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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부 슬픔에 대한 공부 당신의 ‘지겨운’ 슬픔 -[킬링 디어]가 비극인 이유 슬픔에 대한 공부 -발터 벤야민과 함께 2년 동안의 꿈 -세월호 2주기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터널 앞에서 -김성훈 [터널] 슬픔의 불균형에 대하여 -민용근 [혜화, 동]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허무, 허무 그리고 허무 -어니스트 헤밍웨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덧없음에 대한 토론 -프로이트와 릴케 그녀, 슬픔의 식민지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사랑의 두 번째 죽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슬픔임을 잊어버린 슬픔 -김경후 [열두 겹의 자정] 천진하게, 그리고, 물끄러미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으로서의 이소라 -이소라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 5.18과 4.3 사이 폭력에 대한 감수성 액자 속의 진정성 -이준익 [동주] 2부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사물성, 사건성, 내면성 -사진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제임스 설터 『어젯밤』 단절의 선을 긋다 -권여선 [사랑을 믿다] 시의 옷을 입은 비극 -헤르타 뮐러『숨그네』 고통받은 마음의 역사 -임철우 『이별하는 골짜기』 박완서 선생님 영전에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예외적인 정신의 유전자 -배수아와 김사과 캐릭터 박물관 특실편 -알베르 카뮈 『이방인』 삶과의 게임에서 지다 -이상 『이상 소설 전집』 오독의 빛에 의지하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음악 서술자 시점 -가즈오 이시구로 『녹턴』 언어의 이주민을 위하여 -다와다 요코 『영혼 없는 작가』 제발트만큼 고집불통인 아포리즘에 대하여 소설의 인식적 가치 -은희경 『태연한 인생』 왜 소설을 읽는가 -김숨, 윤이형, 백영옥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3부 그래도 우리의 나날 굿바이, 박정희 -탄핵과 그 이후 비무장의 예언자들 -2018년의 ‘남북’과 ‘남녀’ 깊이 있는 사람 시기상조의 나라 사회적 인정의 복지 -태극기 부대를 바라보며 메릴 스트립의 용기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보수의 반대말은 민주 혐오와 농단 절망을 즐기지 않기 -김성수 [아수라] 희망은 종신형 -김승희 『희망이 외롭다』 국가의 살인 -김일란·홍지유 [두 개의 문] 정치소설이 필요한 시간 -안토니오 타부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희망은 버스를 타고 -이영주 [공중에서 사는 사람] 저급한 이야기꾼들의 신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칠레의 지진] 천안함, J 선생님께 평화가 곧 승리 4부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문학동네시인선 50호 발간에 부쳐 시를 사랑한다는 말 -문학동네시인선 100호 발간에 부쳐 시, 정답 없는 질문 -릴케, 하나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릴케, 둘 시의 천사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새 질병으로 태어날 거야 -김혜순 『슬픔치약 거울크림』 축제로서의 노벨문학상 작가는 주크박스가 아니지만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소곡] 노르웨이의, 숲이냐 가구냐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고독과 행복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와 심보선 어떤 순간의 진심 -신철규 [유빙] 모른다고 말하는 시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이토록 뜨거운 태도들 -이상과 김수영 풀, 저항도 절망도 아닌 -김수영 [풀] 동춘동 디오게네스의 초상 -김영승 [흐린 날 미사일] 우리는 시를 포기하지 말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호 발간을 축하하며 정확한 칭찬 -장승리 [말] 5부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사랑의 논리학을 위한 보충 마르크스의 사랑 나의 소중한 적 당신의 (역)진화 -얼굴, 음성, 그리고 문자 황현산의 부정문 봄날의 새끼 곰과 정말이지 굉장한 것 문어체의 진심 네가 왜 미안해? -민용근 외 [어떤 시선] 인간의 디폴트에 대하여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이것은 물이다』 공자의 인간유형론 멘토르의 멘토링 146배의 능력 차이 우울하게 애매하게 -당신의 ‘소울 시티’는 어디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여 문학에 적대적인 세계 한 번 보고는 알 수 없다 누가 대중을 존중하는가 시간의 네 가지 흐름 부록 노벨라 베스트 6 추천사 자선 베스트 10 인생의 책 베스트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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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산문 문장은 고통도 적확하게 묘파되면 달콤해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장이다. 달콤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꿈과 잠의 주체인 우리는 안다. 꿈과 잠에 비유해본다면, 그녀의 문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는 한참을 더 울게 되는 그런 꿈이고,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 한참을 더 울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 슬픔이 달콤한 안도감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찾아오는 그런 잠이다.
