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지지하는 최신 과학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몸은 잘 정비된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한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될, 세포의 지속적인 갈등이 일어나는 장소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책의 끝에서(삶의 끝은 아니더라도)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자아라는 것이 조화로 운 몸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자아란 무엇인가? 게다가 무엇을 위해 자아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 책에는 수명을 늘리고, 식단과 운동요법을 개선하고, 더욱 건강한 태도를 갖게 해 줄 ‘실용적’ 지침이나 비결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이 책이 몸과 마음을 향한 통제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한다. 문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프로젝트에 투입해야 하는가에 있다. --- pp. 16~17
예방 검진으로 외과 수술, 방사능 치료, 생활방식 제한과 같은 고통스러운 치료나 희생이 필요한 질병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이러한 조치들이 내 수명을 몇 년 더 늘려 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연장된 삶은 그저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의 연속일 것이다. 현재 예방 의학은 대개 생명을 마치는 순간까지 계속 이어진다. 75세 노인이 유방 조영 검사를 받아야 하고, 이미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다른 질병 검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 검사와 검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윤이다. 이는 미국에서 특히 심하다. 영리를 추구하는 민영 의료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나 병원, 제약 회사는 어떻게 해서 본래 건강한 환자들로부터 돈을 벌 수 있을까? 그들로 하여금 충분히 많은 검사와 검진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틀림없이 무언가가 잘못되거나 최소한 추가 검진이 필요하게끔 만든다. --- pp. 28~29
졸라나 일리치 같은 비판적 사상가들에 따르면, 의료적 의례의 기능 중 하나는 ‘사회적 통제’다. 의료 현장에서의 만남은 흔히 사회적 지위의 격차를 드러내며 이루어진다. 지난 수십 년간 이민자 출신 의사와 여성 의사가 늘긴 했지만, 의사는 대체로 교육받고 부유한 백인 남성들일 가능성이 크며, 환자가 그들과 만날 때는 옷을 벗거나 자기 몸에 있는 구멍에 무언가를 삽입하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등 복종 행동(submissive behavior)을 취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는 강제 알몸 수색처럼 형사 사법 체계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과 같은 것으로, 당하는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 주려는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는 행위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의사와 환자는 마치 중국 황제를 알현할 때 머리를 조아리며 존경을 표현하는 고두(叩頭)와 흡사한, 지배와 복종의 의례를 재연하고 있다. --- p. 47
환자에게 시행되는 것은 무엇이든 통계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개념, 즉 ‘증거기반 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도발적인 명칭은 곧바로 이런 질문을 낳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의학은 무엇에 근거해 왔는가? 경험? 습관? 직감? 아니면 전통적으로 의학은 ‘증거기반’이 아니라 ‘명성기반(eminence-based)’인, 그러니까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명성 및 제도적 지위에 기초한 것이었나?’ 그간 몇몇 의료 전문가들이 내게 강요했던 검사의 대부분은 ‘증거기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유방 조영 검사를 예로 들어 보자. 수전 코멘 재단 같은 유명 유방암 단체들이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일반적 통념에 따르면, 연례 유방 조영 검사를 통한 유방암 조기 발견이 발병 후 5년 생존율을 급격히 높여 준다. 하지만 대규모로 반복해서 이루어진 국제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기적 유방 조영 검사 덕분에 유방암 사망률이 현저히 감소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검진을 통해 암을 발견한 여성이라면 그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유방 조영 검사에서 발견된 작은 점은 본격적인 암으로 발전되지 않을 공산도 컸다. 검진에서 발견돼 의사들이 치료하고 있는 것은 종종 진행이 아주 느리거나 비활성 상태인 종양이었고, 어떤 것은 ‘유관상피내암’처럼 다른 부위로 전이되지 않는 비침윤성 질환이었다. --- p. 58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도, 직업 경력을 설계할 수도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의 몸만은 통제할 수 있을 터였다.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근육 에너지가 소비되는 방식 말이다. 