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순정만화란 그저 로맨스를 다루는 장르의 갈래가 아니라, 그냥 주력 향유층에 따른 갈래에 가까웠다. 그 갈래 안에서 순정만화를 빙자하여 온갖 것들이, 혁명을 말하는 청년들이, 부친 살해가,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자아에 대한 질문과 정상성에 대한 의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그저 순정만화로 호명되었다. 순정만화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뛰어나고 걸출한 작품들이 많았다. 역설적으로, 그 모든 작업과 성과들이 하나하나의 장르로 분류되고 인정받는 대신 작가들과 독자들의 성별이라는 기준 하나로 ‘순정’이라고 거칠게 묶여버리는 가운데, 순정만화는 학문으로 치면 ‘통섭’이라 부를 만한 단계로 나아가며 발전했다. 다양한 장르의 영향을 받으며 깊이 있게 발전하고, 나아가 현실적인 제약이나 개별 장르의 전형적인 문법에서 파격을 이룰 수 있었다. 단, 제대로 된 분류와 이름이 붙지 못한 채로. 평론가들의 호명을 받는, 극히 일부의 작품만이 “순정만화를 뛰어넘었다”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과 함께, 그 장르의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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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상상해 본다.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에서 근미래를 다룬 SF 만화들을 보고 있던 당시의 순정만화 독자의 기분을. 그 만화들의 활달하고 유능하며 강한 한국계 여성 주인공들은 그때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물론 지금은 한국 작가가 쓴, 한국이 배경이고 한국인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무척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근미래 SF에서 현재 한국인이 겪고 있는 문제와 고민들의 연장선이 다루어지는 것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한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문화계의 변방이었고, 정작 한국인 독자들이 한국이 배경인 SF를 낯설어 하기도 했다. 바로 그런 시대에, 한국 순정만화는 이미 한국계 여성 주인공들을 세계로, 우주로, 머나먼 과거와 미래로 거침없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가장 대중적이면서, 가장 진보적인 장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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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이 작품의 가제 중 하나는 ‘Border Line’이었다. 경계선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작중 챕터 제목으로도 쓰였다. 이 말 그대로 마르스는 경계선에 서 있다. 화성에서 태어난 자연 출생아라고 생각했지만 지구에서 트롤 박사가 만들어 낸 유전자 조작 실험체였다. 평소에는 강력한 초능력을 지녔고 행동력 강한 금발의 에스퍼 여성이지만 일정 기간이 되면 초능력이 없는 평범하고 얌전한 흑발 남성, 가이 S. 헤스턴으로 변한다. 때로는 경계선에 서 있고, 때로는 이 선을 양쪽으로 넘나드는 마르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스러워 한다. …하지만 강경옥은 이 무거운 짐을 마르스 한 사람에게만 떠넘기지 않는다. 시온과 이샤, 비너스 등 외모만 봐서는 어느 쪽 성별로 바로 패싱되지 않는 인물들을 여럿 배치했다. …이 만화가 나왔을 당시의 한계로 이 모든 관계가 작가의 말에서조차 ‘보편적 사랑’으로 뭉뚱그려졌을지언정, 이런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노말 시티』는 2020년에도 충분히 낡지 않고 동시대성을 지닌 작품이 된다.
--- p.148~149
달처럼 황량하고 재로 뒤덮인 듯한 세계에 바벨탑처럼 우뚝 서 있는 ‘탑’에서, 제대로 AS를 받는다면 언제까지라도 살아갈 수 있는 안드로이드들은 인류가 사라진 세계에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산다. 복종해야 하는 인간들도 없는 지금, 그들에게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고 탑을 스스로의 감옥 삼아 살아가던 에어의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수리를 받던 에어의 몸 안에서 제작자 나디아 박사의 갈비뼈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어는 문득 말한다. “우리가 인간을 만들 수 있을까.” 자신이 에어의 제작자라는 증거로, 그 몸 안에 자신의 부러진 갈비뼈를 넣었다는 엉뚱한 말을 했던 나디아 박사와 창조주가 남긴 갈비뼈로 나디아 박사를 복제하는 에어. 그리고 어린 나디아가 태어나며 에어의 멈추어 있던 시간은 다시 흐르고, 인간과의 추억도 되살아난다.
--- p.159~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