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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작품론 | 류보선(문학평론가) 수치심과 죄책감 사이 혹은 우리 시대의 윤리 초판 작가의 말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 |
저김영하
관심작가 알림신청Kim Young-Ha,金英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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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였더라? 스페인, 아니 아르헨티나 작가였나. 이젠 작가 이름 따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간 누군가의 소설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노작가가 강변을 산책하다가 한 젊은이를 만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중에야 깨닫는다. 강변에서 만난 그 젊은이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 p.29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 p.53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잔의 독주일지도. --- p.73 “박주태는 어떻게 만났니?” 아침을 먹다 은희에게 물었다. “우연히요. 정말 우연히요.” 은희가 말했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 p.87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직 딱 한 가지에만 능했는데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긍심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 --- p.153 오래전 과거는 생생하게 보존하면서 미래는 한사코 기록하지 않으려 한다. 마치 내게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듭하여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미래라는 것이 없으면 과거도 그 의미가 없을 것만 같다. --- p.157 오이디푸스는 무지에게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 --- p.174~175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 p.195 |
“훌륭한 캐릭터와 심리학적 통찰, 기가 막힌 스토리텔링을 모두 갖춘 독창적인 작품의 완벽한 예시이며 또한 근사한 사회 비평이기도 하다.” _영국 NB매거진
선과 악,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 죄와 용서에 관한 어두운 사색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라는 모티프는 이 소설이 지닌 여러 층위의 아이러니 중 가장 중요한 장치다. 수많은 타인의 생을 아무렇지 않게 앗아간 악인 김병수는 자신의 기억과 딸을 지키려 애쓰지만, 결국 그 무엇도 아닌 시간에 서서히 패배하고 만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도 늙음과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것이다. 자신의 악행을 잊고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해가는 망각은 얼핏 그에게 축복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망각하는 존재로서의 삶은 재앙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처벌받고 있다는 것을.” 김병수가 맞닥뜨린 이러한 아이러니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어찌해볼 수 없는 삶의 어떤 국면과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정교한 플롯에 기억과 소멸에 대한 묵직하고 예리한 통찰이 녹아들어 있는 이 소설은 “거대한 반전 혹은 완벽한 배반”(류보선)을 이루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뚜렷한 선악 구도에서 벗어난 출구 없는 서사,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화자의 강렬한 독백, 관습적 사고를 교란하는 촌철살인의 문장들은 『살인자의 기억법』이 왜 김영하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소설로 꼽혀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