로 둔갑했기 때문에 그대로가 아닙니다. ---「4장 과학혁명」중에서
과학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는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쓰고, 우리가 잘 다루는 수학으로 풀고, 여러 가지 현상을 이상적으로 단순화하기도 하는 식으로 아주 깨끗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은 사실 굉장히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 같기도 하고 좀 이해하기도 힘들고 참 오묘하게도 복잡합니다. 즉, 여러 가지 실험이나 관측을 해보면 결과는 그렇게 단순하고 깨끗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전통적 실재론적 입장에서는 실험기구가 부정확하거나 혼선을 일으키는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우리가 관측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서 관측결과가 깔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실재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단순하고 깨끗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저는 그것 또한 일신론적인 종교적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왜 자연을 그렇게 지저분하게 창조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이 어떤 마음으로 자연을 창조하셨는지 인간이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5장 과학적 진리」중에서
우리가 과학지식의 본질을 정말로 파악하려면 과학의 탐구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천천히 깊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2부에서는 한 장에 한 가지씩 과학사에서 중요한 일화를 뽑아서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어떤 이론이 어떻게 발전됐고, 어떤 실험을 했고, 어떤 논쟁이 있었고, 어떻게 해서 어느 쪽이 이겼고, 그 승부의 판결은 정당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입니다. 그런 논의에 필요한 과학을 다 설명하면서 나갈 것이기 때문에 현대물리학 등의 난해한 주제를 다룰 수는 없고, 과학적으로 아주 쉬운 내용들을 뽑았습니다. ‘물이 H2O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산소는 왜 ‘산소’라고 하는가?’ 등의 기본적인 이야기인데 파고들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6장 과학의 진보」중에서
화학의 플로지스톤 체계와 산소 체계는 둘 다 훌륭했고,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을 각기 잘 설명했으며 제각각 다른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한쪽이 다 옳고 확실히 우월해서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봐지에가 산소를 왜 ‘산소’라고 명명했는가만 기억해도 많은 것이 다시 보입니다. 일반 역사에서도 그렇듯, 승자의 관점에서만 쓰는 과학사는 진실성도 떨어지고 재미도 별로 없고 그리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7장 산소와 플로지스톤」중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어떤 과학지식이 처음에 왜 받아들여졌는지를 지금은 까맣게 잊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지식을 뚜렷한 이유도 모르고 신봉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것을 정말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현대인들은 참 많은 과학적 내용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유전은 DNA분자를 통해 이루어지고, 공룡은 옛날 옛적에 살다가 멸종했고……. 그런데 사실은 쉽지 않은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지식을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비웃고, 그런 무식한 사람들이 아직 있다며 개탄도 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의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의 26퍼센트는 아직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고 있고, 52퍼센트는 인류가 다른 생물에서 진화했다는 것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를 보고 이러다가는 사회가 저질적으로 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들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지식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과학적 상식을 과학자들이 처음에 어떻게 정립했는지는 잘 모릅니다.---「8장 물은 H2O인가?」중에서
요리를 좀 해보았다면, 부엌에서 물을 끓일 때 냄비나 그릇의 종류에 따라 끓는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관찰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양은냄비에 물을 끓여봅시다. 양은냄비를 사용하면 온도가 낮아도 잘 끓습니다. 제가 시도해보았을 때, 97도 정도에서 충분히 라면을 넣어도 될 정도로 팔팔 끓었고 아무리 계속 끓여도 98도 이상 올라가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식의 결과가 나오면 온도계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지요? ---「9장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끓는가?」중에서
창의적 과학교육이 잘 안 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과학에는 어떤 문제든 정답이 있고, 잘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그 정답을 깨치게 하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가정 때문입니다. 정답을 아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라면 무엇 때문에 기본적인 내용을 스스로 탐구해서 깨치게 하겠습니까? 그냥 그 답을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창의성은 나중에 가서 아직 아무도 정답을 모르는 어려운 문제를 다룰 때나 발휘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주입식 훈련은 그런 시점까지 빨리 데려다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입식 교육의 정연한 논리에는 큰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과학의 내용을 파고들어가 보면, 아주 간단한 문제에도 명확한 정답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에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등의 간단한 정답을 만들어서 가르칩니다. ---「10장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끓는가?」중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과학에는 절대적인 지식이란 없고 지식을 가장 잘 획득할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도 없습니다. 각각 개인과 소집단의 다양한 관점과 필요에 따라 질문 자체도 달라지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이 유일무이한 진리를 추구하고 또 그러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멋진 꿈이었습니다. 과학의 초창기에 뉴튼 같은 사람은 이론 하나만 잘 만들면 신이 정말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가 하는 섭리를 알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멋진 꿈이지만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꿈에 대응하는 다른 비전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다원주의입니다. 같은 분야 내에서도 여러 종류의 과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시에 여러 방향의 지식을 추구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창의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자연으로부터 최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같은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표현을 함으로써 인간의 문화적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2장 다원주의적 과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