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옛 정원을 조성한 정원가들은 대부분 문인이었다. 그들은 현실 세계와의 싸움에서 잠시 물러나 다시 도약하기 위한 장소로, 때로는 학문과 휴식의 장소로, 혹은 세상과의 일정 정도 단절을 위한 은거지로 산수 수려한 적당한 곳을 골라 정원을 조성했다.
--- p.16, 「서문, 한국 정원 들여다보기」 중에서
영남 지역은 사림파가 많아서 별서가 주로 강학의 장소로 활용됐고, 서울과 호남의 경우에는 주로 교유와 풍류의 장이었다. 또한, 호남의 별서는 주로 넓은 들판이나 멀리 산과 주변 계곡을 같이 즐길 수 있는 곳에 있었다면, 영남과 서울, 충청의 별서는 주로 계곡이나 나무 숲에 있었다. 호남의 별서가 세련되고 섬세하여 여성적이라면, 영남의 별서는 호방하고 투박하며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의 별서들은 세도가들이 소유했던 것인 만큼 화려했다. 충청은 영남과 유사했다. 정자의 형태도 강학의 성격이 강했던 영남은 방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었고, 은일의 기능이 강했던 호남은 방이 정자의 중앙에 있거나 없는 형태 가 많았다.
--- p.23-24, 「서문, 한국 정원 들여다보기」 중에서
그에게 부용동 낙서재는 학문을 강론하고 거처했던 생활공간이었고, 세연지는 자족을 얻는 일상의 소요와 풍류공간이었으며, 동천석실은 선계에 머물고자 했던 신선공간이었다. 보길도 섬 전체가 인간 세상을 떠난 신선의 섬이라면 낙서재는 유학자의 이상적 생활공간으로, 세연지는 세상사를 잊고 풍류와 예술을 즐기는 곳으로, 동천석실은 천상의 세계로 우화등선하는 곳이었다.
--- p.47,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원림」 중에서
일단 소쇄원에 들어서면 몸의 모든 감각을 열어젖히고 천천히 음미하는 게 좋다. 책의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가듯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풍경을 읽어야 한다. 의미 부여는 있는 그대로, 조금씩 하는 게 좋다. 지나친 의미 부여는 오히려 자연스런 감상을 해칠 뿐이다.
--- p.65, 「양산보의 담양 소쇄원 원림」 중에서
경정에 올라 정원 배치를 보면 서석지의 공간이 뚜렷하게 들어온다. 경정과 연못, 행단이 종축을 이루고, 주일재와 사우단, 영귀제가 횡축을 이룬다. 경정의 축이 풍경과 상상의 공간 위주로 구성됐다면, 주일재의 축은 도학과 생활에 깊이 침잠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경정은 신선의 삶을 완상하며 즐기는 공간으로, 주일재는 자연의 네 벗과 생활하는 공간으로, 영귀제는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 p.70-71, 「정영방의 영양 서석지」 중에서
김계행은 성종 11년인 1480년 50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태장을 당했으나 대사간에 임명됐고, 다음 해에는 옥사에 갇혔으나 대사성과 대사헌에 임명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결국 1500년 그의 나이 7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묵계에 안거했다. 김계행은 이듬해인 1501년 그의 나이 71세 때 만휴정을 지었다. 그는 폭포 위 계곡 가에 자신의 별서를 지어 세상과 절연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이른바‘장수지소藏修之所’를 경영했다. 그리하여 늦게 얻은 휴식,‘만휴’를 즐겼던 것이다.
--- p.89, 「안동 만휴정 원림」 중에서
초간정은 어느 것이 자연이고 어느 것이 인공인지 분간할 수 없는 우리 원림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자체로 독립되고 완결된 공간이지만 주변 산수와 조화를 이루어 모든 게 자연스러운 곳, 이곳에 선 자연의 바위와 인공의 정자는 진즉 한몸이 됐다. 바라보면 한 폭의 동양화이고, 내다보면 한 편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곳, 초간정에선 회화적이면서 심미적이고, 상징적이면서 추상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 p.94-95, 「예천 초간정 원림」 중에서
명옥헌에서는 우리의 오감을 모두 깨울 수 있다. 처음 원림에 들어섰을 때 확연히 드러나는 시각적인 풍경, 화려한 꽃들의 감각적인 풍 경, 시를 읊으며 가만히 거니는 시적 풍경, 정자에 올라서서 감상하는 풍경, 계곡 물소리의 청각적인 풍경, 연못에 비친 그림자 풍경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새벽에 명옥헌을 찾는다면 깊은 침묵의 풍경에 세상 일은 금세 잊히고 만다.