--- p.69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 pp.92∼93 한편 좋은 소설에서 인물들은 대개 비슷한 일을 겪는다. 문득 사건이 발생한다, 평범한 사람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고뇌한다, 마침내 치명적인 진실을 손에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신이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식이다. --- p.116 그렇다면 유다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배반해야만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간다. --- p.149 나는 ‘소설적인 문장’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저 아름답게 쓰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요령부득의 문장을 써놓고 폼을 잡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 --- p.159 나는 아포리즘을 경멸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중언부언과 지리멸렬이 차라리 더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아포리즘이 시나 소설에서 반드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아포리즘 따위는 쓰지 않겠다는 고집이 오히려 독창적인 문학적 개성을 만들기도 한다. --- pp.164∼165 인간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어둠 속에 앉아 있어본 작가는 대낮의 햇살에서도 영혼을 느낄 것이다.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 --- p.201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질색하고 시에서 그 가치를 수상쩍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얻은 것들에 조금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시는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 --- p.272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확한 길이기는 하지만, 쉽고 빠른 길은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해야 한다. 그 어렵고 느린 길을 걸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은 그 대신 권력을 가지려 한다. 권력을 얻어 명령의 주체가 되면 커뮤니케이션을 생략해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 p.344 |
너는 슬프지만 나는 지겹다
타인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에 관하여 책의 큰 축을 이루는 것은 ‘슬픔’이다. 저자는 영화 [킬링 디어]를 통해 타인의 슬픔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한계를 본다. 그러나 타인의 슬픔을 결코 알 수 없으리란 결말을 알면서도, 다른 이의 슬픔을 공부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함을 그는 지적한다. 제목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데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이해하려 애쓰는 것에서 오는 역설적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_28쪽 이 외에 책에서 말하는 ‘슬픔’의 면모는 다양하다. 발터 벤야민을 통해 패전국의 왕 프삼메니토스는 왜 가족의 죽음이 아닌 시종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는지 살피며 슬픔을 해석하는 방법을 고찰하기도 하고, 프로이트의 “꿈은 소원 성취”라는 명제를 소개하며, 그렇다면 물속에 잠긴 아이들의 꿈을 꾸는 유가족의 꿈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되묻기도 한다. 문학이 독자를 위로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을 생각해보는가 하면, 트라우마는 내가 잊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놓아주는 ‘주체’가 아닐까 이야기하며 현재진행형의 역사적 사건을 꺼내기도 한다. 그러한 슬픔은 궁극적으로는 3부의 참여적 글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문학작품과 사회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슬픔을 분노로 표출한다. 3부의 [굿바이, 박정희]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름을 알린 저자가 때로는 이렇게도 매섭고 신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2년 뒤 우리는 그때와는 다른 탄핵을 경험했다. 전적으로 국민의 뜻대로 된, 국민의 힘으로 이룬 대통령 탄핵이므로, 당연하게도 이것은 혁명이라고 불려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12년 전의 박근혜 의원처럼 웃을 수는 없었다. 쌓인 울화가 많았으므로, 이번에도 눈물이 났다. _183쪽 가까스로 생각해보면 박근혜 씨가 행한 가장 위대한 일은 그가 탄핵을 당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업적인가.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1962)에는 “만일 제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그것은 둘을 죽인 셈이에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 비슷하게 말해보자면, 박근혜 씨는 우리가 한 사람을 탄핵하면서 두 사람을 탄핵할 수 있도록 했다. _184쪽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가 되기 위하여 또 한편으로 이 책은 저자 특유의 진진한 작품 해설 외에도, 그의 ‘문학관’을 매우 충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기 즐겁다. 그는 “좋은 소설의 요건은 무엇인가”, “평론가는 왜 대중의 적이 되었는가”, “어떤 비평가가 되고 싶은가” 등등 그간 받아온 질문들에 성실히 응답한다. 또한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고 실망감을 털어놓기도 하고, 노벨문학상을 어떻게 봐라봐야 할 것인지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등, 평론가의 생각과 일상을 동시에 펼쳐 보인다. 어떤 비평가가 되길 원하느냐는 질문을 몇 번 받은 이후 나는 간결하고 명료한 대답을 준비해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최근 어느 대담에서 같은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 이 대답은 곧바로 두 개의 추가 질문을 유발할 것이다. 첫째, 왜 칭찬인가. 어떤 텍스트건 칭찬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에 대해서만 쓰고 싶다는 뜻이다. (…) 둘째, 왜 정확한 칭찬인가. 칭찬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서 하는 일이 아니다. 칭찬은, 칭찬의 대상에게도 그렇지만 칭찬의 주체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다. 부정확한 비판이 분노를 낳는다면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칭찬은 자신이 칭찬한 작품과 한 몸이 되어 함께 세월을 견디고 나아간다. 그런 칭찬은 작품의 육체에 가장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된다.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필요도 없다. _324쪽 나에게 ‘이 책을 그만 읽는 게 어떨까’ 하는 유혹이 찾아오는 1차 고비는 처음 10쪽 부근, 2차 고비는 3분의 1 지점이다. 고비가 두 군데라는 것은 내가 소설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이 적어도 두 가지라는 뜻이다. _159쪽 이 외에 “인간은 넙치와 같아” 서로의 반쪽을 찾아다닌다는 플라톤의 『향연』을 통해, 결여를 통해 온전함을 향해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랑 고유의 구조를 도출하는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는 삶과 일상에 대한 그의 고찰이 빛을 발하는, 이 책의 또 다른 백미다.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 구조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다. 부끄러워서 대개는 감춘다.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 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가,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 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 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결여의 교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_332쪽 서로의 ‘결여’를 교환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관계에 대한 고찰 외에도, 커뮤니케이션에 무능한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권력에 대한 집착, 유행어를 통한 세태 관찰 등 문학작품 이외의 세상 전반을 고찰하는 저자의 ‘정확한’ 시선을 통해 우리는 더욱 더 깊어진 신형철 평론가의 생각과 문장을 만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