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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 1

황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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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1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668쪽 | 716g | 140*205*35mm
ISBN13 9788950988999
ISBN10 895098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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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인은 뭔가 달라서요.” 영징이 여전히 무척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왠지 조금 익숙한 느낌이 듭니다. 조금은 어둡고 조금은 교활하고 조금은 차갑고 또 조금은…… 요상한 게…….” 영징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꼭…….” 영징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조금 드러나 있었다. 조금은 어둡고, 조금은 교활하고, 조금은 차갑고, 조금은 요상한…….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징이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알아냈다는 듯 손뼉을 쳤다. “주군을 닮았습니다!”
--- p.55

고남의가 아련한 듯이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따로 등불이 없는 탓에 그런 고남의를 비추는 건 하얀 달빛뿐이었다. 눈처럼 하얀 빛 아래에서 그는 얼굴을 가린 망사를 반쯤 걷고 백옥 같은 피부 위에 붉게 자리 잡은 얇고 부드럽고 광택을 머금은 입술을 길고 곧은 손끝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하얀 손끝에 닿은 붉은 입술이 마치 한겨울 눈밭에 핀 붉은 설연화(雪蓮花) 같았다. 감옥이나 다름없는 작은 방 한 칸이 순식간에 황홀한 꿈속 세계로 변했다.
--- p.217

봉지미가 애원했다면 죽였을 것이었다. 봉지미가 울음을 터트렸다면 죽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봉지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그를 마주했을 뿐이었다. 문득 이 여인을 우연히 마주친 그날 이후로 그가 보았던 봉지미의 모든 것이 떠올랐다.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성을 지키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영혼이었다.
--- p.283

“소신 황제 폐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의기양양할 필요도 없고 진심이 아닌 사양을 거듭할 필요도 없었다. 사양한다고 해서 사양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황제가 내리는 것은 밥이든 죽이든 응당 감사히 받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를 거절한다는 건 곧 다른 마음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 될 것이었다. 사실 봉지미는 제가 감당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라는 자신이 있기도 했다. 사람은 앉은 지위만큼의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법이고, 오로지 권력을 손에 넣은 자만이 이 세상과 동등하게 맞설 권리를 가지는 법이었다. 봉지미는 지금껏 질리도록 양보했다. 끊임없이 다른 이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며 버텨왔다. 당장 한 걸음 앞이 낭떠러지라 하더라도 한 치 앞을 모르는 흙먼지 속에서 또 다른 이들에게 짓밟히는 것보다는 백번 나은 일이었다.
--- p.304

이전까지는 그래도 별거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영혁은 이미 자신의 길에 걸음을 내디뎠고, 피의 전쟁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수천수만의 목숨이 제 손에 달려 있었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도 마음이 약해질 수도 없었다. 마음이 걸음을 붙잡도록 내버려 두었다간 곧 몰아칠 소용돌이에 맞설 수 없게 될 터였다. 위지. 봉지미. 너와 나는 이제 적이다.
--- p.350

안 씨가 증오 가득한 눈으로 봉지미를 쏘아보다 제 얼굴 앞에 놓인 봉지미의 발끝을 콱 깨물었다. 하지만 봉지미의 단단한 신 때문에 물어지지가 않았다. 봉지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안 씨를 내려보며 발끝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안 씨가 크헉, 소리를 내며 나가 떨어졌다. 땅에 부딪히는 충격에 안 씨의 이가 혀를 깨물었고 입에서 피가 철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봐, 안 씨. 내 말 꼭 기억해. 하늘이 만든 화는 피해도 스스로 자초한 화는 피할 수가 없는 거야. 오늘부터는 처신을 아주 잘해야 할 거야.”
--- p.403

영혁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지더니 곧 완전히 끊겼다. 봉지미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잠들어 있었다. 봉지미가 안도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제 옷매무시를 정리하던 봉지미는 침대에 가로로 걸쳐 누운 영혁의 모습을 발견했다. 반쯤 풀린 옷깃 사이로 드러난 눈처럼 하얀 피부 위로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이 내려앉아 있었다. 평소의 우아한 모습보다 조금 더 수려하고 매혹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봉지미는 이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 p.455

“그대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아내가 침대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데…….” 봉지미가 두 눈을 깜빡였다. “아직 술이 덜 깨 몽중에 계신가 봅니다.” 영혁이 화내지 않고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봉지미를 향해 손을 뻗은 그는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봉지미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봉지미 역시 저항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두었다. 옅은 술 내음이 그의 화려하고 맑은 살 내음과 뒤엉켜 한꺼번에 몰려왔다. “어렵사리 잠에 들었는데…….” 영혁이 봉지미의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렵사리 그대와 이렇게 사이가 좋은데…….” “전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봉지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사이좋은 순간들이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 p.461

혁련쟁은 다른 이들의 반응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전히 보물 다루듯 소중한 손길로 봉지미의 옷자락을 잡아 주며 궁 안에서 타고 이동할 가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봉지미 역시 다른 이들이 보인 반응을 똑똑히 보고 들었지만 그저 옅게 한번 웃고 넘겼을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멍청하고 단순해서 진짜 가치는 알아보지 못하는 족속들이었다. 혁련쟁처럼 껍데기에 휘둘리지 않고 진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 p.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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