피트니스 산업의 개척자인 짐 픽스는 《달리기에 관한 모든 것》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회와 정부, 일, 결혼, 교회를 비롯한 많은 것들에 대한 믿음을 잃은 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 것 같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믿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기 견습생이 한 말도 인용한다. “달리기는 내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줘요.” 운동을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중대한 불의와 관련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적어도 나 혼자서, 혹은 즉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레그 프레스 머신의 무게를 20파운드 올리겠다고, 몇 주 안에 그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결정할 수 있다. 한때는 내게 너무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던 헬스클럽이 이제는 내가 확실하게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 중 한 곳이 되었다. --- p. 82
비즈니스 세계에서 ‘마음 챙김’에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만든 건 분명 실리콘밸리였다. 만약 그것이 제너럴 밀스에서 처음 뿌리 내렸다면 구글이나 페이스북에서 얻은 것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너릴 밀스가 취급하는 제과류는 디지털 기기가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지위와 명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실리콘밸리는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 최고 두뇌들’의 본거지이자 ‘전 세계 혁신의 중심지’이며, 금융위기 이후 잠시 주춤해진 월스트리트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이다. 마음 챙김의 뿌리는 고대 종교에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것으로 확립해 준 것은 바로 실리콘밸리의 승인이었다. --- pp. 117~118
부유층이 매일 통곡물 섭취와 운동 등 건강한 삶을 위한 최신 처방을 충실하게 따르려고 애쓴 반면, 부유하지 않은 계층은 대부분 입에서 맛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을 먹으며 담배를 피우는 등 과거의 편안하고 건강하지 못한 생활방식에 빠져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 계층이 건강 열풍에 반감을 가진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헬스클럽 회원권은 너무 비쌌고, ‘건강식’은 대체로 ‘정크 푸드’보다 비쌌다. 그러나 계층이 분화함에 따라, 하위 계층은 제멋대로이며 불건강하다는 새로운 고정관념이, 그들은 제대로 읽고 쓸 줄도 모르는 자들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과 재빠르게 결합했다. 나는 최저임금 인상 지지자로서 강연을 하다가 이러한 상황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부유한 청중들은 블루칼라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비참할 정도로 낮은 임금에 대해 동정적으로 혀를 차면서도, 종종 ‘왜 그들은 자기 자신을 더 잘 돌보지 않는지’, 예를 들어 왜 담배를 피우거나 패스트푸드를 먹는지 모르겠다고 반응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걱정은 보통 그들에 대한 비난으로 물든다. --- p. 134
생물학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다소 편향된 생각은 낙관적이며 심지어 유토피아적이기까지 하다. 우리의 몸은 환경―혹은 적어도 우리의 먼 선조들이 직면했던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한다. 굴드와 르원틴은 진화생물학을 비판한 글에서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 나오는 한없이 낙천적인 교수 팡글로스를 언급했다. 소설 속의 팡글로스는 ‘가능한 모든 세상 중에서 최선인’ 이 세상에서 만물은 가장 좋은 방향으로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몸을 ‘기능적’ 관점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몸의 모든 부분과 하부 단위들은 조화롭게 작용하며, 심지어 전체로서의 몸이 요구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학창 시절 생물학을 처음 접한 방식이다. 이때 생물학이란 이상적으로 기능하는 복잡한 시스템에 대한 연구이며, 그 안에서 질병이나 죽음은 실망스러운 일탈일 뿐이다. 하지만 가능한 모든 세상 중에서 최선인 이 세상에 사는 모두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질병과 죽음이라는 일탈은 언급하지 않기에는 너무 흔하며, 그냥 무시해 버리기에는 너무 극적이다. --- pp. 163~164
몸속의 개별 하부 단위인 세포가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면, 언제든 대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 이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 아이를 출산한 여성들 중에는 자신이 품고 있던 태아의 세포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있다. 말 그대로 ‘키메라’ 혹은 다른 개체가 섞여 있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또한 배아가 임의로 자궁이 아닌 다른 곳에 달라붙는 경우가 모든 임신 가운데 1~2퍼센트 정도 되고, 이는 엄마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하게는 유방암세포가 뇌에 침입하기 위해 자신을 신경세포로 ‘위장’한다는 사실이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는 몇몇 세포들, 그리고 소규모 세포 그룹들에서 이러한 자기주장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놀라서는 안 된다. 