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
모두가 하루를 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시간은 이들을 비켜가고 그들은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 속에 갇혀 있다.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든 잠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애쓴다. 그곳에서 하루를, 이틀을, 가능하다면 모두를 흘려보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거리에 그들의 잠을 방해하는 것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그들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 그런 예감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의 강도는 점점 커진다.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_59~60쪽
이곳은 젊고 건강한 내게 가장 인색하고 야박하게 군다. 내가 가진 젊음을 대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이나 젊은 나를 부러워하긴 마찬가지다. 마치 굉장한 걸 가진 것처럼 생각한다. 소진해야 할 젊음이 버겁도록 남았다는 게 얼마나 막막한 일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늙고 나는 젊다. 그러나 이곳에 함께 있으니 결국은 똑같은 게 아닌가. 아니, 차라리 살날이 적은 당신이 나보다 낫지 않은가.
_103쪽
모르는 사람 앞에 빈 손바닥을 펼쳐본 사람은 안다. 그 작은 손바닥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치르고 얼마간의 돈을 쥐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중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거리에서 한번 잃은 것은 절대 되찾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을 영원히 잃는 대가라면 우리가 받는 돈은 그냥 주어지는 것도, 많은 것도 아니다.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잃고 난 다음에는 또 다른 걸 잃어야 하고, 잃을 게 없을 때까지 잃고 또 잃고 마침내 다 잃은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서글픈 일이다. _185~186쪽
제대로 씻지 못한 내 몸을 여자가 핥는다. 내 몸에서 풍기는 온갖 악취를 견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 한다. 숨을 몰아쉬고 기침을 하면서도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듯 여자는 필사적이다. 그런 여자에게 그만하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심장 소리가 거세진다.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발가벗은 욕구만 남은 이 행위를 어떻게 사랑이나 애정이라는 달콤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_285쪽
각조 위치로.
사람들은 교육 받은 대로 두 개의 조로 나뉘어져 골목을 둘러싼다. 하얀 입김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손가락을 움직여 파이프를 힘껏 움켜잡는다. 언 손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어둠 속을 노려본다. 보이지 않는 저곳에 몸을 납작 엎드린 것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분노만 남은 짐승 하나가 내 안에서 으르렁댄다. 그 짐승을 어떻게 다독이고 잠재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_295~296쪽
---본문
딸에 대하여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 --- p.32
“이 애들은 유식하고 세련된 깡패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는 주먹을 쓰는 대신 주먹보다 강한 걸 쓰는 방법을 가르쳐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뺏긴 줄도 모르고, 당한 줄도 모르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거겠지.” --- p.46
“네가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은 이미 많이 들었다. 무슨 말을 또 얼마나 해서 가슴에 대못을 치려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권리가 있다. 힘들게 키운 자식이 평범하고 수수하게 사는 모습을 볼 권리가 있단 말이다.” --- p.66
“그리고 아프게 깨달았다. 이대로 딸애를 계속 당기기만 하면 결국 이 팽팽하고 위태로운 끈이 끊어지고 말겠구나. 이대로 딸을 잃고 말겠구나. 그러나 그게 이해를 뜻하는 건 아니다. 동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쥐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푼 것뿐이다. 딸애가 조금 더 멀리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양보한 것뿐이다. 기대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또 무언가를 버리고 계속 버리면서 물러선 것뿐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딸애는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른 척하는 걸까. 모르고 싶은 걸까.” --- p.68
“엄마, 여기 봐. 이걸 보라고. 이 말들이 바로 나야. 성소수자, 동성애자, 레즈비언. 여기 이 말들이 바로 나라고. 이게 그냥 나야.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나를 부른다고, 그래서 가족이고 일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이게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냐고.” --- p.107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 너무나도 분명한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