--- p.107, 「담양 명옥헌 원림」 중에서
남간정사는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조영 기법을 보여준다. 연못 주변의 자연석은 건축물과 잘 어울린다. 정사 앞으론 마당이 없고 곧 장 연못으로 이어져 정사의 뒤쪽으로 출입해야 한다. 기국정과 연못 사이의 소로를 따라 작은 돌다리를 건너서 돌아가는 길이다.
--- p.113, 「대전 남간정사」 중에서
석파정은 인왕산 기슭 계곡에 있다. 19세기 말 격동의 시대에 왕과 왕실 사람들, 세도가들이 찾았던 비밀의 정원이었다. 예전의 석파정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석파정도] 병풍을 보면 석파정이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계류를 바라보며 들어앉은 사랑채, 안채, 별채 등은 당시 상류 계층의 정원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 p.126, 「서울 석파정」 중에서
백운동은 담장 안쪽의 내원과 담장 바깥의 외원으로 나눌 수 있다. 산의 경사면을 따라 조영된 내원은 다시 본채와 사랑채가 있는‘상 단’, 3단의 화계로 이루어진‘중단’, 상하 두 개의 연못이 있는‘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원에는 동백 숲이 우거진 진입 공간, 담장을 따라 흐르는 계류 공간, 정원 아래쪽 담장 밖에 높이 솟은 정선대 공간, 본채 왼쪽 담장 밖의 대숲 운당원 공간, 본채 담장 뒤편의 후원 공간 등이 있다.
--- p.151, 「강진 백운동 별서」 중에서
다산초당에는 지금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네 가지 경물이 있다. 흔히 ‘다산사경’이라 부르는 다조·약천藥泉·정석丁石·석가산石假山이다. 이것은 다산이 다산초당 주변에 있던 네 가지 경물에 대하여 읊은 칠언 율시인 [다산사경]에서 비롯했다. 『정약용행초다산사경첩丁若鏞行草茶山 四景帖』에 실려 있는데, 유배 중이던 1809년에 썼다.
--- p.171-172, 「강진 다산초당」 중에서
이로써 독락당은 자연 그대로가 정원이 된 유례없는 공간이 됐다. 독락당은 아름다운 산수에 알맞은 공간을 찾아 건물을 세우고 필요에 따라 약간의 인공을 가하는 우리 정원의 일반적인 조영과는 달리, 아예 주변의 산과 자연에 이름만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정원으로 삼은 것이다.
--- p.205, 「경주 독락당」 중에서
하환정은 무기연당 최초의 건물로 정원이 조성될 때부터 중심 공간이었다. 하환정이 있기에 무기연당이 별당 정원의 정체성을 확실히 얻게 된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하환정은 기수의 강물을 떠다니는 한 조각 배로 보인다. 하환정은 무기연당 감상의 핵심 경물이면서 동시에 주변을 아우르고 해석하는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 p.246, 「함안 무기연당」 중에서
삼가헌에서 눈여겨볼 곳은 사랑채 담장 너머에 있는‘하엽정’이라는 별당 정원이다. 이 별당은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1874년(고종 11)에 원래 있던 파산서당巴山書堂을 약간 앞으로 옮기고 누마루를 달아내어 지금의 모습이 됐다. 안채와 사랑채를 지을 때 흙을 파낸 자리에 연못을 만들고 연을 심어 가꾸었다. 그래서 정자의 이름을 하엽정荷葉亭이라 했다.
--- p.254, 「달성 삼가헌 하엽정」 중에서
충재와 청암정은 아주 대조적이다. 충재가 온돌 중심의 내향적인 서재로 낮은 곳에 있다면, 청암정은 마루 중심의 외향적인 정자로 높은 곳에 있다. 충재가 맞배지붕의 단아함으로 깊이 은둔한 형상이라면, 청암정은 팔작지붕의 화려함으로 선계로 비상하는 형상이다.
--- p.267, 「봉화 청암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