자가면역 질환은 분명히 다른 인체 세포에 대한 면역세포의 자발적인 공격을 수반한다. 그리고 암은 단일 세포 혹은 소규모 세포 그룹에서 시작되는 맹렬한 ‘생활권’ 쟁탈전이다. --- pp. 183~184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세포의 의사결정이란 “유전적 혹은 환경적 차이와는 무관하게, 세포들이 서로 상이하고 기능적으로 중요하며 물려줄 수 있는 운명을 떠맡는 과정이다.” 해석하자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대식세포나 아메바처럼 움직이는 세포의 가장 일상적인 의사결정 중 하나는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이냐다. 여기서 우리 인간들은 광범위한 일반화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물질이나 반대로 그들을 유인하는 물질을 향해 움직이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일반적인 소견이다. 이제는 생체 현미경 같은 신기술로 살아 있는 조직 안에 있는 각 세포들의 행태를 추적할 수 있게 됐고, 그렇게 해서 산출된 영상은 세포들이 놀라울 정도의 개별성을 띤다는 걸 보여 준다. 우리가 샘플용 세포 그룹 안에서 평균적인 움직임을 추산하고자 할 경우, 대부분의 세포들이 바로 그 평균과는 거리가 먼 경로로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종양 속 암세포는 ‘극단적인 다양성’을 보인다. NK세포는 대식세포처럼 미생물 같은 표적을 공격하지만 늘 죽이는 건 아니다. 2013년의 한 논문에 따르면, NK세포들 중 약 절반가량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며, 아주 소수만이 인간 관찰자들이 말하는 ‘연쇄 살인마’가 된다.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가 공격하는 T세포는 또 다른 유형의 면역세포다. T세포들의 움직임은 특히 관찰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 pp. 200~201
만약 아무런 장애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영생이야말로 분명 더 매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들로 대표되는 인구통계학적 극소수들 외에―생의학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그 누구도 간병인이 먹여 주고 ‘볼일을 도와줘야’ 하는 생명 연장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다 겸손하게 말하자면, ‘성공적 노화’의 목표는 종종 생애 마지막 몇 년간의 ‘병적 상태를 줄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산 뒤 빠른 시간 내에 죽는 것이다. (…) 하지만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다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죽는다는 목표는, 말하자면 눈사태나 고산병의 개입 없이 실현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불길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고자 취하는 모든 조치들―욕구를 박탈하며 온갖 노력을 들이는 것―은 손상된 신체와 굴욕적인 장애를 안고 더 오래 살게 될 가능성으로 이어질 뿐이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폴라 스팬이 지적했듯, “수명 연장에 따른 대가는 인생 말년에 높은 비율로 장애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하자 보증도 없다. --- pp. 219~220
우리 시대에 ‘자존감’이라는 말은 매우 종교적인 속성을 띠기까지 한다. 우리는 자신을 ‘믿고’,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진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라’고 배운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그 누가 우리를 사랑하겠느냐는 것이다. 20세기에 번창하기 시작한 끝없는 ‘자기계발’적 조언들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라고 명한다. 자신을 충족시키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때로는 자신을 ‘축하해 주라’는 것이다. 이제 ‘믿음’ 같은 단어들도 종교적 입장을 충분히 연상시키지 않는 가운데, 한 사이트에서는 자신만의 성지를 만들어서 ‘스스로를 숭배하라’고 권한다. 그 성지에는 사진(아마도 셀카), 좋아하는 장신구들, 그리고 향수, 양초, 향료 같은 ‘좋은 향기가 나는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자아는 분명 사람들이 숭배하는, 만들어진 신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종교들이 소중하게 모시는 신과 다르지 않다. 자아도 신도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믿음’의 발휘를 요구한다. --- pp. 242~243
아마도 우리의 애니미스트 조상들은 엄격한 일신론, 과학, 계몽주의가 지배한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가 잊어버린 무언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계는 생명력 없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활기로 들끓고 있고, 때로는 스스로 행동할 능력과 의도까지 갖고 있다는 통찰이다. 우리가 고요하고 견고하리라 예상할지도 모르는 물질의 중심―양성자나 중성자의 내부―에서도 요동이 일어나며 활기가 넘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우주가 ‘살아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잘못된 생물학적 유비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주는 커다란 빈 공간에서부터 아주 작은 틈새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흔들리며 요동치고 있다.
--- p. 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