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을 잘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면 피아노 고쳐 주는 아저씨에 불과할 테지만, 나는 조율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조율이란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피아노라도 조율을 잘 못하면 결코 예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소리에 힘이 갖추어지면 조율사가 감동하고 다음으로 연주자가 감동하고 끝으로 청중이 감동한다.
조율에 입문한 뒤로 나는 이왕 하는 일이면 우리나라 최고의 조율사가 되기를 목표로 노력했다. 그러나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을 만나면서 세계적 수준의 조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한층 더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 「책머리에」중에서
지금 예술의전당에는 무대에 나가는 피아노가 일곱 대 있다. 피아노마다 성격과 음색이 조금씩 다 다르다. 피아니스트가 여러 대 중에서 자기가 연주할 피아노를 고른다. 작곡가별로, 또 작품 성격에 따라 피아노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 개인 취향도 작용한다. 어떤 곡이든 음이 화려하게 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부드러운 음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제일 힘든 요구는 부드러운 소리의 피아노를 골라 놓고 소리를 쨍쨍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이럴 때는 참 난감하다. 부드러운 피아노를 쨍쨍하게 만들어 버리면 그 피아노의 특색이 없어져 버린다.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하는 연주자를 위해서 그대로 둬야 하는 피아노에 그런 요구가 들어오면 뜻대로 해 줄 수 없으니 스트레스가 더 크다.
하지만 굉장히 보람을 느낄 때도 있다. 독학으로 공부한 나를 사람들이 알아줘서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를 만나게 되고, 그들 입소문으로 연주장에도 뽑혀 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4만 1000여 번의 공연장 피아노 조율을 하면서 만난 세계 정상급 연주가들에게 지적이나 주문 사항을 들으며 하나씩 노하우가 쌓여 간다. ‘제대로 된 피아노가 있을까? 조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나라일까?’ 하는 의문을 품고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을 만족시키면서 작지만 국위 선양을 하니 보람도 자부심도 크다.
--- 「예술의전당에서」중에서
세계 정상의 피아니스트 가운데서도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에게는 한국 최초의 이야기가 몇 개 따라다닌다. 첫째는 자기 피아노를 가지고 왔다는 것, 둘째는 무대 리허설 중에 피아노를 손볼 일이 생기자 손수 했다는 것, 셋째는 2003년 6월 처음 내한했을 때 피아노 몸체 하나에 조율용과 연주용 건반 세트를 하나 더 가지고 왔다는 것, 넷째는 자기 마음에 꼭 들게 조율해 준 조율사에게 감사하다고 관객들 앞에서 공식 인사를 한 것. ……
지메르만은 감격한 모습으로 악수를 청하며 “땡큐 소 머치.”를 연발했다. 무대에서는 청중의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앙코르를 위해 지메르만이 무대로 다시 나갔다. 관객을 향해 지메르만이 말했다.
“미스터 리에게 감사한다. 완벽한 조율로 피아노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지메르만의 인사」중에서
2009년 두 번째 내한 때는 키신과 어머니 두 사람만 왔다. 지난번같이 리허설이 끝나고 약간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율사를 잠깐 만나고 싶다는 표정이다. 나는 바로 무대로 올라가 이야기를 들었다. 고음 쪽 멜로디 부분을 약간만 더 부드럽게 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었다.
이것이 내가 키신과 처음 정면으로 얼굴을 대하는 기회였다. 나는 그것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건반 끝에 가로로 설치된 긴 막대기를 빼고 오른쪽에 있는 나사못을 돌려 타현점(해머가 줄을 때리는 포인트)을 1.5밀리미터쯤 안으로 밀어 넣은 뒤 테스트해 보라고 했다. 아주 적당하다는 대답이다. 그런데 그렇게 음색이 달라지게 만드는 데 단 오 초밖에 걸리지 않으니까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두 사람이 신기해했다. 어디를 어떻게 했느냐 묻기에 설명해 주고 셋이서 통쾌하게 웃었다. 좀 어렵게 했어야 몸값이 올랐을까?
--- 「키신과 동행들」중에서
피아노 앞을 지나가다가, 아니면 연습을 맞추어 보다가 갑자기 피아노를 도레미파솔라시도, 도미솔도로 쳐 본다.
“이거 조율이 엉망인데. 음이 안 맞아.”
그러면 아무 말 없던 피아니스트까지 덩달아 음정이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조율사가 불려 간다.
“뭐가 불편하신가요.”
“조율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선생님! 음이 안 맞는다는 것은 두 가지 중에 하나일 텐데 확실하게 이야기합시다. 음이 높아서 틀립니까, 낮아서 틀립니까?”
“F음이 좀 높은 것 같아요.”
“같아요 하지 마시고 높으면 높다, 낮으면 낮다 둘 중 하나로 택하시지요.”
“F음이 높아요.”
“아, 그래요? 그러면 제가 F음을 서서히 낮출 테니까 맞다고 생각되는 데서 스톱을 부르세요.”
“스톱!”
“자, 이제 맞춘 F음과 상하 옥타브를 들어 보세요. 어떠신가요?”
“이상한데요.”
“그럼 F를 원래 위치로 다시 조율하고 들어 봅시다. 자, 어떠세요? 완전 4도, 5도, 옥타브 모두 깨끗하지요?
음높이 하나를 결정지을 때는 옥타브, 완전 4도, 5도, 장3도, 장6도까지 상호 관계를 원만히 검사하고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음의 위치를 찾아 놓습니다. 이 중 하나만 틀려도 안 됩니다. 오차가 어디서 생겼는지 찾아내서 시정하고서야 결정이 납니다. 이래서 이 F음은 정확한 것이니 편안히 연주하시지요. 저 이제 가도 되지요?”
--- 「음정 시비」중에서
여러 곳에 가서 여기에서도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한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아! 저런 방법도 있었어?’ 하고 감격한 적은 없었다. 나가서 배우는 것은 시간 단축은 되겠지만 스스로 연구하다가 깨닫는 것이 더 큰 기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율에서는 작은 것에 충실해야 한다.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 나는 세미나에서 정음은 “티끌 모아 태산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런데 후배들은 해머 어디를 어떻게 바늘로 찔러야 좋은 소리가 나느냐고 묻는다. 한 방 뚫어서 좋은 소리가 나면 다 그렇게 하겠지만, 똑같이 하더라도 사람마다 다르다. 결과는 조율사가 쌓아 온 노력만큼만 나온다. 오늘 최고의 비법을 배웠다고 해도 내일 그대로는 안 된다.
--- 「조율의 비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